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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설교 그리고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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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종2018-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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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종 목사(기독교미주성결교)

 

어제 저녁에 인터넷을 뒤지다 학교 다닐 때 같이 공부한 목사, 목회 하면서 만난 목사들의 동향과 그들의 설교 하는 것을 보았다.

 

꽤 규모가 큰 교회에서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친구들이 저 정도였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그들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격어 봤기에 동시에 그들의 이면이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끔 얘기할 때마다 거론하는 성직자 지도자가 갖춰야 할 능력과 자질 덕목 그래서 그가 이끄는 무리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의식과 능력과 안목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기억이 나면서 그리고 그들의 설교에서 여전히 틀에 박힌 설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느껴지면서 어떤 답답함과 맥없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빈궁한 자질과 안목으로 이렇다 할 변화도 생성해 내지 못하는, 자기 자신부터도 자기가 설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설교를, 그래도 목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듣는 사람들의 일상이나 상태와 상관없이 쏟아내야 하는 현재의 목사들의 실상을 조금은 알기에 “이게 뭘까?” 하는 생각에 저 먼 산 너머에 있을 것 같은 진리의 실체와 청명한 본질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이 덜 느껴져서, 또 자신들은 잘한다는 생각에, 또는 생각하는 방식이나 기준이 달라서 열심히 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나 그렇다면 정작 옳은 것 바른 것은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나타나는 현상중의 하나가 객관이 아닌 주관을 중시하는 거라지만 그 주관 너머에 존재하는 객관적 사실과 진실, 옳고 그름은 분명 존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과 실상이 내 눈에는 보이다 보니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나로서는 일선 목회에 있을 때부터 갈증과 쪼들림으로 인한 불편으로 많이 힘들어 하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율배반적이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 선상에 복귀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도 있다.

 

왜 남들 다 하는 걸, 남들도 뭐 그리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데 나만 이렇게 같은 목사 소리 들으면서 이렇게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뿐이고 마음은 단호하다. 무식함의 용감함으로 하던가, 아니면 제대로 하는 것 아니면 내가 말하는 보편적 기준에 미치지 못해 긴장과 불안, 내가 봐도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한쪽 눈 질끈 감아가며 그러나 안그런척 하며 애처롭게 애쓰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자기 깜 량에 맞는 일 하며 속 편이 사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들여다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더 그렇다.

 

또 하나는 그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현재 대부분의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드는 생각 중 하나는 그들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설교와 성경 구절들이 그 자리에서 듣고 있는 사람들 과연 몇 명 정도에게 공감대가 형성될까 하는 것이다.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하나님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확률이 많은데 말은 장로고, 권사고, 몇 십 년을 신앙생활 했네 하지만 사실상 무정란의 신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목사를 포함해서 유정란의 신자가 지금의 숫자만큼 많다면 지금의 이런 교회의 모습은 아닐 거란 생각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유정란의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무정란 교인들에게는 설교 이전에 하나님을 느끼게 해 줌으로서 믿음과 의지를 갖게 해 주는 것이 먼저여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한다.

 

설교 자체도 케리그마는 온데간데없고 훈화도 강해도 아닌 촛점도 없는 남의 다리 긁는 것 같은데다 거부감 들게 하는 멘트들이 설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곤 한다.

 

그런데도 설교 내용에 매달리고 예화에 신경 쓰고 억양 말투 모션에 신경 쓰며, 가장 사랑스런 모습 인자한 모습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이 핵심과 본질 있는 그대로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오히려 불편을 유발하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필요 할 수도, 그런 걸 원하는 수준의 사람도 있겠지만 뭐든지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데 너무 인위적인 것이 많아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베드로가 5천명, 3천명을 회개시킬 때 그런 거 신경 썼던가. 그저 성령에 의존된 케리그마의 선포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지 못하면 차라리 성경의 한 스토리를 읽고 “우리 이 얘기 속에서 이런이런 교훈을 받읍시다” 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의 한 철학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내가 목사들의 설교를 진지하게 들어보려고 여러 번을 애써 봤지만 도저히 5분을 넘기지 못하겠더라” 

 

이유는 핵심인 영성은 보이지 않고 연기하는 모습만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고, 보는 사람은 본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이 외에도 핵심을 지적해 주는 말들, 본질을 일깨워 주는 이론들이 수없이 많은데 목사들의 설교나 교회들의 양상은 전혀 변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책임지지 못할 부도수표의 설교에 아멘 할렐루야의 사인이 난무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무슨 배짱으로 전도를 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부흥회를 하고 선교를 한다고 나서지는지 참 아이러니 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전도라고 하는 것도 보면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정도는 양질이다. “우리 교회 나오세요”다. 다른 교회 나가고 있는 사람까지도 우리교회로 오란다.

 

열심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 좋고 뜨겁다고 하는 것이, 영혼 사랑에 있는 게 아니라 교회 성장과 존속에 있어 보인다.

 

미국 상원의 채플 목사였던 리처드 헬버트 목사는 이런 말을 했다.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해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옮겨 가서는 제도가 되었다. 그 다음에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고 마침내 미국으로 왔을 땐 기업이 되었다”고, 그리고 영화 쿼바디스의 김재환 감독은 한국으로 와서는 재벌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이 기업의 체제 속에서 별 죄의식 없이 생계를 유지하고 호화호식하는 이들 또한 많다. “예수님이 지금 당장 오신다고 하면 아니요 지금 오시면 안 돼요, 지금 오시면 밥줄 끊어져요” 하고 만류해야 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며 무슨 열심이 더 필요 할까. 자숙하는 일과 스스로를 깊게 성찰하고 훈련하고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 외에 말이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당시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내로라하는 지도층과의 충돌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은 기존의 틀에 묶여있고 자기의 주관에 갇혀 있음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필라델피아 

박필종 목사(기독교미주성결교)

ⓒ 크리스찬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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