조정칠 목사 "왜 하나님을 옹기안에 가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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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 2009-12-0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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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조정칠 목사는 최근 할아버지 시리즈로 <옹신론(甕神論)>, <요한의 예수환상곡 G 장조>, <사람안에 사람있어>등 3권을 냈다.
이중 <옹신론>은 "한국교회를 향한 견고하고도 날카로운 한마디"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조정칠 목사는 이책을 통해 50여년의 목회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한국교회에 대한 문제점을 특유의 필체로 지적하고 있다. 아멘넷은 3번에 걸쳐 소개한 <옹신론>의 마지막 내용이다.
아래 소개한 내용에는 55년 경력 목회자의 한국과 한인교회에 대한 충언이 담겨있다. 어떤때는 후배목회자에 대한 신랄한 야단이 계속된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딱한 이야기"라는 시리즈 이름에서 보듯이 그속에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담겨있다. -편집자
하나님을 옹기안에 가두지 말라
책의 제목인 <옹신론(甕神論)>에는 조정칠 목사가 하고 싶은 메세지가 담겨있다. 독특한 신조어인 '옹신(甕神)'이란 항아리에 든 신을 말한다.
조정칠 목사는 "옹신론을 지금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이 퇴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기독교가 병이 드는 것은 신관의 혼란 때문"이라고 책의 의도를 말하고 있다.
신관 혼란의 주요원인중 하나는 옹신(甕神) 때문이다. 옹신이란 유신(有神)도 무신(無神)도 아니다. 신은 있지만 사람들에 의해 옹기안에 담겨있다. 하지만 옹기안에 든 신은 바른 신이 아니다. 현대교회는 많은 경우 옹기안에 든 옹신을 믿고 있다. 필요하다면 옹기에서 신을 꺼내 섬기고, 필요가 없다면 옹기의 뚜껑을 닫아 신을 가두거나 옹기채로 버리기도 한다.
하나님을 옹기안에 가두면 어떤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면서 자신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옹신을 믿으면 어떤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은 이름만 있고 실제로는 사람들이 주인 노릇을 하며, 교회는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운영되어 마치 종교놀이 같게 된다. 또한 자신이 어떤사람인지 모르고 교회만 다니는 교회중독자,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예수를 전혀 닮지 않은 성도와 목사들이 나타난다.
구약성경에도 옹신과 흡사한 금송아지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하나님을 배반하는 역사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자행되어 왔으며 지금도 그렇다.
교회들의 수준이 전에 비해 많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신앙은 그럴수록 더 위험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오히려 지식인중에 무신론이 많다. 또 신앙의 자유가 있고 박해가 없을 수록 신앙은 쇠퇴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신앙이 바뀌었다면 모든 것은 새로워 져야 한다. 대문의 문패를 바꾸어 달았다고 내집이라고 할수는 없다. 옛주인의 살림을 다 들어내고 새주인의 살림살이로 바꾸어 놓아야 명싱공히 새로운집이 되는 것이다.
목사를 별로 보니 딱하다
목사의 역할은 막중한 만큼 영향력이 대단히 위험하다. 목사가 생각을 잠시 잘못하면 수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무서운 일이 일어날수도 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목사의 교양과 신앙과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할수 밖에 없다. 목사는 자기관리의 책임을 져야 한다.
중요한것은 목사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목사는 자신을 별(星)과 별(別) 두가지로 볼수 있다. 두가지 차이는 왕과 하인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목사는 자신을 별과 같이 고귀한 존재(星)로 볼수도 있지만, 낮고 천한 별(別)로도 볼수도 있다.
교인들이 자기 목사를 스타로 보는 것과 목사 스스로 스타로 보는 것은 다르다. 항간에는 스타같은 목사들이 많이 있다. 자기의사와 상관없이 목사의 역할이 스타같은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스타 흉내를 내는 것 같이 보일때도 있다.
우리들은 세상의 많은 스타(星)들의 추락을 보고 있다. 예수님도 높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목사는 스타가 아니며 스타가 되어서도 안된다. 목사는 종으로 스타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요즘은 스타촌을 만들어 스타끼리 놀고 지내는 부패현상도 있다.
목사는 종 즉 하인이다. 교인들이 하인이 잘하니 고마워서 별(星)로 불러주는 것이 진정한 스타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데 스스로 스타인 척하면 딱하다. 목사들이 자신을 높이려고 무리수를 두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그것이 사회를 실망시키고 교회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다.
