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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부끄러운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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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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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어린아이는 배가 고프면 웁니다. 배가 고프면 웃지 않고 우는 것은, 웃는 것은 만족의 표현방식이고 우는 것이 불만의 표현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배고플 때 울고 만족할 때 웃는 것은 만족과 불만족에 대한 본능적 표현방식입니다. 왜 본능은 그렇게 반응하도록 되어 있느냐를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질문입니다. 본능은 본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지 그 이유는 아무도 규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설명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본능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점점 자라서 어른이 되면 만족과 불만족에 대해 직접적으로 울거나 웃지 않고 그 본능적 감정을 상당할 정도로 억제하고 조종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건강하고 정상적인 태도입니다. 그런데 성인들은 만족이나 불만족에 대한 본능적 감정을 억제하고 조종하기도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 때문에 인간과 사회의 문제는 아주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에서 그 사람의 정직성과 성숙도가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사람들의 그러한 정직성과 성숙도는 삶의 질과 사회의 수준을 결정하게 됩니다. 성인들은 다른 사람이나 사회나 조직이나 환경에 대하여 불만과 비판과 비난과 심지어 증오심까지 드러내기도 합니다. 정직하지 않은 자기감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철학과 사회과학과 지식과 경험과 정치와 경제까지 동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표면적으로 제기되는 인간과 사회와 제도의 문제들은 원인을 파악하기가 어렵게 될 뿐 아니라 아무도 책임 질 수 없게 되어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고 냉소적이 되게 합니다. 현대 사회는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그와 같은 불신과 냉소가 점점 심화 되고 있습니다. 어느 정부도 타락한 인간의 정직하지 못한 본능적 감정에 대한 표현들이 만들어 내는 불신과 냉소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만나 사건은 이러한 인간과 사회 문제에 대해 의미심장한 교훈을 줍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중 시내 광야에서 지내는 40년 동안에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양식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만나를 얻게 되는 과정이 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정상적이지 않은 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양식을 구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만나를 내려 그들이 먹고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해서 만나를 얻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대강 훑어보면서 우리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미디안 광야까지 왔습니다. 애굽을 빠져 나오기까지도 순탄하지 않았지만 미디안 광야까지 오는 과정은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큰 출애굽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겠다는 제안을 애굽의 바로 왕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고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관철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내린 열 가지 재앙입니다. 재앙이 너무 극심하니까 바로가 항복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 보냈습니다. 보내놓고 생각하니까 괘씸합니다. 그래서 바로가 군대를 이끌고 애굽을 빠져나가는 이스라엘을 추격하였습니다. 추격하는 바로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만난 지점이 홍해 바다 앞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꼼짝 없이 붙잡혀 애굽으로 돌아가야만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세와 아론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은 처형될 것이고 백성들은 전보다 더 극심한 강제노동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히 건너게 하셨고 뒤따라오던 중무장한 애굽의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수장되었습니다. 이 장면이 바로 출애굽 사건의 클라이맥스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를 무사히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건너편 언덕에서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축제를 벌였습니다. 늘 두려움의 대상이던 애굽의 군대가 그들의 눈앞에서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위대한 일이라고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였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독자들도 이 대목에서는 통쾌감에 속이 후련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언제나 문제는 성공이나 승리 다음에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도 괴롭히던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서 몰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적으로 건넜습니다. 온 백성이 너무 기분이 좋아서 춤추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분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매일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아니고, 매일 원수가 죽는 것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인생사가 이와 같습니다. 일이 잘 풀려서 기쁘고 신나는 일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듯이 행복은 순간이고 고통은 깁니다. 성공과 승리의 기쁨은 곧 시들해지고 맙니다. 다음 순간 눈앞에는 언제나 염려와 걱정이 가득한 일상이 펼쳐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감격과 감사와 노래와 춤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는 해결해야만 할 일들이 첩첩이 쌓여 있었습니다. 당장 한 발 내 딛는 것부터가 불확실과 곤란과 어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성경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었던 곤란과 어려움을 세세하게 다 기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을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문제들이... 소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불편하고 부족하고 곤란한 것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훈련되지 않은 그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이동하면서 얼마나 많은 혼란과 시비가 발생했을지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처럼 살았지만 애굽은 기름진 땅이고 물자가 풍족해서 별 어려움 없이 살았습니다. 그곳에 산 세월이 400년이 되었으니 타향이라는 생각도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곳이 내 나라이고 내 집이라고 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물론 신분의 차이로 인하여 당하는 부당한 대우가 불만이었겠지만 나름대로 그런 생활도 익숙해졌을 것입니다. 이곳 미국에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우리들과 어떤 면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으신 분들도 있지만 이대로 이곳에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을 것입니다. 해방이다 뭐다 해서 모세를 따라 나왔다가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하루하루가 막막했고 애굽을 떠난 것이 후회막급입니다. 해결의 기미도 없이 그런 일상이 반복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이 노골적으로 폭발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

 

이 원망과 불평이 극단적이 되었습니다. 이곳 광야보다 애굽에서 살았으면 더 좋았겠다 가 아니고 애굽에서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게 오히려 더 좋았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 이렇게 마음이 강퍅하게 됩니다. 이 대목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어려움은 누구나 어디서나 겪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만 겪는 게 아닙니다. 애굽에서 그냥 살아도, 출애굽을 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 어려움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이 한국에 살았어도, 이곳 미국에 와도 어려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렇게 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믿음의 태도는 더구나 아닙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신경질을 부리고 화를 내는 것은 불신앙의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우리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 해 봅시다. 그리고 진지하게 대답해 봅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지금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화장실도 없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샤워는 고사하고 마실 물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고... 부족하고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편합니다. 앞이 캄캄하고 막막합니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주 실제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봐, 내가 오지 말자고 했잖아? 이제 어떡할 거야? 당신이 책임져! 내 이럴 줄 알았어! 당신 때문에 되는 게 없어! 당신 하자는 대로 해서 잘 된 게 뭐 있어?’이렇게 할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사람 원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원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차치하고 상식만 있다고 해도 어려울수록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고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불신앙이 어디에서 나타나는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공산당이 와서 총구를 들이대고 너 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그럴 일은 우리 평생에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의 불신앙은 일상에 대한 사소한 불평과 원망에서 드러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동안에는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의 손길에 대해 생각하지 못합니다. 원망과 불평에는 예의나 인격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향하여 모든 것이 당신 책임이니까 당신이 책임을 지라고 합니다. 이게 가장 못난 사람의 전형입니다. 일어난 문제나 당면한 어려움은 함께 풀어나가야지 상대에게나 지도자나 환경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소인배의 태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도자로서 가장 어깨가 무겁고 스트레스가 극심한 사람은 지도자 모세인데 ‘당신이 책임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는 국가나 지도자가 책임 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 불만에 대한 본능적 감정을 교묘하고 그럴듯하고 마치 대의명분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여 지도자나 제도나 환경에 대한 비판과 불평만 합니다. 그런 비판과 불만은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렇게 거짓되고 악하게 불평하고 원망해도 때때로 그 욕구를 들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먹여 살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부끄러운 방법과 과정을 통해 만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베푸신 은혜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부끄러운 은혜입니다.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출 16: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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