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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우 목사 “도산 안창호에게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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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7-06-14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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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러싱제일교회(김정호 목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개혁의 역사에서 미래를 찾는다”라는 주제로 3월부터 11월까지 매월 둘째 수요일 연속 세미나를 열고 있다. 3월에는 조영준 목사가 “마틴 루터에게 길을 묻는다”, 4월에는 김중언 목사가 “요한 웨슬리에게 길을 묻는다”, 5월에는 이재준 목사가 “조셉 웨슬리 매튜스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인도했다. 

 

장철우 목사는 6월 14일(수) 저녁 “도산 안창호에게 길을 묻는다(자아 혁신과 민족 개조)”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인도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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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이 되었다. 개혁이 일어나야 했던 동기는 무엇인가. 원인을 찾아봄으로 역사적 교훈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동시에 종교개혁의 여파는 세계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우리나라는 어떤 영향내지 교훈을 찾아낼 수 있는가. 생각해본다.  

 

종교개혁의 중심지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제국이었다. 개혁이 일어나기 전 15세기의 르네상스라고 하는 문예부흥에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세기 초기부터 이탈리아를 중심 한 유럽제국은 새로운 휴머니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교황청 권위에 가려져 있던 인간의 존엄성 내지 개인의 가치가 차츰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미켈란젤로의 베드로성당 천정 벽화의 완성, 조각 피에타,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밀란 성당 전면 벽에 그려진 성만찬 그림, 모나리자 여인상, 라파엘의 부활승천 등 신앙역량의 힘으로 볼 수 있으나 인간예술의 극치를 발견하면서 인본주의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 필사본의 책과 문서들이 인쇄로 수천 권씩 제본되며 성경책을 찍어 널리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1516년에 신약을 그릭어와 라틴어로 출판했는데 서문에 "나는 이 성경이 남녀노소 귀천 없이 모두에게 읽혀지기를 바란다." 라고 기록하였다.

 

1409 - 1506 년 사이에 독일에 대학이 12개 이상이 생겼다. 파리대학의 인본주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의 특색이 될 어거스틴과 신플레토 개념으로 돌아가려는 기미가 강했다. 또한 종교와 정치가 결탁 되어있던 교황청의 쇠퇴와 타락, 제국의 붕괴에서 휴머니즘의 재발견에 큰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의식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새 민족의 세력들이 일어나고 영국의 장미전쟁으로 흰색장미의 상징인 군왕이 승리하여 귀족 영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사실은 기존 종교의 권위, 정치적인 권력의 분산, 인간의 존엄성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가 되면서 종교의 부패, 정치의 부정을 더 이상 맹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약 1세기 간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의 노예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주셨고 바벨론 포로의 절망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대신하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이 나타난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서 중세의 종교 정치가 부패 되었을 때 하나님은 루터를 보내신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약1세기동안 유럽전체가 개혁의 물결로 뒤덮여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제 눈을 돌려 우리나라를 살펴보자. 반만년 역사라고 자랑하지만 조국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였다. 많은 전쟁이 끊임없었고 침략과 약탈 속에 고통을 당하였다. 저는 5000년 역사 속에서 두 번의 큰 변화의 개혁이 있었다고 본다. 먼저는 부족국가에서 통일된 왕권 국가의 수립이다. 바로 1100년을 이어온 고조선이다. 그리고 삼국시대, 고려시대, 이조시대 약3500년을 이어온 왕권시대가 타의에 의해서 이기는 하나 왕권중심의 나라가 1905년 일본의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10년 강제 합방으로 왕권이 완전히 종식된다.

 

1800년 초엽부터 우리 모두의 참상은 어떠하였는가. 신유박해, 홍경래의 난, 대원군 집권(고종 12세때 즉위) 민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병인박해,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5), 독립협회 설립, 대한제국의 설립(1896), 만민공동회 개최, 을사늑약(1905)후 일본통감부 설치, 국권피탈(1910)로 조국은 드디어 일본의 통치를 받는 35년의 치욕스러운 압박을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면이 막혔을 때 하늘의 문을 여시는 것처럼 위를 향한 개혁의 문을 여신다. 그 시작은 갑신정변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 여파로 이루어진 독립협회와 외국인 국내 선교활동과 학교교육을 통한 민주주의 각성이다. 3년 후 독립협회가 해산되어 이승만은 역적으로 감옥으로 안창호는 피신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수천 년 이어오던 왕권국가에서 민주국가를 향해 발 돋음 하는 때 하나님은 민족의 신음과 고통에서 누구를 루터와 같이 보내셨을까.