목사가 스타가 되면 기분이 좋을지는 모르지만 목사로 수행하기는 아주 불편하다. 목사는 화를 참아야 할때가 많이 있지만 스타는 그럴수 없다. 하지만 하인은 참고 기다린다. 때가 온다고 믿고 기다릴수 있다. 이런것들이 스타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낮게 살면 높여 주시는 것을 믿지 못하면 목사직을 그만 두는 것이 속 편할것이다.
목자가 없으니 딱하다
요즘 목사중에 목자라는 개념이 없어 보일때가 많다. 예수께서도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하셨다. 목자는 양을 위하여 존재한다. 양을 교인으로 목자를 목사로 볼때, 목사는 교인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교인이 없으면 목사가 있을 이유가 없다. 교인에게 목사 또한 중요한 존재이다. 서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목적이 된다.
많은 목사들이 목사는 인정하지만 목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교인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목사일뿐, 목축을 의미하는 노동자는 싫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의 일꾼들을 농부와 어부등 노동자로 보내셨다. 목회를 노동정신으로 해야 진정한 목사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목사가 선생의 자리를 고수하겠다는 것은 예수의 일꾼으로 적임자는 아니다.
목자는 양을 자식같이 돌보기를 즐거워 한다. 하지만 아무런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양으로 부터가 아니라 양의 주인으로 부터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보상을 기대하면 큰 실망을 낳게 될것이다.
목자는 양을 방출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교회에서는 목사가 교인들을 대량 방출한다. 공개적으로 교회를 나가라고 한다. 그것은 목자의 도리가 아니다. 양을 보호해야 할 목자가 도리어 양을 위협하고 압박을 하는 것은 목자가 취할 도리가 아니다.
목사가 너무 많아 딱하다
목사가 많아져 갈곳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수용과 공급의 공식을 놓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도시에 교회를 개척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선교사로 많이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선교사는 목사보다 더 준비해야 하고 실력을 요구하기에 위험한 일이다.
목사가 노동을 할수도 있다. 노동판에서 노동자를 상대로 전도할 뜻이라면 노동을 못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목사가 지금보다 더 많아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전도 교육 봉사 구제의 도우미로 전도할 목사는 얼마든지 요구가 된다. 목사가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라고 말해줄수 없다. 찾아서 하는 것은 그대들의 몫이다.
이른바 목사의 수난시대이다. 옛날에는 목사라고 하면 신임을 받았다. 누구를 만나도 목사는 정직하다고 믿어 주었으며, 무엇을 맡기기 힘들면 목사에게 맡기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목사들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전에는 목사는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것이 생각했는데, 이제는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목사가 너무 잘났기 때문이다. 잘났다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목사가 많다.
규모가 큰 교회의 기관마다 목사를 채용해서 사용하는 방법이 좋다. 직장으로 가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목사가 목회에 바치는 수고를 생각한다면 왠만한 직장의 노역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목사라는 자격증이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목사의 마음과 목사의 정신과 목사의 영성과 목사의 노력과 목사의 희생이 종합되어야 목사이다. 달랑 신학교 졸업장 하나 믿고 목사안수를 받아서 대책없이 멍청하게 두리번 거리지는 말아야 할것이다.
뛰어가다 보면 보이게 되어 있다. 빗자루 하나들고 동네 골목을 열심히 쓸줄 안다면 그사람은 평생 굶는 일이 없다는 교훈이 있다.
사람마다 개인에게 부여하신 창조주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유명인을 모방하여 흉내를 내는 정도면 앞날이 암담하다. 자기것을 찾고 개발하여 하나님이 그속에 심어주신 자신의 가치를 활용할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할일이 있고 갈곳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뭉치기만 잘하니 딱하다
기독교는 소금의 종교이다. 소금이 일단 들어가면 무엇이 달라져도 달라진다. 또 소금이 쓰일때 반드시 분말로 사용된다. 소금은 뭉쳐 덩어리로 사용할수 없다.
소금이 들어가면 변화가 있는데 교인이 들어간 곳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예를 보기가 힘들다. 들어가도 안들어가도 그만인 경우가 많다. 복음으로 정복하는 조용한 세력이 소금이다. 소금은 절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들어가면 확실한 반응이 있다.
뭉치면 힘이 있는 것 처럼 보여도 오히려 많은 폐단이 생길 우려가 있다. 생명이라는 것은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독교적 신앙은 생명을 의미한다. 뭉치는 것은 덩어리이며 생명의 덩어리가 아니다.
