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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목자 잃은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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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2010-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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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 산맥 끝자락 서쪽 평원 안에 위치한 ‘타쉬켄트’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이다. 그곳을 중심으로 한 외곽지에 우리 고려인 후손들의 농장이 많이 흩어져 있다. 오래 전, 우리는(남편 목사님과 필자) 그 농장에서 기거하는 고려인을 상대로 성경공부를 가르쳤던 적이 있고, 그때 아프가니스탄이 마주 보이는 우즈베키스탄 국경지점인 ‘침관’이란 곳을 가볼 기회가 주어졌다.

그곳을 가는 동안, 작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 마리의 양 떼를 이끌고 풀을 먹이며 서서히 이동하는 목자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어서, 필자는 성경에서나 읽어볼 수 있는 목자와 양 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우리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예수님 당시의 목자들은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중동지역은 우리나라의 농장들처럼 풀이 많은 것도 아니고, 산이라고는 하지만, 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멀리서 보면 완만하게 경사진듯하나 가까이 가보면 가파른 돌산이고 곳곳에 파인 자연동굴, 석회암벽으로 높은 산맥이 형성되어 있고, 그리고 평지는 바싹 메마른 광야에서 광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열악한 곳이지만 비가 자주 내리는 지역이나 땅속에 물이 저장된 곳은 그런데로 풀이 무성하기도 하다는 데, 목축업을 하는 많은 목자가 그렇게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양들을 이끌며 밤낮으로 헤매고 다니는 것이다.

때로는 험한 골짜기도 만나고 때로는 사나운 맹수를 만나는가 하면 때로는 무서운 강도 떼를 만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때, 목자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채 양 떼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맹수와도 싸워야 하고 강도 떼와도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푹풍과 벼락이라고 한다. 이런 무서운 대자연의 위험으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기 위해 목자들은 그야말로 사력을 다 한다는 것이다.

목숨을 바꾸어서 지켜내는 목자의 사랑, 이 사랑 속에서 양은 보호받으며 지나는 동안 목자와 대단히 가까워지고 목자가 없으면 양의 생명도 없는, 글자 그대로 생명적 관계로 발전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때때로 양들이 목자를 잃고 방황하다가 이리나 곰의 밥이 되기도 하고, 험한 낭떠러지나 굴 속으로 떨어져 죽기도 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토록 사랑하며 불철주야 지키는 목자가 있는데 양이 목자를 잃게 되는 것은 또 왜일까?

양이 목자를 잃게 되는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으나 첫 번째 이유는 양의 속성이 멍청하다는 데 있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양이 목자의 음성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대개는 앞에 있는 먹이에 마음을 너무 빼앗기는 것, 엄밀히 말해서 탐욕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목자의 탈을 쓰고 가만히 들어온 거짓 목자가 실제로 있어서 양들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배를 더 채우려 하는 것, 이것 역시 탐욕의 발로라고 보겠다. 우리는 모두(성도, 사역자) 탐욕을 버리고 참 목자이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야 한다.

우리(양)가 따라야 할 참 목자의 음성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성경 말씀,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인도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음성이란 또 어떤 것일까? 성령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딱딱할 수도 있지만, 성령님의 속성과 그 하시는 사역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며 나누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성령은 인격인가, 영향력인가?

여호와 증인들은 성령을 영향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령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증거하시는가? 성경은 성령 님을 지(知) 정(情) 의(意)를 온전히 갖추신 인격적 신(神)이심을 증거한다. 1. 지(知)적이시다. (고전2:11, 롬8:26-27, 고전12:8) 2. 정(情) 적이시다. (롬15:30) 3. 의(意)지적이시다. (고전12:4-11, 요16:13, 마12:31-32 ) 성령은 우리(성도)에게 끌려다니는 영향력이 아니라 우리의 선생이 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신다. (요 14: 26) 우리에게 일을 시키신다. (행 13: 2) 그분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요 16: 13)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 롬 8: 26) 성령님은 근심하기도 하신다. (엡 4: 30)

우리가 어느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이 인격적인지 그렇지 않으면 비인격적인지 하는 것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된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나타나는 인격 됨됨이에 따라서 우리가 그를 좀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최근 이곳저곳에서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몇몇 신령(?)한 단체의 집회와 그 현상을 바라보면, 놀랍다 못해, 경악하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성령의 역사와 impartation, 과연 인격적인가? 누가 보아도 그들을 주장하는 그 무엇이 있긴 한데, 그 무엇이란 것의 인격적인 면이 많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들이 강사의 명령 한마디에 엉금엉금 기어다니기도 하고 짐승들의 소리를 내면서 울부짖기도 하고, 데굴데굴 구르며 킬킬거리기도 하고 쉴새없이 주절거리기도 하고 고개를 좌우로 심하게 흔들기도 하고 때때로 펄쩍펄쩍 뛰면서 광기가 서린, 광(狂)춤을 추기도 한다. 이렇게 어느 한 사람, 혹은 몇몇 사람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성령 하나님… 인간의 눈에도 비인격적이랄 수 밖에 없는 이런 괴현상이 과연 성령님의 현현이요, 지.정.의를 온전히 구비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고, 그런 비인격 적인 모습의 실체가 성령 하나님의 인격이라면 단언하건대 나는 그런 성령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들이 주장하는 그 성령의 impartation 적 인격은 내가 보기에 심히 비인격적이며, 안타깝게도 부족하고 모자란 나의 인격보다도 더 한참 낮은 수준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역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영분별의 은사를 활용하란 것이다!!

