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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교회 무엇이 더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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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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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사람들은 흔히 고대인들보다 현대인들이 더 악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반대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가 더 악하냐 하는 것은 시대로 구분하여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고대에나 현대에나 악한 사람도 있고 또한 덜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더 악하거나 덜 악한 것이 고대나 현대로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시대는 다른 시대보다 더 악하거나 덜 악한 경우는 있습니다. 현대사를 살펴보면 50-60년대보다는 지금이 더 악하다고 할 수 있고,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는 지금보다 더 악한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사를 배울 때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는 것이 가장 악한 것이라고 배웠는데, 지금은 교회가 어떤 면에서는 세상보다 더 악한 측면도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보다 민주의식이 부족하기도 하고 재정 운용 또한 세상보다 어둡고 구린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교회가 세상보다 악한 측면입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악하게 되면 존재 자체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악한 세상에서 구별하여 불러내어 특별하게 보호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세상보다 더 악하다면 교회(에클레시아 ἐκκλεσία=~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는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맛 잃은 소금처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악하게 되는 것이야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까 필연적인 결과이지만 교회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악하게 되는 것은 이중적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교회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시민의식이 부족하고 준법정신이 미흡하고 재정 운용이 어둡고 구리다면 법과 윤리 도덕적 기준으로도 악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기에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지경에 이르면 세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수준의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기도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나쁜 놈이 좋은 말 하는 것처럼 역겹게 느껴질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이 악하지만 초대교회가 처했던 시대에도 세상은 악했습니다. 또한 지금의 교회 수준이 세상만 못한 부분이 있지만 초대교회 수준도 그런 면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불러냄을 받았지만 불러냄을 받은 그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못합니다. 현대 교회 안에 세상 문화와 가치관이 침투해 들어와 있듯이 초대교회도 그 시대정신과 문화에 심각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경우 교회나 하나님 나라 백성이 우선적으로 관심을 쏟아야 하는 곳은 세상보다 자기 자신과 교회입니다.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지역과 그 시대의 악에 대하여 비판하기보다 먼저 십자가의 도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십자가의 도만 믿고 십자가의 도만 전하되 십자가의 방법으로 전하고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데살로니가, 아덴을 거처 고린도에 갔습니다. 이 때가 주후 51-52년경입니다. 아덴은 철학과 우상의 도시입니다. 철학과 우상은 서로 상충하는 것인데 그곳 사람들은 그 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철학과 종교가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면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이성의 영역에 속한 것이고 종교는 이성적 영역을 넘어서는 것으로 지난 2천여 년 동안 서로 대립해 오고 있습니다. 고대 희랍에서는 철학과 종교가 매우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가서 받은 첫 인상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철학과 종교를 비판하며 복음을 철학적인 방법으로 설명을 해 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읽어보면 바울이 상당히 철학적 논리로 하나님과 복음을 증명하려 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전도해서 교회가 세워졌지만 아덴에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아덴을 떠난 바울이 다음으로 간 곳이 고린도입니다. 고린도는 아덴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시입니다. 아덴이 철학의 도시였다면 고린도는 로마제국 안에서 정치적이고 상업적인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고린도의 인구는 20만 명으로 아덴보다 20배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아덴에서 남서쪽으로 5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린도가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주전 46년경에 많은 공을 들여 도시 전체를 재건축하였습니다. 로마가 막강한 정치 경제적 힘으로 재건한 고린도는 로마제국 안에서 가장 화려하고 활발한 도시가 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고린도는 그 시대에 가장 사람이 많이 몰려들 만큼 매력적인 도시라는 뜻입니다. 고린도가 매력적인 도시라는 말은 경제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는 도시라는 뜻도 됩니다. 어떤 신학자는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간 것은 ‘보스톤을 떠나 라스베가스로 간 것과 같다’(It was as though Paul had left Boston and had landed in Las Vegas)고 하였습니다. 고린도는 부와 사치를 추구하는 도시였고 상업이 활발했으며 여러 종족들이 몰려들어 여러 문화와 종교가 뒤섞여 있었으며, 모두가 익명성이 보장하는 도시 문화와 선정적 종교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의 가장 유명한 신은 아프로디테였는데, 아프로디테는 가장 저열한 형식과 방탕한 열정의 사랑의 여신입니다. 이 종교는 관능적인 호색을 신성시하였으니까 그 신을 섬기는 현상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폴로의 신전이 아크로-코린투스 산 북쪽 언덕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곳에 세워 놓은 아프로디테 신상 앞에는 천명의 젊은 여성들이 고급 매춘부 또는 공적인 매춘부로서 그 직무를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외국인들이 이곳을 찾았기 때문에 고린도는 종교를 빙자한 합법적 매춘 업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화 되다”(Corinthianize)라는 동사는 ‘성적으로 문란해지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고린도인처럼 굴다’(to act like a Corinthian)라는 말은‘간통하다’(practicing fornication, adultery)라는 뜻으로 쓰였고, ‘고린도 아가씨들’(Corinthian girls)이란 말은 ‘관선매춘부’(designated harlots)라는 뜻입니다. 소위 ‘위안부’라는 뜻입니다. 이런 용어들이 생겨난 것만 봐도 당시 이 도시의 부도덕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린도라는 도시의 타락상보다도 자기 자신의 복음에 대한 태도에 대해 더 심각하게 고민하고 결심했습니다.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갔을 때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하였습니다(고전 2:3). 그가 무엇인가 몹시 두려워 떨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십자가의 도’만 알기로 작정하였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단순한 인식의 차원이 아닌 믿음의 차원을 의미하고 믿음은 경험의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철학이나 사상이나 어떤 이념이나 지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만 믿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심의 배경에는 아덴에서의 경험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 철학적 방법으로 복음을 설명하려 했었는데, 고린도에 갔을 때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한 것은 아덴에서 철학적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했던 것을 의식한 설명이라고 짐작하게 합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은 철학적 방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종교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쏟았습니다. 철학은 이성과 사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우상은 초이성적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 아덴 사람들은 서로 상충되는 두 영역에 대해 그렇게도 집착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과학자가 미신에 관심을 쏟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이 볼 때 이런 아덴 사람들은 자기들의 철학적 논리로도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이기에 그러한 아덴 사람들을 그들의 논리로 비판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 자신이 아덴에서의 복음 전도를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명시적으로는 언급한 바가 없지만,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가서 한 진술로 미루어 짐작하면 다시는 그런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결심은 그리스도인이나 교회의 우선적인 일이 세상의 어리석음과 악함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태도에 대하여 돌아보고 점검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마땅한 태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어리석거나 현저하게 악할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분노하며 그들을 비난하고 비판하느라 우리 자신의 약점과 수준에 대하여는 자칫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게 될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약점과 수준을 위장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상을 비판하는 일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가 그렇게 악하고 부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비판하지 않고 자신을 비롯한 교회를 향한 십자가의 도의 엄중함을 강조 하였습니다. 세상과 교회 중 누가 더 악하고 부패한가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심을 집중해야 할 우선순위가 어디인가를 간파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단들이 설치고 세상의 악이 아무리 관영 해도 십자가의 도에 대한 앎과 증거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믿어야 할 내용임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전제할 때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도를 기쁘게 자원하여 선택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어리석고 간교한 인간은 엄중한 십자가의 도를 노골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약간 비껴가거나 왜곡하면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좁은 문, 좁은 길이기에 찾는 자가 적다고 하였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 1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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