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모 목사 "교회세습 방지법과 카톨릭의 사제독신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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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 2012-09-2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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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의 교계에서는 소위 `교회세습`에 대하여 찬반토론이 한창이다. 마치 과거 천주교회의 신부의 결혼반대를 연상케 한다. 혈연간 교회세습 반대론이 마치 교회세습을 큰 범죄나 되는 듯 연일 세속언론의 입을 빌어서까지 비난일색이다 보니, 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그 의견을 개진할만한 여유로움도 얻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는 마치 한국개신교회의 모든 문제점이 세습방지법안 하나로 다 해결될 수 있다는 듯, 세간에 알려진 인물들의 입조차 빌려가면서 연일 십자포화가 줄을 잇는다. 다소 지나치다 여겨질 만큼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여겨지는 것은 이미 탈무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토론부재의 상황을 맞는가 싶다.
무엇보다도 어느 정도는 세습이 이미 완료된 상황임을 알면서도, `사후약방문`격에 불과한 세습방지법안을 상정하는 감리교회의 입법취지는 무엇일까? 더욱이 기존세습을 완료한 교회들과 사전합의도 없이 입법을 추진하면서도, 소급적용도 없는 입법안이라면 무언가 바로잡겠다는 목표라기보다 단지 선언적 의미밖에 달리 해석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 법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야말로 전체 교회 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에게만 해당하는 금법인데, 이 법안은 전체교회에는 해당되지도 않는 지극히 몇%에 불과한 소수교회들에게만 엄격하게 적용될 것이므로 형평에는 어긋나게 되니 가히 비민주적 악법으로 여겨질 수 있다.
더욱이, 한국 개신교회의 제반 문제들을 `혈연세습` 하나로 집약하여 희생양을 삼고자 하였다면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자 하는 우를 범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드러난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네비우스 정책`을 따르는 개교회주의와 장기책임목회로 인한 목회자의 지나친 주권의식으로 인해 비롯된 폐해에서 연유된 것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담임자리 이동을 위한 개인과 당파의 이기주의 그리고 더 발전한 교파주의와 명예를 위한 감투싸움과 교단난립으로 이어졌으며, 자파의 숫자를 늘리고저 신학교 난립으로 목회자 수급불균형을 초래, 그에 따른 매직현상과 배금주의, 기복신앙을 이용한 종교사기행각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총체적 문제로 연결고리화 된 형국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책임을 혈연세습교회에 모조리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며, 이는 기존세습을 완료하였거나 진행중인 교회들을 싸잡아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이며, 혹시 모를 향후 세습을 준비하는 일부교회만을 겨냥하는 입법이외에 다름이 아니라 여겨진다.
과거 천주교회에서는 사제들에게 결혼을 금지하여 현재까지도 사제독신규정을 시행하고 있는데, 아마도 지금 한국감리교회가 소위 혈연간 교회세습을 금지하는 법안을 상정하였다는 것과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천주교회는 역사적으로 과거 8살난 추기경과 12세된 추기경을 임명한 일도 있었으니 어떤 이는 독살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사실은 교황선출과 교권세습의 폐해였던 것이다.
천주교회는 결국, 성경에도 없는 독신법으로 사제들에게 결혼을 가로막고 있다. 그런데 천주교가 6세기에 옹립한 제1대 교황인 베드로 사도 역시 생전에 부인을 대동하셨음을 왜 모르는가 말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간악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하였다는 것은 만시지탄이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을 이루지 못하도록 성직자 독신규정을 강제한 결과 천주교는 고아원을 건립해야만 했다. 또 유명한 승정원장은 물론 여러 교황들중에는 부인과 사생아를 대외에 밝히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 천주교회의 쇠퇴는 성적타락 방지책은 물론 사제의 결혼허용으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전망하게 되는 이유는 사제의 결혼금지법이 잘못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스정교회 경우, 교회수장에게만 독신규정이 적용될 뿐 일반사제들에게는 결혼을 허용하고 있다. 성공회에서는 모든 성직자들의 결혼이 자유이다. 성직자의 결혼은 마치 타락하여 죄를 짓는 것으로 여기기보다 오히려 교인의 가정생활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며,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가정을 누리는 것은 행복임을 다같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들은 교회의 목회세습만 법으로 막으면 당장 해결되고 사회에서 당연히 환영받게 되리라는 안일한 생각은 결코 성경적이거나 합리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교회의 신앙은 핍박속에서 더 큰 은혜를 간구하게 되며 환란중에 그 신앙이 빛나게 되는데 오늘날 개신교회가 세상에서 비난을 받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 양약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한다.
