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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티컬 코렉트니스-Political correct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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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6-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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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생이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석사 학위 공부를 할 때 아주 잘 생기고 공부 잘 하는 흑인 친구에게 ‘너도 인종 차별을 받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잘 생기고 공부도 잘 해서 전혀 인종 차별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느닷없이 너는 어떤 학점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A B가 반반이다.’고 하자, ‘너는 인종 차별 안 받는 거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올 A 받은 학점을 보이며 ‘이게 바로 인종 차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교수가 흑인 학생의 성적을 평가할 때 A를 줄까 B를 줄까 망설여지는 경우면 무조건 A를 준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 B를 주면 교수가 인종 차별한다는 오해를 받기 때문에 웬만하면 A를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흑인 학생은 그것이 바로 인종 차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인 교수는 정확한 사실에 토대한 평가보다 소위 폴리티컬 코렉트니스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이런 배려까지를 공평이나 정의로 정당화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 된 이후 언론은 혐오 범죄 건수가 늘어난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보도를 보면 사람들은 좀 불안합니다. 그런데 그 보도가 사실 정확한 보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선거 유세 때 언론이 했던 보도 행태를 생각하면 그런 보도에 대해서도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미국에 인종 차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인종 차별이 심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미국에 인종 차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차별도 만만치 않습니다. 예를 들면 경찰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언론은 크게 다루지 않지만 흑인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으면 언론은 크게 보도할 뿐 아니라 사건을 거두절미로 왜곡 보도하여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릇된 판단으로 경찰에 대하여 분노하고 비난하게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어떤 아랍 여자가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트럼프를 비난하면서, 이 버스 안에 있는 그 누구도 트럼프보다는 머리가 좋을 것이다, 트럼프는 미친놈이다, 대통령 자격이 안 된다며 떠들었습니다. 그 버스에는 몇몇 백인들도 타고 있었고 그들은 그 여자의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입을 다문 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버스 안에 KKK단의 백인이 타고 있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르지만 그런 경우 점잖은 백인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괜히 한 마디 했다가 자칫하면 상대가 인종 차별 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인종 차별은 가장 조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미국의 주류 언론은 가벼운 인종 차별도 지나치게 확대하여 문제를 삼기 때문에 여간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동성결혼이나 낙태를 반대해도 반대 의견을 말하면 안 되고, 흑인들이나 이슬람들이 잘못해도 그것을 지적하면 인종 차별이 될 수 있습니다.
   
Political correctness 라는 말은 ‘정치적 올바름’또는 ‘정의롭게 말하기’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처럼 정의가 강조되는 시대도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정치, 경제 분야에서 정의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의가 정치나 경제 같은 분야에나 필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치나 경제 분야에서 정의가 강조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정치나 경제 분야에 정의가 가장 절실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정치나 경제가 가장 정의롭지 못하다는 뜻도 됩니다. 개인의 정의보다 정치 경제 분야의 정의가 강조되는 것은 정치 경제가 정의롭지 못할 때 그 피해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중은 개인의 정의보다 정치 경제적 정의만을 문제 삼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를 현상으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심층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 경제적 부정의가 저질러지는 배경에는 개인들의 부정의가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결코 부정의의 문제를 파악도 해결도 할 수 없습니다.
   