 

도산 안창호는 1878년 평남 강서군 도룡섬에서 태어났다. 그가 6세 때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8세 때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15세까지 목동생활을 하였다. 12세 때 필대은 이라는 2년 연상의 소년과 더불어 동문수학하며 시국에 대한 눈이 뜨이게 된다. 청일전쟁을 16세 때 경험하면서 나라에 힘이 없으니 조국의 강토가 외국인의 전쟁터로 변한다는 사실을 체험하였다. 그의 뇌리에 왜 우리나라는 국력이 미비한가, 이러한 국력은 어디에서 찾으며 힘을 기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는 그해 서울로 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시작한 구세학당(현 경신)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하며 장로교에 입교하여 친구며 동지인 필대은을 신앙으로 인도한다. 18세 때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전 서당 훈장의 장녀 이혜련(13세)양과 양가의 강제 권유로 약혼을 한다.  도산은 19세 때 독립협회에 가담하고 필대은과 같이 관서지부를 발기한다.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 연사로 도산의 첫 연설이 시작되었다. 그의 열변으로 민중의 자각을 일깨웠다. 두 번째 서울의 연설에서 부패한 7대신을 탄핵한다. 또한 6개조의 정치혁신을 건의한다.  

 

왕권은 위축, 약세로 몰리고 세계열강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조정은 탐관오리로 넘치고, 매관매직이 공공연히 이루어지며 과거시험까지 부정이 만연하며 타락한 상도덕, 부패한 정치, 모든 부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도산이 깨달은 것은 곧 거짓이 만연한데 있다는 것이었다. 나라전체가 온 국민이 헤어 날수 없도록 거짓에 쌓여 있음을 직시하였다. 다음으로 공리공론만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말로만 떠들었지 실제 행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바로 거짓과 공리공론 말만 앞세우는데 기인한 것이다. 

 

도산은 외친다. “거짓, 너는 나라를 망친 나의 원수로구나, 나라의 힘을 다 빼앗기도록, 결국 멸망으로 몰아넣은 나의 그리고 조국의 원수야 결코 나는 거짓과 싸워 이기리라.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다면 참회하라. 통회하라.” 도산이 60세에 순국 하실 때까지 각처에 다니시며 말씀하신 것이 곧 진실을 찾자는 말씀이셨다. 나라를 망친 것은 무능한 왕도 아니고 이완용도 아니다. 곧 나 자신이 진실치 못하여 정의를 잃어버린데 원인이 있는 것이라고 역설하셨다.

 

독립협회 해산 후 도산은 고향에서(강서군 동진면 암화리) 점진학교를 세워 최초 민간의 손으로, 최초 남녀공학을 세웠다. 3년을 가르치며 개간사업에 종사하다가 24세(1902) 밀러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정신학교를 졸업한 아내와 14세 처남과 같이 다음날 미국으로 떠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초등학교에 입학, 일 년 후(1904) 신학 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수업하며 아내도 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하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공립협회를 세워 동포들의 생활을 개선시키며 질서와 도덕을 지키고 상부상조, 친목을 도모하였다. 귀국 후 1907년 신민회를 전덕기 목사와 더불어 창립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단체였다. 1909년에 육당을 총무로 하여 청년학우회를 조직하고 이어 애국운동을 목적으로 한 수양동우회를 창립하였다. 흥사단 정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최초 내무총장에 취임, 후에는 노동총판까지 하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사분오열된 애국자들을 한데 모아 애국 운동 한다는 것은 도산의 힘으로 감당이 어려웠다. 싸우면 화해시키고 갈라지면 동분서주하며 화합 시키며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고군분투하였다. 1912년 청도회담을 마지막으로 사분오열된 애국자를 한데 모으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라의 독립을 하는 데는 이념도 초월하고 파벌도 초월하여 독립하는데 하나가 되자는 열렬한 열변을 토했건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애국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바로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유럽을 거처 미국으로 들어와 샌프란시스코에 들려 이제 부터라도 바른 사람을 기르자, 거짓이 없는 참사람 그리고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을 기르자 라는 취지에서 흥사단을 조직하게 된다.(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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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혁신과 민족개조