세상사람들의 비난이란, 저들이 고난당할 때 교회들이 개인과 자파의 이기주의에 빠져 세상을 돌아보지 않은 이유이며, 피안(彼岸)을 지나치게 사모하여 차안(此岸)에서의 책무를 소홀히 한 연고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끝없이 교파와 교단의 분열로 이어지더니, 저질의 신학교의 난립과 목사안수 남발로 인해 성직매매의 폐단이 발생한 것이다. 교인경쟁이 도를 넘어서게 되었으니 `신비주의`와 `배금주의`에 빠져서 사이비신앙 조차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할 것이다.
이제라도 교회들이 오늘의 선교사명을 각성한다면 교회들이 지역사회와 국가를 위해 대민봉사부터 실천해야 옳다고 믿는다. 아울러 이를 숨기려 하기보다 당당하게 홍보함으로써, 교회의 존재이유와 가치됨을 지역과 세상에서 당당하게 보여줌으로써, 민심이반을 극복해야 할 때라 여기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 교회세습은 굳이 법으로까지 막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일부에서만 일어나는 한시적 현상에 불과하며, 무엇보다도 목회세습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라 확신하는 까닭이다.
교회세습이 가능한 교회는 특출한 사명감으로 산간오지에서 생활비를 못받더라도 선대가 못다 이룬 선교의 완성을 위해 헌신하는 이도 있을 것이나, 자립형 도시교회들의 경우라면 목회자가 교회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있음을 교회로부터 먼저 인정받는 특출한 `목회영웅`에게만 해당한다고 확신하는 까닭에서다. 뿐만아니라 혈연 역시 교회로부터 신뢰받을만한 목회자인지 그 자질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필요충분조건은 만족되어져야 한다.
뿐만아니라 교회와 목회자간에 무한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져야만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에서 아들이건 사위건 형제이건 세습은 가능해 진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세습이란 목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이에게만 주어지는 하늘의 상급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어느 교회건 교회당 의자에 앉아 있는 평신도들을 비하할 수 없을진대, 대개 평신도 지도자들이 후계자를 추대함에 있어서 더욱이 혈연임에도 추대하는 경우라면 이를 법으로까지 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담임자직은 `총뿌리에 나온 권력`이 아니며 교회의 등기문서를 이전하거나 대표이사로 취임하는 재벌세습과는 근본부터 판이하게 다른 까닭이다.
교인중 대다수가 찬동하였다면, 민주사회에서 임의단체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외부에서 시비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꼭 제언하고 싶은 의견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네비우스 정책시행을 시급히 보완하자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교회의 세속화가 촉발되었으니, 이는 네비우스 정책의 공로가 큰 반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오늘의 과제이다. 즉 자립이 가능한 교회들은 주저말고 미자립교회와 그 목회자를 거두어 들일 것을 제안하고 싶다. 어려운 시골교회들과 그 목회자를 긴급히 지원함으로써 사기를 북돋을 것이며, 그 자녀들의 교육도 마땅히 지원해야 할 것이다.
교단이 할수만 있다면 목회자들의 기초연봉제를 도입하여, 미자립교회를 형식적으로 대충 돕다가 중단하지 말고 자립하기까지 인적 물적지원을 해 주자는 제언이다. 만일 영구미자립을 극복할 상황이 아니지만 목회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자립형교회에서 은퇴하신 원로목사님을 파송하여 종신토록 제도화 한다면,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로는, 담임자의 장기목회를 허용하되, `임기제` 혹은 `중간평가제` 도입을 제안한다.
