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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천 목사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목회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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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7-04-15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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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4월 6일과 7일 이틀 동안 진행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KAPC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조영천 목사의 강의 내용이다. 조 목사는 Reformed 신학교(Orlando, FL)에서 MA를, Westminster 신학교에서 Ph. D 학위를 받았으며,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Union with Christ in the theology of Anthony Tuckney(1599-1670)"(2015)이다. <유럽의 종교개혁>, <종교개혁 신학자들>, <종교개혁 유산> 등의 신학서적을 번역하였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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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총회와 목회의 개혁

 

저는 박사학위 과정을 마칠 때,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중요한 멤버였던 Anthony Tuckney라고 하는 신학자를 제 논문의 주제로 삼고, 특히 그 분의 Union with Christ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에 대해 논문을 썼습니다. 제가 Anthony Tuckney에 대해 논문을 쓰고,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더 큰 이유는, 안타깝게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그동안 미진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이러한 현상이 조금은 역설적으로 보였습니다. 오늘날 장로교회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역은 단연코 한국 교회일 것입니다. 하지만, 장로교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말할 것도 없고, 학문적인 관심도 그동안 크지 않았습니다. 저는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에 따라 말씀을 선포하겠다”고 서약하면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해서 아는 내용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가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이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논문을 쓰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잡으면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제 주제로 잡고서,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단계이지만 한 걸음씩 나아가려고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한국 교회 내에서, 교리 교육, 신앙고백서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고,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개하는 책도 출판되었는데, 이러한 흐름에 작게나마 기여하는 것이 저의 바램이고, 오늘 이 자리가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오늘 제 발표의 주제를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목회의 개혁”이라고 정했습니다. 오늘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단순히 신학 회의가 아니라, 목회적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모인 실천적인 모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원인에 대한 분석은 다양한 각도에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사회문화적 동인, 정치적 동인, 경제적 동인, 지성사적 동인 등, 여러가지 원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과 더불어, 종교개혁을 일으킨 가장 핵심적인 동인은 목회적 이유였습니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목회적 사건”으로 평가될 필요가 있습니다. 루터는 비텐베르그의 성경 교수였을 뿐 아니라, 비텐베르그 성교회의 목사였고, 그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게 된 핵심적인 이슈는, 면죄부 판매라고 하는 당시의 잘못된 관행이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처럼 “값싼 은혜”(cheap grace)로 전락시켜 버린 현실, 그리고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성도들이 참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목회적인 고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종교개혁가로서 루터의 초창기 활동이 주로 로마 교회와의 신학적 차이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논쟁적”(polemical) 활동이었다면, 1525년 이후 루터의 주된 관심은 종교개혁의 신학적 주장들을 목회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작업은 신학생 및 목회자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진행되었습니다.

 

루터의 영향을 받아 스트라스부르그의 종교개혁가로 활동한 마틴 부쩌(Martin Bucer)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Martin Bucer는 루터가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십자가 신학>을 발표할 때 현장에 있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루터와 칼빈만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부쩌는 칼빈에게 목회적 멘토로서 영향을 끼쳤고, 말년에는 영국의 Cambridge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는데, 이 케임브리지 대학이 영국 청교도 운동의 중심지가 된 데에는 부쩌의 영향이 작지 않았습니다. 부쩌는 1538년에 <영혼의 진정한 돌봄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판합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부쩌는 이렇게 밝힙니다.

