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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과 사순절 소고(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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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연201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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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우리 교회 주보에 'Ash Wednesday'라며 모두 엄숙하게 지키라는 예전에 볼 수 없던 문구가 있던데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한 의미가 있나요?" "글쎄, 우리 개신교에서는 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다종교 문화가 대세인지라 아마 개신교에서도 천주교의 형식을 이전보다 더 많이 따르려는 것이겠지." 장로교회를 다니는 여동생과의 전화 내용이다. 그렇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나 사순절,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고통의 순간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뜻의 기념일을 나무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480e23836a3b5bc79a720057cd8f90a1_1488812569_28.jpg다만, 천주교회에서 하는 모든 절기를 무조건 따라하는 개신교회가 늘어나고 다른 교회가 다 하니까 우리 교회도 해야 한다고 하는....내면을 가다듬기보다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일,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김질하기보다는 거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행태를 성도님들이 알게모르게 도입하고 점차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과 십자가를 이마에 긋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순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형식과 외적 지향적인 신앙생활의 결과물에서 벗어나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과 그 의미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 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 : 19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준다. -'매일의 미사' 중에서. 

 

성경에서 인간은 흙(dust)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 흙에서 나왔기에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맞다. 그런데 재(Ash)와 흙(dust)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억지해석일 뿐이다. 재를 태워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것으로 회개의 상징이 된다고 하니, 개신교에서 자란 나의 눈에는 어이없는 우상숭배로밖에 보이질 않는데, 문제는 그런 형식을 따라 한 줌의 재를 가지고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개신교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얼마전에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재는 아니라지만, 기름을 가지고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예식을 자신도 하고 다른 이에게도 강조하여 물의를 빚은 것을 안다. 이렇게 절기에 치우치고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탓에 결국은 이단에게 핍박할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십자가를 마음속에 새긴다면 또 모르겠지만...유행을 따라 행하는 것이 과연 우리(성도)가 행할 일인지.... 

 

금식(禁食)과 금육(禁肉 

 

‘재의 수요일’에 모든 신자들은 금식재와 금육재를 의무로 지킨다. 금식재[禁食齎]란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점심식사는 평소대로 하되 저녁식사는 요기 정도만 하는 것을 말한다. 금육재[禁肉齋]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재의 수요일과 모든 금요일에 지켜야 한다. 금식재는 만 18세 이상 60세까지, 금육재는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킨다. ​ 

 

가톨릭 신자가 금식재와 금육재를 동시에 지켜야 하는 날은 ‘재의 수요일’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둔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틀이다. 십자가의 길: 천주교 성당이나 성지에 가면 예수의 수난을 소재로 한 14개의 조각을 볼 수 있다. ‘14처(處)’라 불리는 이 미술품은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 중 하나인 ‘십자가의 길’을 위해 설치된 것이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14개 사건을 묵상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1-2세기 신자들이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타 언덕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지나간 길을 따라 걸으며 기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아무 때나 할 수 있지만, 특별히 사순시기 매주 금요일과 성 금요일에 하도록 권고된다.  - [사순절, 사순시기 의미] 중에서 

 

이마나 머리에 재를 뿌리는 형식,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가 아닌, 교회의 법으로 제정하고 의무로 금식을 해야하는 것이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일까?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질 않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 2: 12-13)  

 

그렇다. 우리는 이 사순절의 참된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사순절이 되면 그리스도의 그 모진 고난을 기억하면서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진심으로, 마음을 찢는 듯)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형식과 절기에 얽매이고 마음은 따로라면....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실까? 