하바드대학교 찰스 엘리어트 총장 재임 40년간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예일대학교 역시 금번에 은퇴하신 레빈 총장이 26년간 재임하셨으니, 기업이든 대학이든, 유능한 이가 장기간 재임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결과를 세계에서 증명해 보인 사례들은 적지 않다.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한 이유로는 네비우스 정책의 결과말고도 유능한 목회자의 장기간 책임목회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구든지 자립하는 교회에서 담임직을 은퇴시까지 보장하는 것은 시기와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임기제 혹은 중간평가제를 도입하여 그만큼 책임목회도 가능하고 연임거부도 가능하다면 다소 불만도 달랠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교회의 사회봉사를 이제는 감추지 말고 당당하게 사회에 공개, 홍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천주교회는 `꽃동네소개`를 중심으로 집중홍보함으로써, 마치 사회봉사를 많이 하는 양 홍보되고 있다. 개신교회 역시 학교와 고아원사업 등 천주교회에 비해 사회봉사를 결코 등한시 한 것이 아님에도 많이 가려지고 있다.숨은 봉사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여 개인적 윤리를 실천함이 아름다우나 교단은 이를 달리 적용할 필요를 느낀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 눈에는 자주 눈에 뜨이는 개신교회의 난립상황에 대하여 아마도 교회는 목사의 생활비나 만들어 바치는 단체라 여기고, 사회에는 해를 끼치는 사이비종교로 비쳐질 수도 있으니, 소속교단은 천주교회처럼 교단의 사회봉사사역을 정기적으로 세간에 알려서 교회가 이 시대에 기생충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님을 당당하게 홍보하자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목회자의 납세문제도 감리회가 속한 시일내 매듭지어야 할 과제로 여겨진다. 아울러 자립교회들은 경상비의 최소 00 %이상을 사회봉사비로 책정하도록 의무화한다면 사회의 민심이반은 즉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금번 입법총회는 한국교회의 총체적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제시가 가능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기도한다.
송성모목사/스탬포드한인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이는 마치 한국개신교회의 모든 문제점이 세습방지법안 하나로 다 해결될 수 있다는 듯, 세간에 알려진 인물들의 입조차 빌려가면서 연일 십자포화가 줄을 잇는다. 다소 지나치다 여겨질 만큼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여겨지는 것은 이미 탈무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토론부재의 상황을 맞는가 싶다.
무엇보다도 어느 정도는 세습이 이미 완료된 상황임을 알면서도, `사후약방문`격에 불과한 세습방지법안을 상정하는 감리교회의 입법취지는 무엇일까? 더욱이 기존세습을 완료한 교회들과 사전합의도 없이 입법을 추진하면서도, 소급적용도 없는 입법안이라면 무언가 바로잡겠다는 목표라기보다 단지 선언적 의미밖에 달리 해석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 법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야말로 전체 교회 수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에게만 해당하는 금법인데, 이 법안은 전체교회에는 해당되지도 않는 지극히 몇%에 불과한 소수교회들에게만 엄격하게 적용될 것이므로 형평에는 어긋나게 되니 가히 비민주적 악법으로 여겨질 수 있다.
더욱이, 한국 개신교회의 제반 문제들을 `혈연세습` 하나로 집약하여 희생양을 삼고자 하였다면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자 하는 우를 범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의 드러난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네비우스 정책`을 따르는 개교회주의와 장기책임목회로 인한 목회자의 지나친 주권의식으로 인해 비롯된 폐해에서 연유된 것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담임자리 이동을 위한 개인과 당파의 이기주의 그리고 더 발전한 교파주의와 명예를 위한 감투싸움과 교단난립으로 이어졌으며, 자파의 숫자를 늘리고저 신학교 난립으로 목회자 수급불균형을 초래, 그에 따른 매직현상과 배금주의, 기복신앙을 이용한 종교사기행각들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총체적 문제로 연결고리화 된 형국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책임을 혈연세습교회에 모조리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며, 이는 기존세습을 완료하였거나 진행중인 교회들을 싸잡아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이며, 혹시 모를 향후 세습을 준비하는 일부교회만을 겨냥하는 입법이외에 다름이 아니라 여겨진다.
