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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개회설교 "우리의 싸움, 개혁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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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8-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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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뉴욕동노회 63회 정기노회가 10월 7일(화) 오전 10시 퀸즈장로교회(장영춘 목사)에서 열렸다. 다음은 노회장 황상하 목사가 한 개회설교인 "우리의 싸움, 개혁신앙(고후 10:3-6절)"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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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후 10:3-6절 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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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창조명령으로 인간에게 책임을 부과하셨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책임을 부과하심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까지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 책임을 수행할 그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타락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책임을 감당하는 일에 있어서 완전히 무능하게 하였습니다. 이 절망적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구속입니다. 구속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인간의 노력은 티끌만큼도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창조 명령에 따라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아직은 연약한 죄인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악한 사단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습관과 악한 욕망과 그릇된 사상과 잘못된 이론과 세상적 가치관을 고쳐가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개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개혁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누구에게나 어느 시대에서나 불가피한 것입니다. 개혁은 칼빈이나 어떤 신학자가 만들어낸 개념이 아닙니다. 타락은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함을 받은 백성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복음과 관련된 용어들을 살펴보면 영어로 re자가 들어가는 것이 많습니다. renewal(갱신), regeneration(거듭남), redemption(구속), reconciliation(화해)구원은 salvation이라고 해서 re자가 안 들어간 것 같지만 그 의미로 보면 re자가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헬라어로 구원을 소테리아 σωτηρία라고 하는데 그 뜻은 치료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구속자는 치료자라는 뜻의 σωτηρ입니다. 치료하다 라는 말이 전제하는 것은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대표적인 세 가지 전문직을 목사 의사 변호사라고 하는데 이는 모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고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개혁신앙의 눈을 가지고보면 이런 상황을 보고서도 세상이 어떤가를 짐작할 수 있고 성경적 세계관을 더욱 분명하게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제가 알기로는 성경에 딱 한 번 나옵니다. 히 9:10절에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딱 한 번 나오는 개혁이라는 의미가 너무나도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개혁이라는 용어로 διόρθωσις를 여기서 사용한 것은 옛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장막에서 지켰던 규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 자체가 διόρθωσις, 즉 개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renewal(갱신), regeneration(거듭남), redemption(구속), reconciliation(화해), salvation 등이 모두 복음의 이 같은 성격을 반영하는 용어들입니다. 복음 자체가 이전의 잘못된 것을 고치고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주님도 최초로 복음을 선포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의 상태, 즉 지금의 상태는 잘못되었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잘못되고 불완전하다면 그것은 당연히 고쳐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또 잘못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이 바로 개혁의 대상인 것입니다. 병중에 가장 고치기 어려운 병이 의처증이나 의부증이라고 합니다. 그 병이 고치기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이 아무리 사실과 진실을 말해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믿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치지를 못합니다. 고치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고칩니다. 그래서 고질병입니다. 우리의 영적 병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교만한 것을 알고, 무식한 것을 알면 그것은 고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만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다고 확신을 하면 못 고칩니다. 무식하면서도 유식한 것으로 확신하면 못 고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바울이 복음의 원리를 따라 목회적 대응을 천명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은 바울을 우유부단하고 순전히 이기적인 사람으로 폄하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비난이기 보다 사도직에 대한 부정이고 복음을 왜곡하는 것임을 직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론으로 간파하고 마치 선전포고를 하는 것처럼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연약한 인간임을 전제하였습니다. 3절에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ἐν σαρκὶ)라는 말은 말 그대로 우리도 사람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합니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산다는 굳은 의지와 불굴의 신앙자세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갈 2:20절 말씀이 이러한 바울의 신앙의 자세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그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인간 바울은 죽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점령당하였습니다. 이제는 그가 자기의 임의대로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언행심사를 통해 그리스도만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여기에 겸손함이 있고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지조가 있습니다. 당시 바울을 대적했던 적들은 많았습니다.

첫째로 스스로 자천하는 침입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인데 고린도 교회에 침입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침입자들이 있습니다. 예수께 속하지 않는 자들은 다 침입자들입니다. 믿음도 없으면서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입니다. 둘째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멸시하고 자신들을 가리켜 “지극히 큰 사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고후 11:5절에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고후 11:13절에 의하면 그들은 거짓 사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셋째는 기독교를 유대교화 하려는 자들입니다. 넷째는 자유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회와 종교 생활에 있어서 불신자들과 무분별한 혼합 관계를 조장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이 고후 6:13-18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다섯째 영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성경적 지식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지식을 찬양하였습니다. 또한 육체적 지혜를 자랑하였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바울은 자신이 비록 말에는 능하지 못하지만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히 말했습니다.고후 11:6절에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여섯째는 돈을 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순전히 상업적 탐욕을 추구할 수단으로 여기고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순회하는 선교사들처럼 돌아다녔기 때문에 교회들이 쉽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이 이런 자들에 대한 분별력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는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일한 것을 말했고 또한 자신이 교우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사실 정통 유대교를 전한 것도 아니고 헬라화 된 흩어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혼합종교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들 이단들은 율법과 철학과 지식과 경건과 신비로운 현상들을 이용한 혼합주의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혼합주의가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이들을 가리켜 “견고한 진”이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복음과 진리에 도전하는 세력이 미미한 세력이 아니라 견고한 진이라고 하였습니다.