 

“성도의 교제에 대한 돌봄은 매일매일 더 사라져가며, 심지어는 목회자들 자신도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듯 보인다. 나는 재앙과 같은 이러한 비참한 상황을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 다시 말해서 목회적 돌봄에 관한 책을 출판한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엇인지, 교회는 어떠한 규칙과 질서를 가져야 하는지, 교회의 참된 사역자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영혼을 돌보는 사역 및 그리스도의 양들을 참된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목회적 직분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처럼 부쩌는, 기존의 중세 교회에서 이루어지던 목회 관행이 성도의 실질적인 목회적 필요를 채우지 못했으며, 새로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은 올바른 목회적 돌봄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부쩌의 이 책이 1538년에 출판되었다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1538년에, 존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 스트라스부르그로 이동했고, 바로 이 곳에서 이후 3년간, 부쩌와 깊은 교제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무는 동안, 칼빈은 로마서 주석을 썼고, 기독교 강요를 개정했으며, 결혼을 하는 등 많은 일들을 겪었는데, 성숙한 목회자였던 부쩌로부터 목회적 영향을 받은 것이야말로 가장 큰 열매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칼빈은 원래 목회자로 살기보다는 조용히 은둔하며 학자로 살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칼빈을 현장 목회자로 헌신하게 이끄셨습니다. 칼빈의 모토(motto)로 알려져 있는 문장, “나는 나의 심장을 주님께 드리나이다”는 그의 목회적 결단으로부터 나온 표현이었습니다. 1541년 8월, 자신을 쫓아냈던 제네바로 돌아가기 직전, 칼빈은 Farel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 바쳐진 희생제물처럼, 나는 나의 심장을 하나님께 드리나이다. … 나 자신의 영광은 제쳐두고,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는 것 외에는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Letters of John Calvin, Volume 4, 257) 이 유명한 인용문은, 자신의 개인적인 뜻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앞세우겠다는 철저한 헌신의 모습과 아울러, ‘교회의 유익을 그 무엇보다 먼저 추구하겠다’는 목회적 결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신념에 따라, 칼빈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네바의 목회자로, 특히 (우리와 비슷한) 이민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가들은 무엇보다도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고, 종교개혁 이후 100여년이 지나 개최되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 역시 “목회적 개혁”을 추구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643년부터 1652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영국 전역을 대표하는 100여 명의 신학자/목회자들이 모여, 총 1,385번에 달하는 회의를 가졌습니다. 이 숫자는, 총회의 총대 전체가 참석한 전체 모임 숫자만 계산한 것으로, 수십 여개에 달하는 소위원회의 모임은 제외한 것입니다. 가장 왕성하게 진행되었던 처음 5-6년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거의 매일 모여서 교회 전반에 걸친 이슈들을 논의했습니다. 노회나 총회 모임을 한 번씩 갖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100여 명의 대표자들이 매일 모여서 1400여 번에 걸쳐 회의했다는 것은, 이 총회에서 결정된 내용들이 얼마나 심도 깊은 논의 끝에 나온 결과물인지,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권위 있는 내용인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분들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과물을 절대화시키는 것에 대해 경계하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공의회나 총회의 작업들도 우상화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100여 명의 탁월한 신학자/목회자들이 이만큼 오랜 기간, 이만큼 자주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논쟁하고, 회의했던 사실들을 비추어 볼 때, 웨스트민스터 총회보다 더 영향력 있는 모임은 현실적으로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1643년 7월 1일, 총회 소집을 알리는 공고문은 이 총회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허락하신 무한한 복들 중에 가장 큰 복은 우리가 가진 신앙의 순수성이다. 하지만, 예배, 권징, 교회 정치 등의 영역에서 여전히 많은 부분들이,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보다 더 철저하고 완벽한 개혁 (a further and more perfect Reformation)을 필요로 하고 있다. 대주교, 주교, 주교구 상서관, 수석 사제, 부제 등 위계질서에 기초한 현재의 교회 조직은 악하고 거슬리며, 신앙의 개혁과 성장에 크게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이 나라의 정치에도 크게 위협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가장 적합하고, 국내 교회의 평화를 유지하며, 스코틀랜드 및 해외 다른 개혁 교회들과 일치하는 교회 정치를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이에 학식 있고 경건하며 사려 깊은 성직자들을 (Learned Godly and Judicious divines) 소집한 총회를 열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고 조언하도록 하는 일이 적절하고 필요하다고 사려된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된 목표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Reforming the Reformation” (종교개혁을 개혁하기” 혹은 “종교개혁을 더 철저하고 완벽하게 완성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추구했던 “더욱 철저한 개혁”은 결국 “목회자의 개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남긴 결과물 중, 오늘날 가장 많이 알려지고 또 중요하게 여겨지는 문서는 소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라고 불리는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입니다. 하지만, 이 총회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던 작업, 그리고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했던 작업은 “목회자들에 대해 검증하고 심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이 총회가 열리기 전까지 영국의 국교회는 소수의 고위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위계적 조직이었습니다. 목회자를 검증하여 안수하는 작업은 각 지역을 맡은 주교들의 권한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기존의 검증 시스템을 중단하고, 영국 교회 역사상 최초로 “목사 안수를 위한 national filtering system (국가 전체적인 검증 시스템)”을 세웠습니다. 이전까지는 소수의 고위 성직자가 전담했던 일들을, 이제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전체가 하나의 검증 위원회가 되어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기존의 영국 국교회 목회 시스템을 사실상 무효화시키고, 모든 조직을 새롭게 세우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목사 안수를 준비하는 후보생에 대한 검증 뿐 아니라, 이미 안수를 받은 목회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올바른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를 검토했습니다. 특히 이 총회가 열리는 기간은 영국 내전이 일어나서, Charles I세를 지지하는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전쟁 기간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목회자들이 생명을 잃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목회지를 잃어버리기도 했기 때문에, 목회자들을 적절하게 재배치하는 작업이 매우 긴급하게 필요했습니다.