과거 천주교회에서는 사제들에게 결혼을 금지하여 현재까지도 사제독신규정을 시행하고 있는데, 아마도 지금 한국감리교회가 소위 혈연간 교회세습을 금지하는 법안을 상정하였다는 것과 일맥상통 한다고 볼 수 있다. 천주교회는 역사적으로 과거 8살난 추기경과 12세된 추기경을 임명한 일도 있었으니 어떤 이는 독살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사실은 교황선출과 교권세습의 폐해였던 것이다.
천주교회는 결국, 성경에도 없는 독신법으로 사제들에게 결혼을 가로막고 있다. 그런데 천주교가 6세기에 옹립한 제1대 교황인 베드로 사도 역시 생전에 부인을 대동하셨음을 왜 모르는가 말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간악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하였다는 것은 만시지탄이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을 이루지 못하도록 성직자 독신규정을 강제한 결과 천주교는 고아원을 건립해야만 했다. 또 유명한 승정원장은 물론 여러 교황들중에는 부인과 사생아를 대외에 밝히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 천주교회의 쇠퇴는 성적타락 방지책은 물론 사제의 결혼허용으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전망하게 되는 이유는 사제의 결혼금지법이 잘못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스정교회 경우, 교회수장에게만 독신규정이 적용될 뿐 일반사제들에게는 결혼을 허용하고 있다. 성공회에서는 모든 성직자들의 결혼이 자유이다. 성직자의 결혼은 마치 타락하여 죄를 짓는 것으로 여기기보다 오히려 교인의 가정생활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며,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가정을 누리는 것은 행복임을 다같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들은 교회의 목회세습만 법으로 막으면 당장 해결되고 사회에서 당연히 환영받게 되리라는 안일한 생각은 결코 성경적이거나 합리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교회의 신앙은 핍박속에서 더 큰 은혜를 간구하게 되며 환란중에 그 신앙이 빛나게 되는데 오늘날 개신교회가 세상에서 비난을 받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면 양약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한다.
세상사람들의 비난이란, 저들이 고난당할 때 교회들이 개인과 자파의 이기주의에 빠져 세상을 돌아보지 않은 이유이며, 피안(彼岸)을 지나치게 사모하여 차안(此岸)에서의 책무를 소홀히 한 연고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끝없이 교파와 교단의 분열로 이어지더니, 저질의 신학교의 난립과 목사안수 남발로 인해 성직매매의 폐단이 발생한 것이다. 교인경쟁이 도를 넘어서게 되었으니 `신비주의`와 `배금주의`에 빠져서 사이비신앙 조차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할 것이다.
이제라도 교회들이 오늘의 선교사명을 각성한다면 교회들이 지역사회와 국가를 위해 대민봉사부터 실천해야 옳다고 믿는다. 아울러 이를 숨기려 하기보다 당당하게 홍보함으로써, 교회의 존재이유와 가치됨을 지역과 세상에서 당당하게 보여줌으로써, 민심이반을 극복해야 할 때라 여기는 것이다.
필자는 오늘날 교회세습은 굳이 법으로까지 막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일부에서만 일어나는 한시적 현상에 불과하며, 무엇보다도 목회세습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라 확신하는 까닭이다.
교회세습이 가능한 교회는 특출한 사명감으로 산간오지에서 생활비를 못받더라도 선대가 못다 이룬 선교의 완성을 위해 헌신하는 이도 있을 것이나, 자립형 도시교회들의 경우라면 목회자가 교회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있음을 교회로부터 먼저 인정받는 특출한 `목회영웅`에게만 해당한다고 확신하는 까닭에서다. 뿐만아니라 혈연 역시 교회로부터 신뢰받을만한 목회자인지 그 자질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필요충분조건은 만족되어져야 한다.
