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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 zero의 십자가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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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7-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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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수요니 공급이니 하는 것은 경제적 용어이지만 현대 사회는 워낙 경제 논리가 강하기 때문에 어느 분야든지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세계 어느 정부나 지도자도 경제 논리에 순응하지 않고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경제 논리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지도자들도 피해 갈 수 없는 전 방위적 영향력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유나 인권이나 정의의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가 중요시 되는 것은 교육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이 지향하는 것은 피교육자인 학생들을 경제적 능력자로 길러내는 것입니다. 경제 논리가 전 방위적으로 온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교회도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교회가 사회보다 경제 논리에 더 취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경제 논리에 휘둘리는 것은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든가 아니면 명분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돈을 섬기는 경우일수가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생기기 전에도 인간에 대한 물질의 영향력은 하나님에 버금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직접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경제적 영향력이 실제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지적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나 자기의 가정이나 자기가 속한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지 아니면 돈에 지배를 받고 있는지 진지하고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에는 경제 논리가 그 어떤 사상과 이념보다 영향력이 큰 것은 모든 사람은 수요자이거나 공급자이거나 또는 시장 구조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교육 등 모든 것이 경제 구조의 톱니바퀴가 되어 돌아가지만 교회는 그러한 패러다임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된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그런 영향으로부터 구별되어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어도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이 경제의 지배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성장이나 부흥을 나름대로 성경적으로 설명하지만 그 성장이론이나 부흥은 다분히 경제 논리를 패러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교회 성장이나 부흥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장이나 부흥 자체를 추구한 결과가 아니고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의 결과입니다. 어떤 원리나 방법이 교회의 성장이나 부흥을 가져 오게 한다는 생각 자체가 성경에 언급된 성장이나 부흥을 오해한 것입니다. 교회 성장 이론의 지배적 사상은 성경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논리와 경영학 이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복음 즉 십자가의 도는 경제학 이론을 빌려 설명하자면 수요가 없습니다. 수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부흥과 성장이 일어나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십자가의 도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복음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복음 자체이신 예수님의 초림에서 극명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초림에 대하여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5, 10-11,3:19)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기록 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십자가 사건과 바울의 전도 사역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1-24). 십자가의 도, 즉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전도의 대상을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대별하여 말하였지만 사실 이 두 부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란 당시 사람들에게 이를테면‘실패한 승리자’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에 도무지 말이 안 되고 납득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그리스도를 원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이나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따르던 청중이나 유대교 지도자들 모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죽어 실패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돌로 떡을 만들 수 있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수 있고, 십자가에서 사뿐히 내려 올 수 있고, 자기를 대항하는 로마를 일거에 자기 앞에 무릎 꿇릴 수 있는 메시야를 기대한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집요하게 그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그리스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와 유대인들이 바라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를 우리가 심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의 바라는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은, 그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바라는 복음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 믿어 대박을 꿈꾸는 이들이 현대 기독교인의 다수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성경적 관점입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았다고 합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미련의 반대는 지혜인데,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철학으로 십자가의 도를 믿는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과학자더러 미신을 믿으라는 거나 다름없는 이야기입니다. 헬라인의 지혜란 현대인에게는 물리학, 자연과학, 심리학, 경제학, 컴퓨터 공학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이런 것을 구하는 것이 바로 헬라인들에게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라야 사람대접을 받았습니다. 현대인들은 문학과 음악과 시를 이해하고, 물리학에 대한 지식도 좀 쌓고, 경제와 정치에 대한 지식도 어느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합니다. 좀 더 수준을 높이려면 철학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할 수 있어야 남에게 얕보이지 않고 돋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지식을 남보다 조금 더 쌓으면 지식인이라는 평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지식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이 아니고 영적 생명도 아닙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자기가 파는 물건의 질과 가격에 대해서 정직해야 하듯이 지식인이 자기의 모든 주장에 대해 학문적으로 논리적으로 정직하고 성실하면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신학도 그런 지혜에 속합니다. 신학 자체가 복음은 아닙니다. 따라서 신학자나 목회자가 자기가 전하거나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 자기가 믿는 내용을 자기가 표방하는 신학이나 교리의 틀 안에서 가능한 순수하고 정직하고 깊이 있게 전달한다면 마땅히 존경 받아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아주 불성실한 신학자나 설교자도 많습니다. 학문에 대해서 정직하고 성실하지 못한 지식인들이 많고 음악이나 문학이나 그림이나 시를 하는 사람들 중에도 자기 전문 분야에 대해 왜곡된 이해와 정직하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정치 경제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과학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신학과 목회도 그렇다고 봅니다.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 정직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불이익을 피하고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거짓이 불이익을 피하고 이익을 얻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불이익을 피하고 이익을 얻는다 해도 그것은 진정 불이익을 피하는 게 아니고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열정적이고 성실한 것 같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는 사람들을 가짜 복음에 귀 기울이도록 유혹하고 설득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참 복음 즉 십자가의 도는 수요가 제로입니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십자가의 도는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울은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대표되는, 십자가의 도를 원하지 않는 인간에 그 자신을 포함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 자신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롬 7:19)라고 한 것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한 것은 그의 본성이 십자가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혹시 바울이 설마 그랬을까 라는 의구심이 드는 이들은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도를 싫어하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좋아서 듣는 복음은 십자가의 도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설교도 십자가의 도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복음이 사람들의 수요에 따라 전파되고 사람들이 믿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를 듣고 믿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고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시지는 십자가의 도를 왜곡한 가짜 복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얼마나 싫었으면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했을까요? 날마다 죽는 경험 가운데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평안과 기쁨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십자가의 도가 즐겁고 기뻐하며 갈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하셨던 것입니다.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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