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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지향하는 삶의 방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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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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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 성경 계시가 근본적인 모든 문제에 대해 구체적 설명을 다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이고 포괄적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인간과 천지만물의 존재와 그 관계성에 대한 성경계시를 믿기 때문에 그 토대에서 앎의 영역을 확대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없어도 하나님과 그분에 대한 믿음의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알 수 없음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회의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 그리스도인은 알 수 없음에 대하여 성경의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계시를 벗어나지 않는 방법과 방향에서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철학자들에게는 하나님 존재와 그분에 대한 믿음의 전제가 없고 전제가 있다고 해도 성경과는 다른 전제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를 알아보려고 하는 방법과 방향성에서 혼란과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경우는 근본문제에 대한 철학자들의 설명이 기독교의 설명과 너무 비슷하여 상당할 정도로 혼란을 일으키기까지 합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만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생물학적 생명과 영적 생명에 대해 다 말하고 있고 그 둘의 관계성은 인간 육체와 영혼의 관계성만큼이나 신비로운 것입니다. 특히 헬라 철학에서 인간의 육체를 영혼에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기독교에 영향을 미처 육체와 영혼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우리의 이해를 위해 따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 둘은 신비한 연합을 통한 하나이지 독립된 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단순히 생물학적 죽음만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도 그러한 토대에서 설명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성도가 믿음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소망 없는 불신자와는 그 태도가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인간은 불완전 하고 연약하여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구원과 내세와 하나님 나라를 믿지만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죽음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도 내세도 믿지 않지만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이들도 있고 또한 이방종교나 철학적 내세관에 대한 확신으로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그의 유언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제자들과 친구들을 향하여 ‘너희 자신들을 잘 돌보라’는 것입니다. 파이돈에 보면 소크라테스의 유언을 ‘Swan song’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조의 노래라는 뜻인데, 백조가 죽을 때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고 하여 그렇게 부릅니다. 시인이나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 또는 최후의 작품을 그렇게 부릅니다. 죽어가는 백조가 노래를 한 건지 통곡을 한 건지 모르지만 인간은 죽어가는 백조의 소리를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백조는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죽어가면서 절규를 했을 수도 있는데..., 아무튼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너희 자신을 잘 돌보라고 했을 때 자신이라는 것은 이성의 역할과 기능을 가리킵니다. 인간 이성의 탁월성, 유능성, 기량, 뛰어남을 최대한 잘 활용하여 살라는 의미입니다. 이성을 최대한 잘 활용하여 살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그렇게 유언을 하고 난 후에 사형 집행관이 사약을 가져옵니다. 집행관이 소크라테스에게 사약을 마시면 어떻게 될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위쪽으로 마비가 와서 심장까지 가면 죽게 된다고 설명을 하고 그 설명대로 죽게 됩니다. 심장에 마비가 오기 직전에 흰 천으로 몸을 덮었습니다. 그 때 소크라테스가 천을 벗기며 죽마고우 크리톤에게 ‘이보게, 크리톤, 우리는 아세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다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이 소크라테스가 닭 한 마리를 외상으로 먹고 갚지 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세클레피오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의술의 신입니다. 인간은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일생을 사는데 이제 나는 그 모든 질병으로부터 해방되었으니 의술의 신에게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게 ‘자네가 나를 대신하여 아세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로 제사를 드려주게’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부탁을 하고 참으로 만족스러워 하며 기쁘게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만족스럽고 기쁘게 죽을 수 있었던 이유를 두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이 땅에서의 삶보다 저 세상에서의 삶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둘째는 소크라테스가 이 땅에서 산 삶이란 죽음에의 연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에의 연습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멜레테 타나투(μελέτη θανατου)라고 합니다. 즉 죽음을 수행하고 실천하는 것이 멜레테 타나투 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죽음에의 연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단순한 철학자이기보다 그 시대에 있어서 철학적 선지자였다고 후대 학자들이 평가합니다. 