지난 2012년에 박금자 박사가 펴낸 “정의롭게 말하기”는 시의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그녀는 언어와 인터넷 미디어에 관심을 갖고 그에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그녀는 “인터넷 미디어 읽기-인터넷 미디어와 신문의 미래(2001)”, “언어예절(공저, 2003)”, “텍스트언어학의 이해(공저, 2004) 외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또한 같은 분야의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녀의 저서와 번역서들은 모두 세 가지 주제(언어, 미디어, 사회적 기업)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녀가 대학에서 가르친 학문적 이해와 20년이 넘게 언론사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이 세 가지 주제를 심층 분석한 것은 언어나 미디어의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나 경제나 사상이나 이념이나 과학의 분야에서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급변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언어와 미디어의 역할이 얼마나 막중한가를 우리는 실감하고 있습니다. 박금자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정의는 정치나 경제 분야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정의란 정치 경제 분야의 전유 주제로만 취급되던 것을 이제 개인이 일상의 지평에서 논의할 화두로 끌어와야 합니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에는 화자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차별과 편견이 담겨 있는 경우가 무수히 많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들이 신체나 지적 정신적 장애자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것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공정성과 다양성이 중요해진 현대 사회에서는 정의로운 언어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합니다. 왜냐하면 공정성과 다양성은 경우에 따라서 상호 양립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공정성이 두 집단 사이에서 충돌할 때 불가피 하게 갈등과 분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한 국가 안에는 공정성이 상호 충돌하는 집단이 수없이 많기 때문에 사회과학이나 이념으로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고, 법과 질서를 따르는 방법으로도 한계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현 정치 제도는 그런 경우를 감안하여 지도자에게 통치권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는 법과 질서를 따라 통치력을 사용하지만 상호 화합 불가능한 집단 간의 갈등이나 분쟁이 일어날 경우 국가적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통치력을 행사해야 하고 이 경우에 분쟁하는 양측은 무조건 통치자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또한 헌정질서입니다.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개인이 정의롭게 말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의 정의를 꽃피우는 밑거름입니다. “한마디의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 안에 폴리티컬 코렉트니스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과유불급은 폴리티컬 코렉트니스에도 해당됩니다.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 지나치게 강조 되어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사실이 왜곡되고 역차별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뉴욕은 다 문화 사회지만 미국의 가치관은 다양성만을 존중하지 않고 다양성이 미국의 가치를 지향하도록 하는 미국 사회의 소위 멜팅 팟의 기능을 강조하므로 여러 집단 간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충돌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폴리티컬 코렉트니스가 약자를 보호하고 서로를 존중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상대주의가 이에 편승하여 보편가치를 허물고 있다는 사실은 심각하게 우려해야 합니다. 미국 사회는 이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성탄절에 공공장소에서‘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도 조심해야 하는 것이나, 정치인이‘우리나라에 이민자가 너무 많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나, 닥터가 환자에게 ‘남자로 불러 드릴까요, 아니면 여자로 불러 드릴까요?’라고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은 폴리티컬 코렉트니스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는 지도자에 대해서는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하면서도 범죄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며 얼굴을 가려줍니다. 이런 것은 공평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심각한 가치 무질서 그 자체입니다.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도 그 의도와는 상관 상관없이 심각한 가치의 무질서를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좋은 법이나 제도도 악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좋은 제도나 법을 선용하기보다 악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대로 인간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적인 설명은 인간이 독자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법과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악용하지 못하도록 서로가 지켜보고 견제해야 하고 모두가 선을 존중하고 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스스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도 이기적이 되면 남이 악을 행할 때 내심 좋아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좋은 일도 나 혼자 해야 한다는 욕심은 아주 나쁜 것입니다. 이 문제는 특히 교회 안에서 조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선한 일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과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입니다. 사람을 무시하거나 상처를 주면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법과 정의를 세우기 위함이라지만 방법이 지나쳐서 법과 정의보다 중요한 보편가치를 가차 없어 무시하고 있습니다. 법보다 중요한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어른이 무시되고 전통 가치가 무시되고 보편 가치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심판자가 되어 최종적으로 법정 판결이 난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서로가 상대를 파렴치한 죄인으로 단정하고 어른이건 지도자건 상관없이 버르장머리 없는 막말로 비난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사려 깊지 못한 부모들은 어린 자식을 그런 현장에 데리고 가서 보편 가치가 짓밟히는 광경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민주주의라고 가르칩니다. 보편 가치를 무시하는 상대주의를 그렇게 가벼이 생각하다가 어느 날 그들의 자녀가 레즈비언이 되고 게이가 되어 아들이 남자와 딸이 여자와 결혼한다는 통보를 해 올 때도 지금과 같은 자부심을 보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지금의 서울 시장쯤 되면 자식이 동성결혼을 해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겠지만 시위 현장의 부모들까지 그러리라는 확신은 들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문화상대주의, 폴리티컬 코렉트니스가 나름 좋은 것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과유불급입니다. 법의 패러다임을 파괴하는 민주주의, 부모의 간섭까지 거부하는 문화상대주의, 여자를 여자로 부르는 것도 정의롭지 못하다는 폴리티컬 코렉트니스는 과유불급입니다.
   
머리가 벗어진 사람을 대머리라고 합니다. 대머리인 사람은‘대머리’라는 말이 참 듣기 싫습니다. 한국에서는 지난 2011년에 ‘대머리’라는 말 때문에 법정 소송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 간 적이 있습니다. 대법원은 1심에서 ‘대머리’라는 말에 경멸과 비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2심에서는 ‘대머리’라는 말이 통상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니까 대머리에게 대머리라고 하면 고소를 당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negro는 흑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흑인에게 negro라고 하면 욕이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African-American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법으로 규제할 사항은 아니고 상식의 문제입니다. 상식은 보편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인데, 상대주의가 상식과 보편 가치를 상대화 시켰기 때문에 폴리티컬 코렉트니스 자체가 어려운 것입니다.
   
언어의 폭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심각한 해를 끼칩니다. 그래서 정직하게만 말하면 안 되고 정치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언어의 표현이 사실과 진실만의 토대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소위 폴리티컬 코렉트니스입니다. 하지만 상대주의라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는 현대인들은 절대적 가치를 기준으로 질서를 회복하지 않고서는 혼란이 심화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가 없기 때문에 상대주의가 사람들에게 어필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절대가 없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갈등과 분쟁과 혼란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길과 방법이 본래부터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러한 사실을 꿰뚫어보았던 카트나 볼테를 같은 철학자들은 도덕, 즉 절대적 가치를 위해서 가정(假定)으로서의 하나님을 상정하고 문제에 접근하고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절대자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논리나 합리적으로 상당히 정직하고 겸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과학과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현대인들은 과거의 무신론자들보다 몇 배나 교만합니다. 절대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나름의 좋은 사상과 제도가 선용과 오용의 경계선을 넘는 것을 결코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러한 분별력으로 이 시대를 선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잠 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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