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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부재에 우는 선지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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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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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과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유세를 지켜보는 대다수의 미국 국민들의 마음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완벽한 후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야 다 아는 사실이고 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미국의 대통령으로 “이 사람이 좋다”고 선택할 후보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 덜 나쁜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긴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아야 하는 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상황은 아닙니다. 인간이란 그 누구도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 수준에서 나름 타의 본이 되고 존경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나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론의 보도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도대체 힐러리나 트럼프를 존경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볼 수 없습니다.

이번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국가라는 집단의 이기심과 정치의 어두운 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후보는 공화 민주 두 당이 공식적으로 내세운 후보들입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오른 사람도 아닙니다. 두 후보는 두 당을 대표한다는 면에서 국민의 실망이 더 깊은 것입니다. 두 후보의 수준이 곧 두 당의 수준입니다. 이런 후보들이 대표적인 두 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국국민들은 실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정직하게 말한다면 정당의 수준과 대선 후보들의 수준이 곧 국민의 수준입니다. 그리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수적인 백인들과 복음주의 교회 지도자들이라는 점이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정치적인 현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곳 미국이나 대한민국의 학계, 경제계, 사법계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존경할만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두 장로교단이 근래에 보여준 행태는 유치하고 미숙하고 무질서 그 자체입니다. 합동 교단에서는 총회에서 총무라는 자가 가스총을 뽑아 들고 총대들을 위협하더니 금년에는 한 총대가 투신 소동을 벌였습니다. 통합 측 교단 총회에서는 자기들이 이단으로 규정했던 이들에 대하여 특별 사면을 단행했다가 비난이 심해지자 사면을 철회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거의 모든 교단의 몇몇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범죄와 비리에 대한 소속 교단과 노회들의 왜곡과 묵인이 정상인 것처럼 아예 문제 삼지조차 않습니다.

또한 사회나 교회의 기득권 자들에 대한 비판자들의 태도 또한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불의에 대해 비판하는 자들의 비판이 폭넓은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 자신이 국가나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대중의 신뢰의 토대를 확보해야 합니다. 아무리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집단이나 사회라도 전체의 이익을 위하는 일에 몇몇 개인의 이기심이 걸림이 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지혜로운 정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공익이 개인의 이기심이나 집단적 사욕에 제압되는 것을 민주주의 승리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욕에 대한 절제의 권고를 정치적 탄압이라고 해도 안 됩니다. 불의에 대한 항거도 법과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법과 질서가 무시되면 침묵하는 다수와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가 피해를 입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법과 질서가 지속적으로 무시되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법과 정의와 질서와 공익을 무시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지만 국민 모두의 이기심을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개인이 국민 전체나 국가를 위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는 것은 민주주의 자체보다 소중한 덕목이고 가치입니다. 국민 개개인 모두의 요구에 따라 국가가 모든 정책과 행정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 한계를 넘어서는 요구입니다. 어느 사회에서라도 개인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복지사회 가치의 근간을 이루는 것입니다. 개인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지만 교회나 국가 정책과 행정은 개인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해야 합니다. 모든 개인에게도 유익하고 국가 전체에게도 유익하다면 금상첨화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개인이 희생해야 합니다. 이것은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보편 가치입니다. 이 가치를 무시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런 보편가치가 무시되는 상황은 바로 하나님께서 부재하시는 상황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법이나 정의나 질서가 무시되는 사실 자체도 염려하고 우려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러한 상황은 곧 하나님 부재의 상황이라는 점을 직시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조국 유대가 매우 위태로운 주전 7세기 초부터 6세기 말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유대는 주전 597년에 바벨론에 의해 침략을 당하여 무조건 항복하여 멸망을 면하였습니다. 그 때 지도자들은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 후 유대는 애굽의 힘을 빌어 바벨론과 싸워보려 했지만 결국 주전 587년에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왕궁과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습니다.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유대 왕조가 끝났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역사의 격랑 가운데서 활동하였습니다. 나라와 민족이 지리멸렬 되는 상황, 특히 왕조가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전마저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한 그는 조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울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도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유대와 같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씨 조선 500년 왕조가 1910년 한일합병조약에 의해서 막을 내렸습니다. 이곳 북미 대륙에 살던 아메리칸 인디언들도 침략자들에 의해 그들의 족장사가 끝났습니다. 어느 민족에게나 이런 슬픈 역사는 있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눈물을 보면서도 별 마음의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와 우리 사이의 2천 5백년이라는 시간의 간격 때문일 수도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밀접성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감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같은 상황이라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주 특별한 인물입니다. 동 시대에 다른 선지자들도 많았지만 그가 유독 눈물의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조국과 하나님께 대한 생각이 남달랐음을 의미합니다.

시대와 상황에 대한 분별력이나 감성의 차이야 사람마다 다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다 예레미야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중에는 미국의 대선이나 조국의 통일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이들이 있고 별로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나 사회 정의 문제나 환경 문제를 심각하게 의식하고 대처하며 사는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못해도 평범한 일상의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 사는 것도 괜찮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순신처럼 될 수 없고, 안중근이나 장기려, 박윤선, 한경직처럼 살 수는 없지만 각자의 분수에 맞게 자신과 가족, 그리고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하나님 신앙만은 정확하고 확고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분명 우리보다 위대하지만 그도 우리와 같은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예레미야는 사회적 안목이나 정치적 판단도 뛰어납니다. 그런 점도 배워야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겉으로 보면 예레미야는 민족의 슬픈 운명에 슬퍼하고 울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우는 것은 하나님 부재를 슬퍼하고 울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마음에 병이 들었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는 슬프고, 근심에 잠겼고, 위로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런 심경을 마음에 병이 들었다고 한 것입니다. 마음에 든 병이 가장 무섭습니다. 재물과 명예를 잃고는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병이 들면 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태라면 마음에 병이 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없는데도 경제적 실패, 가족의 배신, 불치의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다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극단의 불행을 직접 겪게 되면 마음에 병이 들 수 있습니다. 자살하는 이들은 거의 마음이 병든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불행의 원인을 물리적 환경 때문이라고 보지 않고 하나님 부재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마음의 병이 들어 우는 것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 렘 8: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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