교인은 혼자라도 힘이 있다. 교인은 하나하나가 개체로 역사하는 동력이다. 생명은 개성이 있는 법이다. 덩어리가 되면 개체는 죽는다. 각자의 개성은 존중을 받아야 활용된다. 그런데 요즘은 교인들의 개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용가치로 교인을 구별한다. 유명인사 꽁무니에 줄서기와 아무개 처럼 하라고 자존심까지 짓 밟는다. 목사와 장로들도 뭉치기를 좋아하여 별의별 이름으로 뭉친다.
교인이라도 직장에 가면 한 직장인으로 회사가 잘되도록 힘을 써야 한다. 직장과 교회와 상관이 없다. 직장에서 교인이 할일은 모범적으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그런데 또 뭉치기를 한다. 교인이 뭉치면 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배제하는 꼴이 된다. 그것은 신앙을 역행하는 짓이다.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직장에서 예배를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일을 해야 할 직장에서 왜 예배를 하는가. 그것은 신앙과 전혀 관련없는 행위이다. 그것은 종교를 놀이로 아는 사람들이 종교놀이를 하면서 위안을 받자고 하는 것이다. 직장에서 교인들이 뭉쳐서 생긴 힘은 신앙의 힘이 아니다. 회사의 방해요인이 되는 것은 신앙인의 길이 아니다.
직장 예배를 이끈 경험이 있다. 그들의 신앙이 잘못된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조직이 되어서 무슨 의무처럼 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직장에서 마저 채워보자는 것이다. 좋은 신앙은 참고 억제하는 것이다. 소금은 작정량을 초과하여 사용하면 독이 된다. 교인들이 필요이상으로 뭉치면 복음에 방해가 될수도 있다.
교회가 놀이정서가 지나쳐 딱하다
이 시대가 쾌락을 우상처럼 받드는 것이 확연하다. 교회는 재미, 즐거움, 놀이 보다는 영적으로 성숙하게 이끌어야 한다. 놀이는 교회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세상을 따라 잡을수 없다.
그런데 교회는 편하고 즐겁게 교인들을 관리하는 풍토가 있다. 우선 설교가 그런 방향으로 간다. 즐겁고 재미있는 설교를 선호하여 위트와 유머를 넘어 코메디가 되기도 한다. 그런것을 못하는 목사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놀이식 프로그램들이 많이 개발 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시대적인 요청이 아닌가 한다.
세상 재미에 끌려서 교회를 멀리하게 될까봐 경건에 치명적인 해가 되지 않는다면 대다수의 사회적인 유행을 교회도 수용하게 된다. 예배중에도 열린예배가 있다. 성경에도 기독교 전통에도 없는 예배가 TV 프로그램 열린음악회가 인기를 끌면서 재빠르게 모방을 했다. 예배는 원래부터 열려 있다.
우려하는 것은 교인의 정서가 재미에 젖어 버리면 뒷감당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크다. 하나님과 놀자는 것은 망령된 생각이다. 은혜와 진리, 사랑과 평화, 겸손과 헌신, 그런 건전한 방향으로 교인을 이끌어 나간다면 유치한 놀이가 아니라도 교회는 건강하게 부흥이 될것이다.
말씀이 궁하니 딱하다
말씀은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때 진지하고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목사들이 설교를 할때 '말씀'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사용한다. 마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모독을 하는 느낌을 받았다. 말씀은 가치없이 남발할수 없는 거룩한 귄위가 있다.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여 말하는 것이다. 설교가 다 말씀이 아니다. 목사의 말이라고 해야 정직하다. 말과 말씀은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목사의 말을 같은 선상에 놓을수는 없다.
목사들은 자신이 설교하는 모든 말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착각하는지는 모르지만 터무니 없는 욕심이다. 설교자의 말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때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목사가 말하는 설교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설교자는 허공을 친것이 불과하다. 그런데 대다수의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말과 믹싱을 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집회에서 은혜를 받겠다면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목회중 기도원에 자주가는 교인을 주의깊게 관리를 했다. 자기 교회에서 말씀을 체험하지 못한 교인이 다른 곳에서 말씀을 받았다면 그것은 말씀이 아니라 자기 취향이 충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말씀은 이성과 감성, 그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많은 교인들이 이성을 베재한 감성만을 영성으로 아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말씀이 아니다. 그런 현대교회의 말씀이 궁한 현실이 딱하다.