4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바울이 이 구절을 기록할 때 70인 역의 잠언 21:22과 10:29절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잠언 21:22 “지혜로운 자는 용사의 성에 올라가서 그 성이 의지하는 방벽을 허느니라.” 잠언 10:29 “여호와께 대한 두려움이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이같이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이론은 견고합니다. 교활합니다.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힘이 있습니다. 경제적 힘이 있고, 학문적 깊이와 탁월함이 있고, 소위 세련되고, 인기가 있고,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이런 적들과 싸워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육체적 무기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적 지혜나 학문이나 철학이나 사상이나 이론이나 조직이나 물질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적들이 우리를 대적하고 교회를 어지럽힐 때에 그런 힘과 지혜에 기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런 무기는 사탄의 요세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합니다. 적이 사용하는 방법이나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사단의 술수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적의 강력한 힘과 술수에 매료되어 적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교회에다가 적기를 꽂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만이 악한 세력인 사단의 진을 파할 수가 있습니다. 엡 6:10-17절에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이것들은 바울이 사단의 세력을 맞아 싸운 영적 무기들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의지와 지성의 영역에, 마음과 정신에 어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인간의 지혜와 철학을 자랑하는 교만한 헬라인들의 영향력이 지배적인 도시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를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너무나 유치한 것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롱하고 비난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자기들의 지혜와 철학으로 교회를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불신의 지성적 동기들을 신랄하게 분석하여 공격하였습니다. 나나님께 대하여 반항적이고, 진리에 대항하는 교묘하고 교만한 이론을 여지없이 폭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견고한 적의 진지가 불신자나 이단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도 거기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바울이 적들을 향하여 그렇게 강력히 대처했지만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싸워서 정복해야 할 대상에 언제나 그 자신을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울 서신에는 바울의 그러한 영적 싸움의 흔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론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이론입니다. 소위 무신론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강력한 적은 무신론입니다. 무신론에는 두 종류의 무신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론적 무신론이고 다른 하나는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면 어떤 악도 저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신론자였던 볼테르도 임마누엘 칸트도 악을 억제하고 선을 장려하기 위해 하나님을 있다고 상정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론적 무신론자는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론적 무신론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적 무신론자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바울도 그 자신 안에 있는 실천적 무신론과 싸웠습니다. 진리를 거스르고 성령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실천적 무신론이 내 안에 있는 사단의 진입니다. 쳐 부셔야 할 사단의 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열심을 내고 분주하게 뛰어 다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적을 이롭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 모두 다 신자들이고 주의 종들입니다. 사역자들입니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점들은 늘 점검하며 살펴야 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실천적 무신론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내야 합니다. 이 싸움에 있어서 결정적 관건은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도우심은 말씀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께서 언제나 집적 앉아라 서라 가라 먹으라 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읽고 배우고 깨달아 선택하고 판단하고 행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을 의지하면서 우리가 표방하는 개혁신앙의 틀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표방하는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우리는 모두 개혁주의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대로 지키며 실천하기로 서약하고 이 목사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들 모두가 개혁주의 신학을 사랑하고 실천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표방하고 고백한 그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고 귀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교단적으로나 노회적으로나 개 교회가 개혁신학의 틀이 잡혀 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틀이란 어떤 물건을 만드는 데 ‘골’이나 ‘판’이 되는 물건을 말합니다. 물건을 일일이 손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틀이 있으면 물건을 쉽게 만들고 또한 일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바느질을 손으로 하다가 재봉틀이 생겨서 얼마나 쉬워졌는지 모릅니다. 재봉틀은 사실 기계인데 아마도 그것이 처음 나왔을 때는 재봉틀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이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틀이란 말은 그런 의미도 있지만 물건을 받치거나 버티거나 팽팽히 켕기게 하기 위해 테두리만으로 된 물건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한 일정한 격식이나 형식을 틀이라고도 합니다. “틀에 박힌 듯이” 라고 하면 융통성 없이 격식에 기계적으로 얽매이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틀이 잡혔다”고 하면 격에 어울리게 갖추어진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사상이나 철학에 있어서 틀이라고 하면 핵심 되는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보호하고 또한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전체적인 뼈대가 되는 체계적 지식을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할 때 신앙이나 교리에도 신학에도 틀이 필요합니다. 틀이 없으면 전체가 조화 있는 체계를 이룰 수 없고 또한 단편적인 진리가 전체적인 진리와 모순되는 쪽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나 이단에 넘어가는 것은 바로 신앙의 틀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런 현상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단편적으로 강조하는 것에서는 전혀 문제를 발견할 수 없으나 그 단편이 전체적인 체계에서 볼 때는 모순을 일으켜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를 강조하는 것, 선교를 강조하는 것, 전도를 강조하는 것, 연합을 강조하는 것에서는 문제가 없으나 그런 단편적인 강조가 전체적인 틀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혁 신앙은 지루한 싸움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해야 하는 싸움입니다. 그러면서도 눈에 보이는 열매가 언제나 신통하지 않은 그런 싸움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보람도 못 느낍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 효과가 별로 없기 때문에 힘이 나지 않습니다. 상업적인 용어를 빌리면 개혁신앙에는 현실적 수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복음을 듣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극명한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빛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전도자는 복음의 수요를 창출해야 합니다. 복음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꼭 복음이 필요함을 일깨워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복음의 수요를 창출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실 때 성령께서 복음의 수요를 창출하시기 때문에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수요에 부응하는 메시지를 전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절대로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잣대로 보면 모두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모든 인간은 자기에게 해로운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인간은 마치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치 유치원 아이들에게 말하듯 교훈합니다. 고전 10:23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개혁주의는 인간의 전적 무능을 가르칩니다.인간의 전적 무능은 인간이 교만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교만한 것이 하나님께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교만하다고 자존심 상할 일도 없으실 텐데 교만한 자를 그렇게도 싫어하십니다.