멜레테는 영어로 care, attention, practice, exercise 등의 뜻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멜레테 라는 말을 아마도 연습, 수련, 수행 등의 의미로 사용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을 연습하고 수련하고 수행하는 것이 현실에서의 삶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실천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철학적 믿음의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연습하고 훈련하고 수행하는 것이란 곧 삶을 연습하고 수련하고 수행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삶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그것은 죽음에의 연습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실천하는 것이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후대에 와서는 철학이 학문으로 자리 잡았지만 고대의 철학은 학문이라기보다 삶의 길이고 삶의 양식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복음을 이해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복음을 몰랐던 그였기에 철학적으로 인간을 이해하였고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비슷할 뿐이지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죽음에 대해서도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르게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영혼이 몸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해방이란 단순한 벗어남이 아니라 몸의 오염으로부터 정화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볼 때 몸을 부수적인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생각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성화와 너무 흡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탁월함이란 지혜, 절제, 용기, 정의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몸과 혼으로 된 존재이고, 혼은 영혼을 가리키는데, 영혼을 로고스와 아르테로 설명합니다. 혼이란 헬라어로 푸케(ψυχη)인데 생명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영혼을 말합니다. 로고스(λογος)의 본 뜻은 ‘말’입니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설명이 복잡하지만 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르테(αρετη)는 탁월함입니다. 탁월함이란 로고스 즉 이성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지혜와 절제와 용기와 정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친구들에게 로고스를 통해 네 가지 덕인 지혜 절제 용기 정의를 실현하며 살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철학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혼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초기 기독교 변증가인 순교자 저스틴은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철인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으로 살았다면 모두 다 기독교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알렉산드리아 클레멘스도 저스틴의 주장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는 교부 오리겐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로고스를 통해 아르테의 실천을 강조한 것은 기독교의 교훈과 비슷하고, 죽음을 영혼이 몸의 오염으로부터 해방이라고 보는 것은 기독교 성화의 완성과 비슷하며, 무엇보다 이 땅에서의 삶을 멜레테 타나투(μελέτη θανατου), 즉 죽음에의 연습이라고 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너무 비슷합니다. 그러나 철학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은혜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인간 이성으로 규명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철학 나름의 인간 이성의 합리성을 초월한 방법으로까지 설명을 하지만 결국 그것은 허상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비롯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비록 인간이 아직 미처 깨닫지 못한 모든 것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의 존재의 근본과 목적을 포괄적으로 명정(明正)하셨기 때문에 허상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 오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는 믿음의 전제 위에서 인간의 영혼과 육체와 죽음과 구원과 그 모든 것의 관계성과 합목적성이 하나님의 뜻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하였는데,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 주도적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향하여 사셨는데 이는 이 땅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곧 죽음 지향적었다는 뜻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당연히 죽음 지향적이어야 하고 그러한 맥락에서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죽음을 지향하는 것은 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그 반대편에 인간 욕망을 좇는 삶이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 것이 인간 욕망을 좇아 사는 삶의 전형입니다.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늘어나는 소득으로 더 큰 집을 짓고, 그 안에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채우고, 친구와 지인들을 불러 파티를 하고, 나보다 못한 이들을 무시하고, 자기의 능력과 성취한 것을 자랑하며 사는 것이 자기실현이라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 지향적으로 사셨기에 자기실현이나 자기 성취라는 요소가 일체 없습니다. 죽음 지향적 삶은 타자 지향적 특징이 있습니다. 타자 지향적 삶은 무소유나, 무소유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능한 한 물질을 덜 가지고, 명예와 인기와 지위를 덜 탐내는 덕성을 어느 정도라도 나타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은 대게 욕망 지향적 특징을 갖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불신자들 중에도 욕망을 절제하는 덕성을 나타내는 이들이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것을 더 차지하기 위해 아귀처럼 싸우고 다투고 지나치게 경쟁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런 욕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처럼 일상을 죽음 지향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죽음 지향적으로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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