ⓒ 2009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이중 <옹신론>은 "한국교회를 향한 견고하고도 날카로운 한마디"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조정칠 목사는 이책을 통해 50여년의 목회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한국교회에 대한 문제점을 특유의 필체로 지적하고 있다. 아멘넷은 3번에 걸쳐 소개한 <옹신론>의 마지막 내용이다.
아래 소개한 내용에는 55년 경력 목회자의 한국과 한인교회에 대한 충언이 담겨있다. 어떤때는 후배목회자에 대한 신랄한 야단이 계속된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딱한 이야기"라는 시리즈 이름에서 보듯이 그속에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담겨있다. -편집자
하나님을 옹기안에 가두지 말라
책의 제목인 <옹신론(甕神論)>에는 조정칠 목사가 하고 싶은 메세지가 담겨있다. 독특한 신조어인 '옹신(甕神)'이란 항아리에 든 신을 말한다.
조정칠 목사는 "옹신론을 지금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이 퇴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기독교가 병이 드는 것은 신관의 혼란 때문"이라고 책의 의도를 말하고 있다.
신관 혼란의 주요원인중 하나는 옹신(甕神) 때문이다. 옹신이란 유신(有神)도 무신(無神)도 아니다. 신은 있지만 사람들에 의해 옹기안에 담겨있다. 하지만 옹기안에 든 신은 바른 신이 아니다. 현대교회는 많은 경우 옹기안에 든 옹신을 믿고 있다. 필요하다면 옹기에서 신을 꺼내 섬기고, 필요가 없다면 옹기의 뚜껑을 닫아 신을 가두거나 옹기채로 버리기도 한다.
하나님을 옹기안에 가두면 어떤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면서 자신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는 옹신을 믿으면 어떤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은 이름만 있고 실제로는 사람들이 주인 노릇을 하며, 교회는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운영되어 마치 종교놀이 같게 된다. 또한 자신이 어떤사람인지 모르고 교회만 다니는 교회중독자,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예수를 전혀 닮지 않은 성도와 목사들이 나타난다.
구약성경에도 옹신과 흡사한 금송아지 이야기가 나온다. 이러한 하나님을 배반하는 역사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자행되어 왔으며 지금도 그렇다.
교회들의 수준이 전에 비해 많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신앙은 그럴수록 더 위험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오히려 지식인중에 무신론이 많다. 또 신앙의 자유가 있고 박해가 없을 수록 신앙은 쇠퇴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신앙이 바뀌었다면 모든 것은 새로워 져야 한다. 대문의 문패를 바꾸어 달았다고 내집이라고 할수는 없다. 옛주인의 살림을 다 들어내고 새주인의 살림살이로 바꾸어 놓아야 명싱공히 새로운집이 되는 것이다.
목사를 별로 보니 딱하다
목사의 역할은 막중한 만큼 영향력이 대단히 위험하다. 목사가 생각을 잠시 잘못하면 수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무서운 일이 일어날수도 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목사의 교양과 신앙과 인격을 전적으로 신뢰할수 밖에 없다. 목사는 자기관리의 책임을 져야 한다.
중요한것은 목사가 스스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다. 목사는 자신을 별(星)과 별(別) 두가지로 볼수 있다. 두가지 차이는 왕과 하인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목사는 자신을 별과 같이 고귀한 존재(星)로 볼수도 있지만, 낮고 천한 별(別)로도 볼수도 있다.
교인들이 자기 목사를 스타로 보는 것과 목사 스스로 스타로 보는 것은 다르다. 항간에는 스타같은 목사들이 많이 있다. 자기의사와 상관없이 목사의 역할이 스타같은 경우도 있지만 스스로 스타 흉내를 내는 것 같이 보일때도 있다.
우리들은 세상의 많은 스타(星)들의 추락을 보고 있다. 예수님도 높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셨다. 목사는 스타가 아니며 스타가 되어서도 안된다. 목사는 종으로 스타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요즘은 스타촌을 만들어 스타끼리 놀고 지내는 부패현상도 있다.
목사는 종 즉 하인이다. 교인들이 하인이 잘하니 고마워서 별(星)로 불러주는 것이 진정한 스타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데 스스로 스타인 척하면 딱하다. 목사들이 자신을 높이려고 무리수를 두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그것이 사회를 실망시키고 교회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다.