보혜사 (保惠師 ) 성령은 하나님이신가?

물론, 이단들, 특히, 신천지의 이만희는 자신이 보혜사(保惠師)라고 주장한다. 보혜사(保惠師)란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은혜로 도우시는 스승’이기에, 자신이 성도들을 도우니 선생이요, 보혜사(保惠師)란 것이며, 이에 근거하여, 구약 성경의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도 보혜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보혜사가 아니라 단순한 하나님의 대언자(messenger)로서의 족장이며 예언자일 뿐이다.

성경의 보혜사(保惠師 ) 라는 말은 변호인을 뜻하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의 번역으로서 스승이라는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보혜사(保惠師 ) 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이며 진리와 말씀의 영(요 14:26, 15:26)으로서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은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성령께서는 어떤 특정한 사람 속에만 들어가서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직접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믿는 사람들 (고전12: 3절 참조)의 마음속에 내주해 계시면서 언제 어디서나 무시무종으로 역사 하시는 거룩한 영( Holy Spirit), 참 하나님의 영으로써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성경에서 성령이 하나님이신 증거들: 세상이 창조될 때 성령이 계셨다. ( 창 1: 2), 하나님의 특성인 영원성(히 9:19), 편재성(시 139: 7), 생명, 새생명을 주시기도 하시고(욥 33: 4, 요 3: 5-6) 생명을 취하여 거두기도 하신다. (행 5: 1-10)

신약의 보혜사(保惠師 ) 성령님과 구약의 성령님은 동일한 신(神)이신가?

(보혜사 성령님과 구약의 성령님은 다 같은 성령님이신가? 삼위일체만큼이나 헷갈린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는데, 구원과는 다른 사건으로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시는 성령세례, 두 사건이 어떻게 구분 되어지는지, ) 이 질문은 얼마 전, 우리 아멘 넷의 독자님 중 한 분이 실제로 필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우리 중에 이런 질문을 품고 계신 분들이 혹 더 계실까 하여, 참조해 보시고 도움이 되시기 바라는 마음에서 두 가지 중요한 질문과 필자의 답변을 여기에 올려본다.

질문 사례: 1. 보혜사 성령님과 구약의 성령님은 동일하신가? 에 대한 필자의 답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 4: 4-6절 말씀) 구약의 성령님, 신약의 성령님, 보혜사(保惠師 ) 성령님등...그 역할과 명칭은 변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속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해도 하나, 달도 하나, 우리 자신의 몸도 하나이듯, 주님의 거룩하신 성령 님은 세기는 변해도 변하지 않으시는 한 분뿐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요, 저는 그 이상은 한 발짝도 더 나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다음: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는 이미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시는데, 구원과는 다른 사건으로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시는 성령세례, 두 사건이 어떻게 구분 되어지는지, ) 이 부분은 상당히 까다로운 것 같지만, 아주 간단합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속에 이미 내주해 계신 성령님을 우리의 완악함 때문에 그분의 충만하심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뿐이지요. 새롭게 다른 성령이 오셔서 충만케 된다고 오해를 하시면 위험합니다. 이것을 알아듣기 쉽에 예를 들면, 빈병이라고 보이는 것에는 빈병이 아니라 공기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병에 물을 붓는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물이 들어가는 것만큼, 공기는 빠져나갑니다. 계속해서 물을 채우면 결국 공기는 하나도 없고 물로서만 가득해집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 우리의 죄 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주님의 영이신 성령 님께서 임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훈계하시고 가르쳐 지키게 하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면 순종하는 만큼,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던 죄성은 점차 빠져나가고 주님의 영(Holy Spirit)으로 가득히 차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상 술어로는 성화(sanctification)되어 간다고 말하지요. 성화(sanctification)도 인간의 마음대로 되는 것 아니고, 때로는 위로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고 그 나라에 갈 때까지, 성령님께서 사랑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 용어로는 견인이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내가 내 속에 계신 성령 님의 음성에 순종을 하면 하는 만큼, 내 속의 죄 성보다 주님의 성품이 더욱 크게 나타나게 되고 그때부터는 우리가 성령충만의 은혜를 누리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직통 계시와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다음은 우리 아멘넷 독자님의 또 다른 질문 사례 2: (직통 계시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언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저도 이부분에 의문과 관심이 많아 글을 쭉 읽어보니 어떨 때는 같은 의미로 어떨 때는 다른 의미로 쓰고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미리 감사합니다. )

필자의 답변: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의 글과 토론을 관심가지고 듣고 읽고 계신다고 하시니 더욱 감사 드립니다. 주님께서 친히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드려봅니다.