뿐만아니라 교회와 목회자간에 무한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어져야만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에서 아들이건 사위건 형제이건 세습은 가능해 진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세습이란 목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이에게만 주어지는 하늘의 상급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어느 교회건 교회당 의자에 앉아 있는 평신도들을 비하할 수 없을진대, 대개 평신도 지도자들이 후계자를 추대함에 있어서 더욱이 혈연임에도 추대하는 경우라면 이를 법으로까지 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담임자직은 `총뿌리에 나온 권력`이 아니며 교회의 등기문서를 이전하거나 대표이사로 취임하는 재벌세습과는 근본부터 판이하게 다른 까닭이다.
교인중 대다수가 찬동하였다면, 민주사회에서 임의단체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외부에서 시비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곤란한 것이다.
한국교회에 꼭 제언하고 싶은 의견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네비우스 정책시행을 시급히 보완하자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교회의 세속화가 촉발되었으니, 이는 네비우스 정책의 공로가 큰 반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오늘의 과제이다. 즉 자립이 가능한 교회들은 주저말고 미자립교회와 그 목회자를 거두어 들일 것을 제안하고 싶다. 어려운 시골교회들과 그 목회자를 긴급히 지원함으로써 사기를 북돋을 것이며, 그 자녀들의 교육도 마땅히 지원해야 할 것이다.
교단이 할수만 있다면 목회자들의 기초연봉제를 도입하여, 미자립교회를 형식적으로 대충 돕다가 중단하지 말고 자립하기까지 인적 물적지원을 해 주자는 제언이다. 만일 영구미자립을 극복할 상황이 아니지만 목회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면, 자립형교회에서 은퇴하신 원로목사님을 파송하여 종신토록 제도화 한다면,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로는, 담임자의 장기목회를 허용하되, `임기제` 혹은 `중간평가제` 도입을 제안한다.
하바드대학교 찰스 엘리어트 총장 재임 40년간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예일대학교 역시 금번에 은퇴하신 레빈 총장이 26년간 재임하셨으니, 기업이든 대학이든, 유능한 이가 장기간 재임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결과를 세계에서 증명해 보인 사례들은 적지 않다.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한 이유로는 네비우스 정책의 결과말고도 유능한 목회자의 장기간 책임목회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구든지 자립하는 교회에서 담임직을 은퇴시까지 보장하는 것은 시기와 질투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임기제 혹은 중간평가제를 도입하여 그만큼 책임목회도 가능하고 연임거부도 가능하다면 다소 불만도 달랠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교회의 사회봉사를 이제는 감추지 말고 당당하게 사회에 공개, 홍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천주교회는 `꽃동네소개`를 중심으로 집중홍보함으로써, 마치 사회봉사를 많이 하는 양 홍보되고 있다. 개신교회 역시 학교와 고아원사업 등 천주교회에 비해 사회봉사를 결코 등한시 한 것이 아님에도 많이 가려지고 있다.숨은 봉사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여 개인적 윤리를 실천함이 아름다우나 교단은 이를 달리 적용할 필요를 느낀다는 것이다.
세상사람들 눈에는 자주 눈에 뜨이는 개신교회의 난립상황에 대하여 아마도 교회는 목사의 생활비나 만들어 바치는 단체라 여기고, 사회에는 해를 끼치는 사이비종교로 비쳐질 수도 있으니, 소속교단은 천주교회처럼 교단의 사회봉사사역을 정기적으로 세간에 알려서 교회가 이 시대에 기생충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님을 당당하게 홍보하자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목회자의 납세문제도 감리회가 속한 시일내 매듭지어야 할 과제로 여겨진다. 아울러 자립교회들은 경상비의 최소 00 %이상을 사회봉사비로 책정하도록 의무화한다면 사회의 민심이반은 즉시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금번 입법총회는 한국교회의 총체적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제시가 가능한 토론의 장이 되기를 기도한다.
송성모목사/스탬포드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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