목사가 스타가 되면 기분이 좋을지는 모르지만 목사로 수행하기는 아주 불편하다. 목사는 화를 참아야 할때가 많이 있지만 스타는 그럴수 없다. 하지만 하인은 참고 기다린다. 때가 온다고 믿고 기다릴수 있다. 이런것들이 스타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낮게 살면 높여 주시는 것을 믿지 못하면 목사직을 그만 두는 것이 속 편할것이다.
목자가 없으니 딱하다
요즘 목사중에 목자라는 개념이 없어 보일때가 많다. 예수께서도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하셨다. 목자는 양을 위하여 존재한다. 양을 교인으로 목자를 목사로 볼때, 목사는 교인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교인이 없으면 목사가 있을 이유가 없다. 교인에게 목사 또한 중요한 존재이다. 서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목적이 된다.
많은 목사들이 목사는 인정하지만 목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교인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목사일뿐, 목축을 의미하는 노동자는 싫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의 일꾼들을 농부와 어부등 노동자로 보내셨다. 목회를 노동정신으로 해야 진정한 목사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목사가 선생의 자리를 고수하겠다는 것은 예수의 일꾼으로 적임자는 아니다.
목자는 양을 자식같이 돌보기를 즐거워 한다. 하지만 아무런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양으로 부터가 아니라 양의 주인으로 부터 상급을 받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많은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보상을 기대하면 큰 실망을 낳게 될것이다.
목자는 양을 방출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교회에서는 목사가 교인들을 대량 방출한다. 공개적으로 교회를 나가라고 한다. 그것은 목자의 도리가 아니다. 양을 보호해야 할 목자가 도리어 양을 위협하고 압박을 하는 것은 목자가 취할 도리가 아니다.
목사가 너무 많아 딱하다
목사가 많아져 갈곳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수용과 공급의 공식을 놓고 생각을 하기도 한다. 도시에 교회를 개척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선교사로 많이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선교사는 목사보다 더 준비해야 하고 실력을 요구하기에 위험한 일이다.
목사가 노동을 할수도 있다. 노동판에서 노동자를 상대로 전도할 뜻이라면 노동을 못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목사가 지금보다 더 많아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전도 교육 봉사 구제의 도우미로 전도할 목사는 얼마든지 요구가 된다. 목사가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라고 말해줄수 없다. 찾아서 하는 것은 그대들의 몫이다.
이른바 목사의 수난시대이다. 옛날에는 목사라고 하면 신임을 받았다. 누구를 만나도 목사는 정직하다고 믿어 주었으며, 무엇을 맡기기 힘들면 목사에게 맡기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목사들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전에는 목사는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것이 생각했는데, 이제는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목사가 너무 잘났기 때문이다. 잘났다고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목사가 많다.
규모가 큰 교회의 기관마다 목사를 채용해서 사용하는 방법이 좋다. 직장으로 가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목사가 목회에 바치는 수고를 생각한다면 왠만한 직장의 노역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목사라는 자격증이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목사의 마음과 목사의 정신과 목사의 영성과 목사의 노력과 목사의 희생이 종합되어야 목사이다. 달랑 신학교 졸업장 하나 믿고 목사안수를 받아서 대책없이 멍청하게 두리번 거리지는 말아야 할것이다.
뛰어가다 보면 보이게 되어 있다. 빗자루 하나들고 동네 골목을 열심히 쓸줄 안다면 그사람은 평생 굶는 일이 없다는 교훈이 있다.
사람마다 개인에게 부여하신 창조주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유명인을 모방하여 흉내를 내는 정도면 앞날이 암담하다. 자기것을 찾고 개발하여 하나님이 그속에 심어주신 자신의 가치를 활용할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할일이 있고 갈곳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뭉치기만 잘하니 딱하다
기독교는 소금의 종교이다. 소금이 일단 들어가면 무엇이 달라져도 달라진다. 또 소금이 쓰일때 반드시 분말로 사용된다. 소금은 뭉쳐 덩어리로 사용할수 없다.
소금이 들어가면 변화가 있는데 교인이 들어간 곳에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예를 보기가 힘들다. 들어가도 안들어가도 그만인 경우가 많다. 복음으로 정복하는 조용한 세력이 소금이다. 소금은 절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들어가면 확실한 반응이 있다.
뭉치면 힘이 있는 것 처럼 보여도 오히려 많은 폐단이 생길 우려가 있다. 생명이라는 것은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독교적 신앙은 생명을 의미한다. 뭉치는 것은 덩어리이며 생명의 덩어리가 아니다.