직통 계시: 한자로 啓示, 영어로 revelation입니다. 먼저 계시의 뜻을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계(啓 열다) 시(示 보이다)의 뜻입니다. 거기에 직통이란 직접 나와 통한다란 뜻이 되겠습니다.

이 단어가 주는 의미는 (지금까지 숨겨졌던 비밀을 하나님께서 내게 직통으로 열어 보여주셨고, 말씀해 주셨다) 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내주해 계십니다. 그 성령 하나님께서는 내게 새로운 계시, 감추어졌던 비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경으로 완성된 신구약 66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하신 업적 등이 생각나게 해 주시고 의로 교육하시고 죄를 회개케 하시고 미래에 되어질 일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요 14장 참조)

필자의 체험을 예로 들면,
성경 속에 그런 말씀이 있는지도 전혀 몰랐는데, 기도 중에 어느 한 구절이 뜨거운 감동과 함께 떠오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일 점 일 획도 틀리지 않습니다! (신 18: 18-22절 참조)

또, 어느 날은 말씀을 듣는 중, 성경말씀을 읽는 중, 또는 찬송을 부르는 중, 그 중에서 한 구절이고 두 구절이고 갑자기 그 말씀이 내 영혼에 부딪혀 오면서 뜨거운 감동으로 인하여(눅24: 32절 말씀 참조) 회개면 회개, 감사면 감사가 통곡과 함께 부각 되어 오기도 하고 내 마음에 각인 되기도 합니다.

다른 이를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릴 때, 지금 자칭 예언자들이나 선지자들이 예언해주듯, 그렇게 쉽게 주절주절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끔씩 그 사람의 형편과 상태가 방언기도로 나오게 하시고 그 뜻이 연달아 통역되어서 나오는 경험이 있는데, 그때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 내용이 들어 있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 그 방법을 보면 십수 년 후, 가끔씩 찾아가셔서 말씀해 주셨다는 것도 기억하십시다.)

이렇게 미리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계시해 주신 그 말씀을 주님께서는 보혜사(保惠師 ) 성령으로서 우리 개인 교회나 공동체 교회의 유익을 위해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생각나게 해 주신다고 (요 14: 16-17, 26절 참조) 약속하신 그대로입니다. 나에게만 직통으로 주어진다니요? 무서운 말입니다. 그래서 영분별의 은사도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정리해둔 검증법도 성경 속에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자가 양에게 들려주는 음성,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도록 도와주시고, 때로는 위로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고, 이끌어주시는 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나에게만 들려지는 직통 계시가 아니라, 주님을 구세주로 믿는 모든 양이 말씀과 기도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 목자의 음성을 다른 소리와 엄격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 분별하는 것이지요.

이 두 단어의 뜻이 질문 자 뿐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밝히 보여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드려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론의 중심주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 아래서 그 주권을 통하여 주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것이어야 하고, 각종 은사는 교회의 (개인 교회, 공동체 교회) 유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은사 일변도로 나가는 성령론은 그리스도의 Lordship에 대한 순종보다는 능력 혹은 power를 강조하여 신앙질서 즉, 성령세례를 통한 거듭남과 성령열매를 통한 성품변화를 초월해 버리는 지나치게 초월주의, 혹은 신비주의 관점으로 나갈 우려가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뭔가 좀 더 잘 되고 잘 풀리기 위해서, 교회를 부흥시킨다는 목적으로, 성령 하나님을 이용하는 태도, 독초가 섞인 꼴을 하나님의 말씀에다 비빔밥처럼 섞어서 먹이는 행위, 이 모든 것들은 탐욕에서 비롯된다. 믿음의 분수를 넘으려 말고 겸허한 마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우리 손에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 내 영혼의 양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내 마음속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도 밝고 선명하게 들려질 것이고 그런 양은 결코 목자를 잃고 헤매거나 곁길로 빠져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으리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겔 34: 1-5절 말씀)

별첨:
영어의 mind를 ‘마음’이라 번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그 ‘마음’이라 할 때 요즘 신앙인들 중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가슴’ 또는 심지어 ‘심장’과 ‘허파 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슨 “기도회”에서 “안수기도”를 받아 “성령충만”한 “은혜”를 받았는데, 그 “성령의 은혜”가 가슴 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는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사실 영어의 mind는 ‘마음’ 보다는 ‘정신spirit’을 가리킵니다. ‘理性’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조선의 정통 유학(성리학)에서는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이 합쳐진 통일적인 인간의 주체로서 마음 心을 말합니다.