 

나는 아주 오래 전,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곳, 예루살렘 성지를 둘러 볼 아주 좋은 기회를 얻게 된 적이 있었다. 모든 순례객이 다 그러하겠지만, 예루살렘의 수많은 성지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다는 전설이 담겨 있는 숭고한 길,“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걸으며 올라 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 직접 가 본 결과, 안타깝게도 “비아 돌로로사”는 더는 그 고귀한 십자가의 길, 순결한 "눈물의 길"이 아니었음을 보고 참으로 유감스러운 맘 금할 길 없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비아 돌로로사” 란, 원래 라틴 어로 “슬픔의 길”, “눈물의 길”이란 뜻이 담겨 있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다.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체스카”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며 18세기와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는 확증된 장소이기도 하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을 따라 ‘프랜체스카’ 수도원 측에서는 14개의 처소를 세워 놓고 예수님의 행적을 기념하고 있었다. 

 

순결한 눈물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벌거벗기운 채, 

갈기갈기 찢기셔야만 하는 고난의 길, 

갈보리 산을 향해 끌려가는 눈물의 길, 

 

언약의 살을 찢는 대못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핏덩이 위에는 

 사막의 파리떼가윙윙대며 들러붙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23: 39) 

같이 달린 비루한 행악자의 조롱과 야유, 

유대인들의 침 뱉음과 멸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볕 태양 아래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 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고, 

‘목마르다!’ 

절규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메마른 입술엔 

 물 대신 쓰디쓴 신 포도주가 주어졌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리스도의 그 

 화해의 눈빛, 

사랑의 눈빛, 

용서의 눈빛은 외면되어지고 

 가시로 엮은 면류관에 찔려 흐르는 선혈 

피눈물 되어 두 뺨을 적시고 있습니다. 

 

많은 황소들과 바산의 힘센 소들과(시편22: 12) 

개들이 (시편22: 16) 둘러 진쳤으며,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마저 찢어 나누며 

(시편22:18)낄낄거리는 데, 

 

그리스도께서 

“포기하겠노라.” 한마디만 하시면… 

그 치욕의 십자가를 당장 박살 내어 버리려고 

 하늘에는 12 영이나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이 

 항오를 펼치고 기다려 섰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의 모든 죄악을 한몸에 걸머지신 그분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고통보다, 십자가에서 찢기는 고통보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요, 모진 형벌의 순간이었습니다. 

 

캄캄한 하늘을 찢어 놓을 듯 흑암을 가르고 번득이며 

 달리는 번갯불과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외면해야만 하고, 

희생제물로 내어 준 어린양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성부 하나님의 신음 소리요, 피맺힌 절규임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사탄에게 속박되어 끌려가는 너와 나의 죄, 

억겁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 시켜주기 위해 

 피눈물 흘리며 걸어 가셨던 길, 

순결한 길 “비아 돌로로사”입니다. 

 

변질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좁은 시장골목인 예루살렘의 올드시티에서 벽에 숫자로 표시되어 있는 14개의 장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다 쓰러지셨다고 표기된 곳, 여인들이 땀을 닦아 주었다고 표기된 곳, 예수님의 발자국이 닿았다고 하여 발자국이 파여져 있는 바위를 가져다 놓은 곳도 있었다. 좁은 길 양편에는 각종 싸구려 품목들이 즐비하게 쌓여져 있었고, 순례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장사꾼들의 눈은 탐욕으로 번득거렸다. 이것을 바라보며 필자는 이 거룩한 길, “비아 돌로로사"의 진정한 의미, 예수님의 숭고한 고통이 느껴져 울기보다는 장사꾼들의 찌든 상혼에 가슴이 찢어져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을 향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 하시며 장사꾼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신 주님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랬다. 이 길은 더 이상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숭고한 그 “비아 돌로로사”가 아니었다. 

