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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을 거짓말쟁이라고 한 에피메네데스와 안창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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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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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임마누엘 칸트의 도덕철학은 조건이 붙는 것, 또는 수단으로 주장되는 것은 가언 명령(假言命令)이고, 조건이 없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고 이성에 부합되는 꼭 필요한 것은 정언 명령(定言命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사업가로 성공하고 싶다면 고객을 정직하게 대하라.”는 조건적인 방식은 가언 명령인데, 칸트는 단지 옳다는 이유만으로 해야 하는 정언 명령만이 도덕적인 명령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게 하라.”는 것이 그의 정언 명령 중의 하나입니다. 이를테면 “나는 필요하면 도적질을 한다.”는 준칙(準則)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도 좋다면 도적질을 하라는 것입니다. 칸트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가 필요해서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도 필요할 때 도적질해도 좋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기가 힘들여 도적질을 해봐야 다른 사람이 내가 훔쳐다 놓은 것을 다시 훔쳐 가버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에게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적놈은 자기 혼자 도적질해야 수지맞기 때문에 절대 모든 사람이 도적질해도 좋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거짓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필요할 때 거짓말을 한다는 준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모든 사람이 필요할 때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런 목적 없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이익을 위하거나 손해나 위험을 피하기 위해 필요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도 좋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칸트가 그의 정언 명령에서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되면 내가 거짓말로 얻은 이익을 또 다른 사람이 나를 거짓말로 속여서 나의 것을 가로 채거나 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레데 사람들이 거짓말쟁이였던 것처럼, 모든 한국인이 거짓말쟁이는 아닐지라도 거짓말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불신이 깊고 불안지수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일상에서 다반사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도 나처럼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러한 불신은 긴장을 고조시키고 불안을 가중시킬 것입니다. 헬조선이라는 자조적 신조어가 이를 증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충동적이기도 하지만 습관적이기도 합니다. 이런 욕망의 특성을 충동적 욕망 혹은 중독성 욕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절제란 그런 욕망을 행동으로 쉽게 옮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 그 외에 권력욕, 명예욕 등 여러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사실은 그 모든 욕망이 마음에 의해 조정되어야 합니다. 식탐의 주체가 나의 배가 아니고, 폭언의 주체가 나의 혀가 아니며, 음란의 주체가 나의 육체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배, 혀, 눈, 몸이 요구하는 욕구는 어느 정도 채워질 수 있지만 인간의 마음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마음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너무도 잘 아시고 주신 은혜의 약속입니다.

 

절제의 철학은 그리스인들이 강조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감정은 육체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육체는 속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육체로부터 나오는 감정도 속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가능한 이성으로 감정을 억제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존경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은 이성을 최대로 활용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지도자는 당연히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철학자가 다스리는 국가를 이상국가로 상상하였습니다.

 

현실적으로 지도자가 감정적이면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리스 철학의 전통 위에 세워진 서양문화는 절제의 덕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동양의 문화는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서양의 문화는 이성과 절제를 강조합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이성적인 사람과 감정적인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서양 국가가 세계를 리드하고 지배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화내는 사람이 지는 사람이듯이 감정적인 동양 가치관으로는 세계를 리드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자녀 교육에서 절제를 강조하여 가르치라고 강조합니다. 잠언에 보면 자녀 교육에 대한 교훈이 많은데, 거의 모든 교훈이 절제에 관한 것입니다. 이기적 감정을 매로 다스리되 죽지 않을 만큼 철저히 가르치라고 합니다. 채찍으로 아이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절제 못하는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심각한 민폐를 발생시킵니다. 그런데 현대 교육학에서는 아이의 기를 살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학교에서 선생이 자기 아이를 꾸짖거나 나무라면 왜 기를 죽이느냐고 항의하는 부모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 부모는 자기 따내는 똑똑하고 유식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무식하기 짝이 없는 부모입니다.

 

스텐포드 대학의 미쉘 교수가 20년 동안 임상실험을 하였는데, 절제를 배운 아이는 성공하고 사회의 지도자가 되지만 절제를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대개 마약이나 강도나 범죄의 길로 빠졌다고 합니다. 미쉘 교수의 그 연구를 스텐포드 마쉬멜로 실험(Stanford Marshmallow Experiment)이라고 합니다. 미국교회에는 예배 시간에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아이가 없습니다. 미국인들은 아이들이 공적 모임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두는 한국 부모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미국 아이들은 부모 옆에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어른들과 같이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것은 절제와 신중의 가치를 강조하는 교육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절제와 신중과 다른 사람을 위해 참는 것이 훈련된 서양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동양인들보다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불교나 유교에서도 절제를 강조합니다. 유교에서는 참지 못하면 인간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불교나 유교나 그리스 철학이나 다 절제를 중요한 인간의 미덕으로 강조하고 가르칩니다. 동서양의 철학이 다 같이 절제를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나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무욕, 즉 해탈을 강조합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인간 욕망을 악하고 속되고 나쁜 것으로 취급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철학이나 동양 철학에서 강조하는 절제와 성경이 가르치는 절제는 무엇이 다를까요? 동서양의 철학에서는 욕망 자체를 악하고 속되다고 봅니다. 따라서 욕망을 제거의 대상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욕망 자체를 악하거나 속되다고 보지 않고 제거의 대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욕망이 없으면 인간 삶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학문과 과학과 문화와 문명은 인간 욕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번식도 욕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식욕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식욕이 없으면 의지가 아주 강한 사람만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생존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성욕이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결혼이 어떻게 가능하며 자녀를 낳는 사람이 지금보다 10분의 1도 안 될 것입니다. 부자 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과 같은 경제 부흥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을 에너지로 하여 작동하는 시스템입니다.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결정적이고 심각한 약점입니다. 인간의 욕망 자체를 악하다고 하거나 속되다고 하여 제거하거나 억누르면 발전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보다 상대적으로 우수합니다.

 

그리스 철학이나 동양 철학은 내가 훌륭한 사람 되기 위해 절제를 필요로 합니다. 불교는 이생에서 절제하고 해탈을 해야 다음 생에 고급한 존재로 환생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음 생에서 고급한 존재로 환생하기 위해 절제를 합니다. 그리스 철학도 절제를 강조하는 것은 내가 훌륭한 인격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즉 이웃을 위해 절제를 하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강조하는 절제와 이방 철학이 강조하는 절제가 다른 점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그룬드만(W. Grundmann)이 헬레니즘의 절제와 기독교의 절제를 잘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헬레니즘의 절제는 절제하는 사람 자신의 우월성을 목적으로 하지만 성경의 절제는 이웃을 위해 절제하라고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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