          

총회의 공식 일정은 매일 오전 9시에 시작했는데, 오전 6시부터는 새벽 경건회로 모였고, 9시 본회의가 열리기 전까지 오전 이른 시간에는 목회자들을 면담하고, 실제 설교를 들으며 검증하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이 당시 영국에는 8,600개의 교구가 있었고, 10,000여 명의 안수 받은 성직자가 있었는데, 웨스트민스터 총회 기간 중에 그 중 절반에 해당하는 5,000 여명의 자격을 검증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이 당시 영국 교회에서 가장 긴급하게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가장 먼저 작성했던 문서는 <목사 안수를 위한 지침서>(Directory for ordination, 1644년 4월 19일)였습니다. 이 지침서는 목사의 자격을 확인하기 위한 9가지 규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1. 검증받는 사람을 형제로 대하되,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고, 특히 각 사람의 진지함과 겸손함과 자질에 관해 살핀다.

 

2. 성경 원어에 관한 실력을 검증하되,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을 읽게 하고 그것을 라틴어로 번역해 보도록 한다. 만일 성경 원어 실력이 약할 경우, 그의 다른 학문적 능력을 엄밀하게 검증하고, 특히 논리학과 철학을 점검한다.

 

3. 신학적 지식에 있어서 어떠한 저자들을 읽었고 가장 잘 알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신앙의 기본적인 근거들을 잘 알고 있는지, 온갖 잘못된 견해에 맞서 정통 교리를 변호할 수 있는지, 자신에게 제시된 성경 본문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지, 양심의 문제, 성경의 역사, 그리고 교회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를 검증한다.

 

4. 이전에 공적인 자리에서 설교해 본 적이 없다면, 그에게 상당한 시간을 배정하여 노회 앞에서 주어진 성경 본문을 강해하도록 한다.

 

5. 일정한 기간 안에 신학의 일반적 논제나 논쟁에 관한 논문을 라틴어로 작성하도록 하고, 그 내용에 대해 노회 앞에서 논증하도록 한다.

 

6. 사람들 앞에서, 즉 노회가 임명한 말씀 사역자들 앞에서 설교하도록 한다.

 

7. 그의 소명과 관련하여 은사의 정도를 고려한다. (일반 목회자? 학자? 군목? 선교사?...)

 

8. 설교의 은사를 시험하는 것 외에도, 이틀에 걸쳐서 시험을 치를 것이며, 노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더 여러 날 동안 시험을 보도록 한다.