제 생각에 그 이유는 이런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데 교만하다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태도이거든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도 하나님께야 별 손해될 것이 없으시겠지만 그러면 그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말 것을 당부하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약 4: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벧전 5:5절에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믿은 지가 오래되어서 그런지 벗어 버릴 구습도 없고 새롭게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엡 4:22절의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한 것은 당시 에베소 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날마다 개혁신앙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롬 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도 개혁신앙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사명을 따라 살았다는 자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곱만큼도 스스로는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선한 열매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고전 15: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아침에 망하고 말 그런 자들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이지만 성령을 의지하여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값없이 구속을 받았는데 우리가 받은 구속은 나 개인 영혼 구원에 국한 되지 않고 사회 문화와 우주까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신학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복음주의는 이 문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복음주의는 주로 개인 영혼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를 만든 신학은 전형적인 복음주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개인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기울인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이 세상에 임한 천국보다는 죽어서 들어갈 하늘나라만 바라봅니다. 개혁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543장 2절 옛날 가사를 보면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나 어이 여기 살리까?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를 이 세상보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개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는데, 믿는 사람도 똑같습니다. 교인들과 교회가 바르게 사는 문제라든가 세상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부자 되고 건강하고 복 받는 것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고 성경을 자기들의 그런 이기심을 정당화 시키는 쪽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물질과 하나님을 오묘하게 조화시켜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불신자들이 교회를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한국교회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아무라도 걷어찰 수 있는 주인 없는 동네 개처럼 되었습니다. 책이며, 신문이며, 인터넷에서 그야말로 아무라도 교회를 욕하고 비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교회를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사회학 교수라든가, 이름 있는 순수 시인라든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 정도는 되어야 교회를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장 상인들은 물론 청소년들, 심지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교회를 비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는 우리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압니다. 교회와 지도자는 자각 증세가 없는 영적 병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뿐인 신앙 가지고는 안 되고 개혁신앙이 필요합니다. 자본주의가 부흥할 수 있었던 요인은 incentive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부흥이 동일하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성공과 형통과 복이 incentive로 제시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을 붙잡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처한 상황이 영적 전투장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성공과 형통을 위한 전투일 뿐입니다. 진리를 위한 싸움은 피하고 이 시대의 병든 시대정신을 치료할 능력이 없습니다. 좀 살만해 졌기 때문에 교회는 진정한 능력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을 방문하니까 교황이 이제는 교회가 금도 풍부하고 은도 풍부하다며 자랑을 하더랍니다. 그 때 아퀴나스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교황 각하, 이제 교회는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은 할 수 없게 되었군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풍족하게 되어서 영적 가난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난하던 시절에는 밥 한 그릇 배불리 먹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용할 양식을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나무 때어 밥을 지을 때는 연탄 때는 집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연탄 땔 형편이 되니까 석유곤로 하나 있었으면 싶었습니다. 석유곤로 생기니까 전기밥솥 생각나고, 전기밥솥 생기니까 가스레인지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참으로 많이 발전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많은 것을 누립니다. 참 많은 은혜와 특권을 누립니다. 그런데 점점 더 좋은 것을 추구하고 얻어 누리게 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는데 길들여졌습니다. 백 개를 받았는데 한 개가 부족하여 한 없이 불행을 느낍니다.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불신앙인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개혁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유치하고,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이중적이고, 얼마나 냉소적이 되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경제적 위기 상황을 풀어갈 개혁신앙의 지혜가 우리 개인적인 삶에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성경적 가치관으로 기독교 문화를 만들어 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를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개선하기 위한 구체적 대안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교회의 가치를 배우고 가르치고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개선해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환경문제와 건강 문제와 자녀의 문제와 교회 부흥의 담론이 지배적인 이 시대에 그 모든 것이 성경적인지 연구하고 살펴서 지도하고 실천해야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전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문제를 포괄한다는 입장에 서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회개하며 그릇 행한 모든 것과 생각까지 날마다 개혁하며 살도록 힘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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