교인은 혼자라도 힘이 있다. 교인은 하나하나가 개체로 역사하는 동력이다. 생명은 개성이 있는 법이다. 덩어리가 되면 개체는 죽는다. 각자의 개성은 존중을 받아야 활용된다. 그런데 요즘은 교인들의 개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용가치로 교인을 구별한다. 유명인사 꽁무니에 줄서기와 아무개 처럼 하라고 자존심까지 짓 밟는다. 목사와 장로들도 뭉치기를 좋아하여 별의별 이름으로 뭉친다.
교인이라도 직장에 가면 한 직장인으로 회사가 잘되도록 힘을 써야 한다. 직장과 교회와 상관이 없다. 직장에서 교인이 할일은 모범적으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그런데 또 뭉치기를 한다. 교인이 뭉치면 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배제하는 꼴이 된다. 그것은 신앙을 역행하는 짓이다. 복음은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직장에서 예배를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일을 해야 할 직장에서 왜 예배를 하는가. 그것은 신앙과 전혀 관련없는 행위이다. 그것은 종교를 놀이로 아는 사람들이 종교놀이를 하면서 위안을 받자고 하는 것이다. 직장에서 교인들이 뭉쳐서 생긴 힘은 신앙의 힘이 아니다. 회사의 방해요인이 되는 것은 신앙인의 길이 아니다.
직장 예배를 이끈 경험이 있다. 그들의 신앙이 잘못된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조직이 되어서 무슨 의무처럼 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직장에서 마저 채워보자는 것이다. 좋은 신앙은 참고 억제하는 것이다. 소금은 작정량을 초과하여 사용하면 독이 된다. 교인들이 필요이상으로 뭉치면 복음에 방해가 될수도 있다.
교회가 놀이정서가 지나쳐 딱하다
이 시대가 쾌락을 우상처럼 받드는 것이 확연하다. 교회는 재미, 즐거움, 놀이 보다는 영적으로 성숙하게 이끌어야 한다. 놀이는 교회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세상을 따라 잡을수 없다.
그런데 교회는 편하고 즐겁게 교인들을 관리하는 풍토가 있다. 우선 설교가 그런 방향으로 간다. 즐겁고 재미있는 설교를 선호하여 위트와 유머를 넘어 코메디가 되기도 한다. 그런것을 못하는 목사는 여러가지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놀이식 프로그램들이 많이 개발 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시대적인 요청이 아닌가 한다.
세상 재미에 끌려서 교회를 멀리하게 될까봐 경건에 치명적인 해가 되지 않는다면 대다수의 사회적인 유행을 교회도 수용하게 된다. 예배중에도 열린예배가 있다. 성경에도 기독교 전통에도 없는 예배가 TV 프로그램 열린음악회가 인기를 끌면서 재빠르게 모방을 했다. 예배는 원래부터 열려 있다.
우려하는 것은 교인의 정서가 재미에 젖어 버리면 뒷감당이 어렵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크다. 하나님과 놀자는 것은 망령된 생각이다. 은혜와 진리, 사랑과 평화, 겸손과 헌신, 그런 건전한 방향으로 교인을 이끌어 나간다면 유치한 놀이가 아니라도 교회는 건강하게 부흥이 될것이다.
말씀이 궁하니 딱하다
말씀은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때 진지하고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목사들이 설교를 할때 '말씀'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사용한다. 마치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모독을 하는 느낌을 받았다. 말씀은 가치없이 남발할수 없는 거룩한 귄위가 있다.
목사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하여 말하는 것이다. 설교가 다 말씀이 아니다. 목사의 말이라고 해야 정직하다. 말과 말씀은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목사의 말을 같은 선상에 놓을수는 없다.
목사들은 자신이 설교하는 모든 말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착각하는지는 모르지만 터무니 없는 욕심이다. 설교자의 말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때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목사가 말하는 설교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설교자는 허공을 친것이 불과하다. 그런데 대다수의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말과 믹싱을 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생각한다.
자기 목사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집회에서 은혜를 받겠다면 영적인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목회중 기도원에 자주가는 교인을 주의깊게 관리를 했다. 자기 교회에서 말씀을 체험하지 못한 교인이 다른 곳에서 말씀을 받았다면 그것은 말씀이 아니라 자기 취향이 충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말씀은 이성과 감성, 그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많은 교인들이 이성을 베재한 감성만을 영성으로 아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말씀이 아니다. 그런 현대교회의 말씀이 궁한 현실이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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