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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윤리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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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7-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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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인간의 행위는 다른 동물의 행위와 달라서 윤리적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윤리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행위를 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윤리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밝혀야 합니다. 앞 글에서 벤담이나 밀의 공리주의를 잠깐 언급하였습니다. 공리주의는 윤리적 행위의 목적을 밝히는 이론입니다. 즉 인간은 왜 윤리적 행위를 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입니다. 인간은 행복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윤리적 행위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공리주의를 쾌락주의와 함께 결과주의의 형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공리주의(Utilitarianism)는 사람들이 인간 복지 혹은 행복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것이고, 쾌락주의(Hedonism)는 사람들이 인간의 쾌락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윤리적 올바른 선택이란 최대의 행복을 산출하는 것이고 또한 다수에 대한 최소한의 불행을 산출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행위는 오직 결과에 의해서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고, 둘째, 결과 평가의 유일한 기준은 행위에 의해 생겨날 행복과 불행의 양이며, 셋째, 행복이나 불행의 양을 계산할 때 어떤 사람의 행복도 다른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계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작동하는 윤리는 공리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가 생겨난 시대적 배경은 영국의 시민 혁명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새로운 시민계층이 생겨났고 그 시민계층의 자유와 평등사상이 18세기 영국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영국의 시민, 산업혁명은 개인들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었고 그 사회를 자유로운 경쟁의 상태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 경쟁은 개인 간의 갈등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러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도덕과 법의 재정비를 요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영국의 법학자요 철학자이며 변호사인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1748. 2. 15~1832. 6. 6)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를 주창하였습니다. 벤담과 함께 공리주의 학자로 대표되는 존 스튜어트 밀(James Mill: 1773-1836)은 벤담의 제자 제임스 밀의 아들로서 걸출한 공리주의 철학자입니다. 벤담은 자유경제를 주장하였으며, 정교분리와 표현의 자유, 양성평등, 동물의 권리 등을 주장했습니다. 무엇보다 벤담은 법과 도덕은 쾌락을 늘리고 고통을 감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보통 선거, 비밀 투표 등을 주장하여 세계 각국의 법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벤담에 의해 제시되고 밀에 의해 정밀화된 공리주의는 18세기의 쾌락주의적 철학은 물론 고전적 철학을 기반으로 형성된 계몽사상이 얼마나 전통, 신의, 초월적 영감, 그리고 그와 같은 불명확한 관념들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이념이나 철학을 공부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런 주장들이 어떤 근거에서 무엇을 지향하며 비록 명시적으로 지향하지는 않지만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인간은 모든 사상이나 이론이나 철학이나 역사도 인간이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공리주의자들은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즉 모든 법률과 제도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쾌락)이라는 일반적 목표에 대한 유익성 혹은 효용성(공리주의)을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벤담은 그의 <도덕과 입법 원리 序說>(Introduction to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1789)에서 “자연은 인간을 두 개의 절대적 지배자인 고통과 쾌락의 지배하에 두었다.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그것들에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현존하는 모든 체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므로, 도덕 및 공적 법률에 관한 모든 현존 제도는 폐지되고 행복의 증진과 영속화에 더 유용한 제도로 대체되어야 한다며 공리주의를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벤담은 다음과 같은 공리주의의 올바른 행위의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였습니다. “공리성의 원리는 어떤 행동이 관련 당사자들의 행복을 증가시키느냐 감소시키는 것처럼 보이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행복을 촉진하는가 저해하는가에 따라 모든 행위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원리를 말한다. 나는 어떠한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행동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개인의 모든 행동뿐 아니라 정부의 시책에 대해서도 이 원리는 적용된다.”이것이 바로 벤담이 주장한 최대행복의 원리입니다.

     

공리주의의 원리는 흄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흄은 그의『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에서 인간은 정념의 노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정념이나 욕구에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을 철학이나 과학적으로 탐구하면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타락한 인간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흄에 따르면 선과 악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감정의 쾌나 불쾌이고, 어떤 대상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는다면 도덕적으로 승인할 수 있고 불쾌를 얻는다면 부인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흄의 철학에는 하나님과 성경의 절대 권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대가 부정된 상황에서 즐거움은 유용하고 유용하다는 것은 나의 쾌락을 충족시켜준다는 뜻이며 이를 근거로 벤담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단지 효용성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효용성은 자본주의의 지배적이고 핵심적인 가치입니다. 자본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효용성의 가치를 양보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효용성이 궁극적 가치인 행복에 이르게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효용성의 가치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효용성의 가치가 절대적인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도 자본주의처럼 효용성의 가치를 우선 가치로 취급한다면 산상보훈이나 수많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폐기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교훈은 거의가 효용성의 가치와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원리는 받기 위해 주고 높아지기 위해 낮아지고 존경 받기 위해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러한 가르침을 효용성의 원리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명령하실 때 우리는 그 명령이 옳고 정당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이나 정이나 옳은 것보다도 높은 분이고 철학적으로 설명하면 상위개념입니다. 기복신앙이란 바로 이러한 가치의 우선순위와 질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윤리적 행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리주의를 목적론적 윤리라고 합니다. 목적론적 윤리의 반대편에 의무론적 윤리가 있습니다. 의무론적 윤리란, 예를 들어 정의가 당위라면 어떤 목적을 위해서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 자체가 옳기 때문에 실천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주창한 이론입니다. 공리주의가 행복이라는 비윤리적 가치에 도달하기 위해 윤리적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칸트는 이기주의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공리주의나 의무주의가 다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지만 공리주의보다 칸트의 의무주의가 상대적으로 성경에 더 가깝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론이 그렇듯이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도 그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너무 멀리 나가고 말았습니다. 의무론적 윤리는 이를테면 측은지심으로 동정을 베푸는 행위까지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왜냐하면 측은지심이란 동정을 베푸는 행위를 통해서 자기의 측은지심을 만족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이기심의 심층적 활동까지를 경계하는 것이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가난하거나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까지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면 인간 감정의 순기능까지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감정 주도적 행위를 경계하지만 감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희로애락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성을 주셨지만 희로애락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도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슬픈 일을 만나면 슬퍼하고 기쁜 일은 기뻐하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입니다.

     

칸트의 의무론을 당위론적 윤리라고 하는데 기독교 윤리도 당위론적 윤리로 분류합니다. 당위론적 윤리를 성경의 가르침과 기계적으로 일치시킬 수는 없지만 큰 틀에서 목적론적 윤리가 아니라는 면에서 그렇게 분류합니다. 기독교 윤리는 당위론 중에서도 또 다시 본체론과 신명론(혹은 신의론)으로 나누는데, 가톨릭은 본체론이고 개신교회는 신명론입니다. 본체론은 하나님 이외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신명론은 하나님 자신이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당위론적 윤리란 이를테면 무엇을 목적으로 하여 윤리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옳기 때문에, 즉 그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명령들이 언뜻 보기에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깊은 뜻을 심층적으로 더듬어 보면 당위론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을 잘 지키면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까 그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명령은 목적 지향적이 아니라 당위적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같은 사실을 깨달은 고백들이 많습니다. 다니엘의 고백이 그 사실을 깨달은 가장 유명한 고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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