 

거룩하고 순결해야만 하는 그 길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이제 각종 이권에 얼룩지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길, 도적과 강도의 굴혈같이 더러운 길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 주님이 오셔서 이런 상태를 바라보신다면,주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실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로사” 뿐이 아닐 것이다. 변질한 현대 교회들과 변질한 성도들의 영적 상태로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한 믿음을 저버리고, 각종 이권과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등, 온갖 죄악의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우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교회들, 이름뿐인 목회자들, 이름뿐인 신자들의 마음속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이 범주를 벗어 난 사람, 거룩한 성도이기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라는 사람 역시 알게 모르게 변질되어가고 있으며, 같은 병을 앓고 있기에, 한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라 고백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회복하려면 쇄신이 필요하고, 쇄신하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하다. 먼저, 현지에 세워진 그 웅장한 ‘프란체스카’성당부터 파괴되어야 한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대명 한다는 각종 현란한 주상들이 모두 홰파되어야 하며, 길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모든 잡동사니를 깨끗이 치워 버려야 한다. 인간의 꾸밈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묘사할 수 없다. 성령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길을 내어 드려야만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화려함도 아니고 웅장함도 아니며, 신부로서의 순결함일 것이다. 하물며 한줌의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우상숭배적 행위로 변질된 교회이겠는가? 

 

주님께서 두 번 오셔서 찾으시는 교회는, 웅장하고 큰 대형교회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작은 교회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작건 크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교회일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찾으시는 성도는, 순결한 믿음을 소유한 영혼, 모든 죄악의 길에서 떠나 돌이키고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영혼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비아 돌로로사”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보다 그리스도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라리 그곳이 황량한 빈들이었드라면 더욱 은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사순절 기간에 진정한 의미의 “비아 돌로로사”가 이스라엘 성지에도, 내 마음속에도, 다시금 회복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드려 본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라도 형식에 치우친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니겠는가?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마음을 찢고 주께 돌아오라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해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최송연 사모(아멘넷 칼럼니스트)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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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짐보님의 댓글

짐보

요즘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이라는 세미나와 행사의 광고를
아멘 넷에서 보면서 사실 관심조차 없었던 이유는 이 모든 주제는
종교개혁의 의를 되새기고 개혁 하자는 상투적인 주장일게 뻔 하고
‘개혁’ 이라는 문자가 이미 교회의 로고로 교회와 교단의 이름 앞에 붙여
개혁교회와 교단의 교리로 정체성으로 사용되었고 이전 개신교(改新敎)의 개신(고쳐 새롭게 함)이라는 뜻이 끝없이 갱신하여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신앙적 의미의 각오와 다짐이었기에 개혁(reform)은 새로운 신학적 사상도 아니고 신앙적인 새로운 발견도 아닌데 개혁하자는 행위의 주체가
개혁의 대상이 된 현실에
관심이 없음은 의례적인 구호의 행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생략된 무엇인가 순서가 뒤바뀐 구호(口號)같은,
마치 한국의 정권들이 구호를 만들고 홍보하듯이
‘정의로운 사회’ ‘보통사람들의 세상’ 등 외쳤다고 정의로운 사회도 되지
못했으며 보통사람들 세상의 보편적 가치적인 세상이 되지 못했듯이
교회에 구호처럼 써서 붙여 놓은 성경의 구절처럼
그 교회의 구호의 포스터를 붙인 들
구체적인 실행에 옮길 생활의 신앙이 생략되면 그냥 장식품인 치장과
꾸밈에 머물러 낡으면 버리는 그런 구호의 장식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시기에 온당한 글을 쓰셨습니다.
글의 내용처럼 개신하여야 할 개신교가,
천주교가 이방 종교의 혼합체로,
외식하는 예식(禮式)과 절기의 형식을 따라 하고 있으니,
이미 초대교회가 생기기 이전에 예수님은 이런 이방인과 같은 외식을
꾸짖음을 넘어 화가 있다는 저주의 말씀을 하셨는데
‘개신(改新)교’ 라 끝없이 성경의 공동체가 되려는 개혁(reform)을 해야
하는데 현실은 조직의 유지에 머물고 조직의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成果)에 치중하면서
천주교의 제도적인 교회로 조직이 변형된 법제와 된 교리와 절기, 의식을
본받아 똑같이 외식하는 의식을 따라하니
언급하신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나 사순절, 성탄절(크리스마스 날이 아닌 주현절과 결부된 절기),부활절, 오순절, 대림절 등은 천주교의 전통이며, 그렇다고 몇몇 절기는 도외시하기에 교회의 문화로 굳어졌고
의미 까지 버리자는 주장은 아니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버린 외식이 무슨 의가 있겠기에
되돌아 볼 때입니다.
어떤 자들은 예수님 이전의 유대인 절기 유월절 장막절 칠칠절 등
지키자하고 일천번제를 하고 양까지 잡는 제사 의식을 행하는 자들도
있으니 이스라엘의 회복을 외치고 제 삼 성전의 성전건축을 주장하는
자들의 미혹에 동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성경의 용어도 중보자이신 오직 한 분 예수님을
천주교는 교황이나 신부로 대신 한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중재자로 중보자로의 ‘고해’ 는 이단적인데 언제부터 중보자를 흉내 내는 대단한 사람들이 생기더니 언제 부터인가 ‘중보기도’ 라는 천주교의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용어를 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영성’ 이라는 단어도 마찬 가지지요.
전에 토마스님께서 ‘영성’ 이라기보다 ‘거룩’ 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는
글을 읽고 동감했기에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저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영성’ 이라는 천주교 냄새도 나고 혼합적인 말은 예전 교회에 그런 용어도 없었고 나중에 생긴 단어이기에
경우에 따라서 ‘거룩’ 과 ‘경건’ 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 같아
저는 ‘중보기도’ 나 ‘영성’ 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진정한 의를 변질시키는 외식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사라진 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으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개혁되는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기를, 그렇지 못한다면
성령님이 공급하시는 힘, 그 동력(動力)을 잃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해
세상을 움직일 힘커녕 세상에서도 도태하는
무늬만 크리스찬인 세속화된 종교인으로 전락하는 시기에
적절한 글에 감사드립니다.

