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윤리④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이곳은 2017년 이후에 올려진 글입니다. 이전에 올려진 오피니언 글은 지난 오피니언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오피니언

기독교와 윤리④

페이지 정보

황상하2017-05-22

본문

0d81a9612451ef397ba58a5eb9c4f861_1489420213_44.jpg한국에서는 우익과 좌익이 서로 상대 진영의 주장과 정책 때문에 법치가 무너지고 안보가 위태하며 경제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심화되고 국격이 떨어져서 나라 꼴이 말이 아니고 그래서 살고 싶지 않은 나라라는 의미로 “헬조선”이니 “이게 나라냐?” 등의 자조(自嘲)의 말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헬조선”이나 “이게 나라냐?”가 사실이라고 해도 외국에 나와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런 태도가 누워서 침 뱉는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런 말을 만들어 내는지, 물리적 폭력보다 언어의 폭력이 더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는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런 말을 만들거나 사용하는 이들의 행위는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악한 말이나 행위로 건전한 사회적 수준을 해치는 자들을 향하여 똑 같이 악한 말과 행위로 비난하거나 대응하는 것은 자기가 비난하는 대상자보다 더 나쁜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언행을 하는 자는 그것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비난하는 자는 악한 언행이 나쁘다는 평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이나 행위가 윤리적이 되려면 특정 상대나 불특정 다수를 충분히 배려해야 합니다. 거짓이나 불의에 대해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이고 합리적 설명을 통해 설득해야 합니다. 물론 거짓이나 불의가 극단적 폭력성을 띨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칼이나 총을 든 강도가 집안에 침입하여 가족을 위협하는 극단적인 경우라면 폭력적 대응도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일반적인 경우인지 극단적인 경우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양심과 교양과 법과 관습과 사회적 통념을 따라야 할 사항입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일반적인 것을 극단적인 것으로 판단하여 폭력적 언행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기서 수준이 낮다는 것은 단순히 학문적 수준이 아니고 인격적 수준을 뜻합니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상당히 많은 학자들까지도 집안에 침입한 강도에게 대처하는 방법을 문제 삼아 강도가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일조를 하는 형국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한민국 근 현대사를 이해하는 것도 그렇고, 안보 문제, 국정교과서 문제, 환경문제, 경제문제, 동성결혼 문제, 인권문제까지도 그렇습니다. 강도가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친다고 강도와 함께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이 옳은 일이나 좋은 일을 한다고 설칠 때 매우 사려 깊게 살펴서 판단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은 기독교계에서도 있는 일입니다. 건전한 교회가 복음을 왜곡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이단에 대처할 때 이단 비슷한 자들이 극성스럽게 앞장서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단의 활동에 단호히 대처하는 일은 모든 교회가 힘써야 할 일이지만 이단 비슷한 이들이 이단에 단호히 대처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므로 자기들이 마치 교리적으로 건전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른 폐해가 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와 교계에서 볼 수 있는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교활한 사람은 겉으로는 교양 있고 건전한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사악한 목적을 숨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국가나 한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모든 구성원들이 사회적 약속을 잘 지켜져야 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인위적 질서입니다. 자연 질서는 누구나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돌멩이가 얼굴을 향하여 날아 올 때 피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자연 질서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자연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우선 자신이 손해를 보기 때문에 누구나 잘 지킵니다. 법이나 관습이나 전통 같은 것은 인위적 질서입니다. 인위적 질서는 지키지 않아도 당장 나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길게 보면 손해가 되지만 당장 손해가 없고 또한 그 손해가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지기 때문에 미미하게 느껴져서 인위적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태도를 아주 어리석은 태도라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가능한 인위적 질서를 어기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 지혜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미미한 악영향들이 누적되면 정치와 경제와 학문과 문화와 사회 모든 부분에까지 가치 질서를 무너지게 합니다.

 

새삼스럽지만 우리의 선배들이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 봅니다. 왜 우리는 사회적 약속과 보편 가치를 지켜야 할까요? 왜 그런 것이 존중 되어야 할까요? 그런 것을 안 지키면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질서가 무너지면 무질서하게 되고, 무질서하게 되면 내일을 예측할 수가 없고, 예측이 불가능하면 불안하고, 불안하면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지표상으로는 꽤 괜찮은 나라지만 “이게 나라냐?”, “헬조선” 등으로 묘사되는 것은 또 다른 여러 지표들, 이를테면 자살, 이혼, 거짓말, 위증, 사기, 무고 등등.. 때문일 것입니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위적 질서를 지켜지지 않으므로 그 피해가 미세먼지나 안개처럼 미미한 것 같아서 아무도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는 도무지 손을 쓸 수 없는 암처럼 되었습니다. 경제적 지표나 교육적 수준으로는 살기 좋아야 할 대한민국이 헬조선이 된 것은 상당한 시간 동안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사회의 모든 부정적 현상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시계의 시침처럼 서서히 진행되어 오늘날의 부끄러운 부정적 각종 지표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윤리학에 공리주의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선한 행위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더 나은 어떤 목적을 위해 선하게 행동해야 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의 대표적인 학자는 J. Bentham과 J. S. Mill입니다. 공리주의의 목적은 행복이고 그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도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개인이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모두가 행복해 지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니까 공리주의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공리주의란 인본주의적 행복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얻기 위해 도덕이나 윤리를 수단으로 취급하는 이론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불편한 심기를 느끼게 됩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도 행복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행복 그 자체가 도덕적 가치는 아닙니다. 도덕적 가치는 선한가 혹은 악한가 하는 판단 기준입니다. 공리주의는 윤리나 도덕적 가치가 아닌 행복을 얻기 위해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윤리나 도덕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모순인 것은, 윤리나 도덕은 타자 지향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윤리나 도덕의 핵심인데 윤리와 도덕을 자기의 행복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 윤리나 도덕은 처음 전재한 윤리와 도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윤리나 도덕을 강조하는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거짓과 불의가 지배적이 되는 이유는 수단화해서는 안 되는 윤리와 도덕을 수단화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가치를 인간의 행복에 두게 되는 모든 인본주의적 이론은 이와 같은 모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공리주의는 도덕 외적 가치를 위해 도덕을 수단화해야 되는 모순에 직면하였지만 그것을 해결할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함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지만 공리주의는 최고의 가치를 다른 것에서 찾을 수 없고 찾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 이외의 모든 것은 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설명을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즉 “왜 우리는 행복해야 하는가?, 불행하면 어떤가? 왜 굳이 행복해야만 하는가?” 여기에 대해 J.S. Mill은 설명하기를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는 이론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처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데, 자연적으로 추구하게 되어 있는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당위적인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윤리란 당위적인 행동인데, 당위란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면 당위적인 행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자연주의 오류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과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 여러 사상과 학문과 문화가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된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만든 그 어떤 이론과 제도도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고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비로소 행복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사실을 전재하지 않는 그 어떤 대안에 대해서도 성경은 비판합니다. 역사를 통해 그 같은 문제들에 대한 임상실험의 많은 결과들이 나와 있습니다. 인류는 행복을 기대하며 실험했지만 불행의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매우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바른 대안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또 다른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오피니언 목록

게시물 검색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안내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