 

9. 이전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을 경우, 그의 안수 증명서 및 능력과 행실에 대한 증명서를 가져올 것이며, 그 자리에서 설교하게 하고, 필요할 경우 추가적인 시험을 보도록 한다. 

 

위 지침서가 보여주듯이, 목회자의 자격으로 중요한 요소는 경건한 인격, 신학적 지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씀에 대한 훈련 및 은사” 였습니다. 목회의 핵심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말씀 사역”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이고, 말씀을 잘 가르치고 설교하기 위한 인격과 경건과 실력을 쌓는 것이 목사로서의 가장 우선적인 준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 사역”을 강조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총회 때에 새롭게 주장된 내용은 아닙니다. 종교개혁 운동 자체가 무엇보다도 “말씀 운동”이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 운동이 어떻게 결실을 맺게 되었는지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면죄부에 반대하였고, 모든 교황주의자들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무력으로 행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번역했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하지만, 내가 자고 있는 동안, 그리고 내가 암스도르프와 비텐베르그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은 교황청의 세력을 놀랍게 약화시키셨다. 나는 한 게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다 하셨다.” (1522년 설교)

          

종교개혁이 확산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말씀을 함께 연구하는 모임”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츠빙글리가 주도했던 취리히에서 개신교 목사들이 함께 모여 성경을 연구했고, 칼빈의 제네바에서도 Congregations 이라는 목회자들의 성경 연구 모임이 매주 열렸습니다. 이러한 전통의 연속선상에서 영국 청교도들은 “Prophesying Meeting” (예언 모임 / 설교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졌습니다. 함께 모여서 정해진 본문을 가지고 한 사람이 설교하고, 그 후 그 말씀에 대해 함께 토론하는 study 모임이 Prophesying Meeting 이었습니다. 이러한 목회자들의 말씀 연구 모임이, 훗날 장로 교회의 노회 모임의 선구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청교도들의 모임이 영국 국교회와 충돌하게 됩니다. 교회의 통일성(uniformity)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영국 국교회,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의 모든 목사들이 정해진 지침대로 설교하고 예배를 인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Book of Common Prayer (공동 기도서), 그리고 Book of Homily (설교집) 의 순서에 따라, 그대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것이 의무화되었습니다. 이러한 관행에 반발하여, 청교도들은 말씀에 근거한 예배, 목사의 자유롭고 개인적인 연구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설교, 그리고 목회자들간의 위계적 구조가 아니라 목회자들간의 동등성에 기초한 교회 정치를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이슈들로 인해서 청교도와 엘리자베스 여왕 사이에 충돌이 점점 격렬해졌고, 결국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 때, 청교도들은 포기하지 않고, 대신에 운동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과의 논쟁에서 승리하여 영국 교회 시스템 전체를 바꾸려고 했었다면, 여왕의 정치적 파워를 현실적으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이제는 개혁의 대상을 여왕 자신이나 국교회 교회 구조가 아니라, 영국의 국민들의 마음을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습니다.

          

이러한 수정된 전략을 잘 보여주는 예가 Cambridge 대학교 내의 Emmanuel College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후반기인 1584년에 Emmanuel College가 세워졌는데, 청교도 연구의 대가인 Patrick Collinson은 이 Emmanuel College의 설립을 두고 “트로이의 목마와 같이 은밀하게 침투하여 적을 공격하는 전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영국 국교회 시스템 안으로 청교도 목사들을 은밀하게 침투시켜, 영국 국민들의 마음을 얻는 전략을 사용했다는 것이죠. 이 학교의 설립자들은 학교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이 학교를 세우며 우리는 우리 앞에 이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씀과 성례라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키우는 것이다. 이 학교를 통해 배출된 사람들이 영국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훈련하고 목사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특히 이 학교의 규정 중에는 흥미로운 규정이 부록으로 하나 첨가되어 있는데,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 학교가 학자들의 영원한 집으로 머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 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학생은, 1년 이상 연구원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조영천 목사 ⓒ KimDongWook5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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