 

돌배나무에서 돌배를, 참배나무에서 참배를 따듯이 망국할 백성은 망국을 낳고 독립할 백성은 독립국가를 이룩한다.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나라의 독립은 독립할 수 있는 백성 이라야 독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산은 절감하였다. 그가 상해를 중심으로 러시아 영내 우라지보스톡, 치타, 국내는 물론 미주, 멕시코 등 동포가 있는 곳이면 찾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한 결론이었다.

 

“왜 나라에 힘이 없다고 한탄하는가. 네 자신이 힘을 길러라. 온 국민이 힘을 가질 때 나라의 힘이 생긴다. 왜 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가. 네 자신이 인물 될 노력을 하여 인물이 되라. 먼저 나 한사람이 바른 사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나라가 바로서는 첩경이다.”

 

철저한 기독교인 이었던 도산은 한 개인의 중생의 체험에서 거듭난 성도가 모인 곳이 교회라는 원리를 확신 하였다. 그는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을 사랑이라고 보았다. 뉴욕을 방문한 도산이 장리욱 (콜럼비아대학 재학)을 만났다. 당시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정통보수와 성경의 내용을 중시하는 진보와 불붙는 논쟁이 한참일 때이다. 이에 대한 질문을 받은 도산은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주님을 믿는 사람이 진정 하나님과 네 이웃을 사랑하는가, 주님의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분명히 아셨던 것이다. 또 자신이 확신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답변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좌우명은 "애기 애타" 이었다.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자는 것이다.

 

어떤 날 백영엽 목사가 시무 하는 교회에 도산이 들렸다. 그날 밤 자정이 지나도 불이 켜있어 도산이 누워 계시는 방에 가까이 갔을 때 도산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주여 민족의 죄인을 용서 하소서 내가 무엇을 했다고 이런 대접을 받습니까? 이 종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조국을 불쌍히 여겨 속히 독립을 허락하여 주소서” 라는 기도였다. 춘원 이광수의 말에 의하면 도산은 자신에 대하여 엄격한 규칙을 정하고 몸가짐, 옷차림이 항상 정돈되어 있었고 타인에게 조금도 불편을 주지 않고 언제나 빙그레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좌우명인 "애기 애타" 도산의 모습이다. 자기사랑에 대하여는 엄격하고 타인에 대하여는 너그러운 마음, 도산의 사랑 정신이요 믿음이었다.

 

춘원은 이에 감명을 받고 상해 흥사단이 조직될 때 주요한과 같이 입단하였다.(1930) 그는 도산의 자아혁신과 민족개조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국내 동아일보에 민족개조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다. 이어 "도산 안창호" 책을 펴냈다. 도산은 자신의 전기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제자들이 그의 전기를 썼다. 주요한, 장리욱, 안병욱, 한승인, 이만열, 그 외 수백편의 논문이 있고 박사의 논문이 있다. 모든 것을 요약하면 자아혁신을 위한 건전인격 수련과 민족개조를 위한 신성한 단체훈련이다. 참되자, 일하자, 믿쁘자, 날쌔자, 곧 무실, 역행, 충의, 용감 - 4대 정신 이것이 자아혁신과 민족개조의 중심이다.

 

지금, 조국의 현실은 어떤가? 진실이 무성한가 거짓이 난무하는가? 민족성은 어떠한가? 지방색, 고질적 파벌, 차별, 무례, 배신, 사기,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쓰러질듯 서있는데도 앉아 전화기만 처다 보는 젊은이, 이것이 오늘 조국의 모습이 아닌가. 세계 자살율이 제일 높은 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감옥에 많이 가는 나라이다. 가정의 모습, 정가의 모습, 직장의 모습, 거리의 모습이 훈훈한 바람과 같이 웃음의 꽃이 진실과 더불어 피는 날 참다운 독립국가, 복지국가가 이룩될 것이다. 100여년을 이어온 자아혁신과 민족개조 운동은 루터의 개혁 500년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이어져 나아가야 할 것이다. 500년을 바라보면서. 

 

2017년 6월 14일, 장철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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