“성령”이란 영어 단어는 Holy Spirit와 Holy Ghost인데, 原KJV에 각각 7번과 90번 나옵니다. Holy Ghost가 압도적이지요. 그래서 개혁교회 중 어떤 교회에서는 성령님을 聖神님이라고 부르며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이 말의 연원을 따져보면 한인교회에서 요즘 유행하는 언어의 남용과 그에따른 성령님에 대한 이해의 심각한 오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아주 중요한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Ghost란 재미난 영화도 있었지만, 요즘은 ghost를 ‘귀신’ 또는 ‘혼’으로 흔히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ghost란 말이 처음 성서에 사용된 중세시대에는 ‘魂’ 보다 지금의 ‘靈’으로 쓰였습니다. Shakespeare에 보면 spirit가 귀신으로 쓰입니다. 그때는 ghost가 오히려 조선 유학에서 쓰는 통전적인 인간성 the living essence of a person에 가깝게 쓰였습니다. 오히려 Spirit가 the essence of a departed person or a demonic or paranormal apparition으로 쓰였음은 Shakespeare를 읽는 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헬라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사용하며, 그 라틴어와 영어의 사용법이 서로 반대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ghost는 독일어의 geist이고, 독일어는 현대에도 원형을 보존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Zeitgeist 時代精神 the spirit of  the times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독일어 geist는 영어에도 있는데 ‘gust (거친)바람’ 입니다. 영어에서 옛말은 gast입니다.

헬라어 원문 성서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거나 독일어로 번역할 때 geist는 ‘pneuma프뉴마’에 대응합니다. ‘바람’ 또는 ‘호흡’이란 뜻을 가졌습니다. pneumon은 ‘폐’를 가리킵니다. 영어에서 pneumonia는 폐렴을 뜻하지요?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 얘기는 좋은 예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여기서 프뉴마가 바람과 성령에 공통으로 쓰였습니다.

근데 문제는 라틴어에서 생기기 시작합니다. 라틴어 spiritus는 breath란 뜻이고 spirare라는 blow or breathe라는 동사어근에서 나왔습니다.

한편 영어에서는 라틴어의 영향으로 점차 spirit를 마음 心으로 사용하게 되지만, 그 어근이 담고있는 뜻 때문에 ‘expire’나 ‘breathe out’으로도 쓰여서 ‘terminate’ 또는 ‘죽음’으로도 쓰입니다. 이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말씀은 마27:50과 요19:30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영혼이 떠나시다>라고 표현된 곳입니다. 많은 현대 영문번역이 spirit (Spirit아님)을 쓰고 더러는 (AV) ghost라고 합니다. 어떤 경우나 예수님이 “마지막 숨을 거두시고 그의 인간으로서의 essence가 그를 떠나셨다” 라는 뜻입니다. 혼(바람)이 떠나서(빠져나가듯이) 혼절해서 영(귀신)이 됐다..이런식으로 이해했다간 신사도보다 더한 뭐가 될 수도 있는데…^^

‘혼’이란 단어가 독립적으로 쓰인 곳을 신약성서에서 찾아보면(난외주 참조) 모두 죽음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순간적으로 뭔가(바람이) 빠져나가는 듯한 현상을 관찰한다고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사람을 영 혼 육으로 삼분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짐승같은 류이고, "신자" 중에는 영(가슴)적인 사람과 혼(머리)적인 사람이 있어서, 이 영적인 자들(spark가 있는 자들)을 자처하거나 또는 신사도가 되면 그런 신사도(예언자)들로서 성령님의 “직통계시”를 “친밀하게” 받으며 >>기록된<< 성경말씀에 대한 전통적 해석 또는 '교리'를 무시하는 예언자적 권위를 주장하게 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성령이라 할 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spiritual한 인간의 총체적인 삶에 내주하시는 Holy Spirit보다, 뭘 “터치 하신다”며 또는 환상을 보고 꿈꾸며 방언한다며(저는 다른 사람이 골방에서 혼자하는 방언을 인정합니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혼을 좇아 입신의 체험을 추구하는 유행이 지금 한인교회에 횡행한다고 믿습니다.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써 말씀을 이해하며, 일상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와 구현되는 거룩한 삶 또는 항상 기도하는 삶, 교회생활이 신앙생활의 전부인냥 교회와서 복작거리고 그 귀한 시간을 "봉사"와 "(단기)선교"라는 미명 아래 쏟아부으며 burn-out되는 인생이 아니라, solid한 생활을 통해 가족간에 동료간에 친구간에 피어나는 꽃과 그 열매로서 이웃에게 덕을 끼치는 성령충만한 신앙인이 더욱 아쉬운 때입니다.  By: Thomas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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