별똥별님의 댓글

별똥별 댓글의 댓글

긴글을 읽어주시고
적절한 글이라 공감해 주시니
감사하고, 큰 힘이됩니다.

무엇보다도
구구절절... 가슴에 닿는 리플,
긴 시간 정성을 다하여 남기신 말씀,
역시, 아멘넷 독자님들의 신앙생활에
큰 깨달음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면서...

요나님의 댓글

요나

구구절절... 가슴에 닿는 말씀! 성령님의 감화를 느낌니다
저도 몇해전 비오는 어느날 비아 돌로로사를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며 은혜와 비애와 슬픔을 느낀적이 있었읍니다...

별똥별님의 댓글

별똥별 댓글의 댓글

졸글에 성령님께서 감화로
함께해 주심을 느낄 수 있다니
감사드리며,
우리 주님께 영광돌려드립니다!

요나 님께서도 성지순례를 다녀오셨군요.
그곳에 가면...
은혜와 비애와 슬픔을 느낀다,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어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면서..

김 목사님의 댓글

김 목사

사순절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언급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땡기는 3 가지 key point 는 ...
1. 사순절엔 주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고통의 순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2. 주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웅장하고 큰 대형교회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작은 교회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작건 크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교회.
3. 주께서 원하시는 성도는 순결한 믿음을 소유한 영혼, 모든 죄악의 길에서 떠나 돌이키고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사람이라는 것.
깊이 유념하며, 사순절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좋은 말씀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별똥별님의 댓글

별똥별 댓글의 댓글

목사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 사실들일텐데
귀한 리플을 남겨주시니...

목사님의 겸손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본과 덕으로 많이 배울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억해 주시기를...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평안님의 댓글

평안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역사는 되풀이 되듯 위선적인 바리새파의 유전
집착이나 이교도적인 천주교의 예식 집착이나 서로 다를 바 없고
하나님의 뜻을 떠난 종교적 경건은 결국 회칠한 무덤일 것입니다.

개별적인 교회가 신앙생활을 보다 잘 해보자는 좋은 의도에서 일정한
절기나 형식을 취해 적용하는 자유는 막을 수 없겠지만 그 취지와
본질이 망각된 채로 적용되지 않도록 또 사모님 지적처럼 이단들에게
비방거리를 제공하지 않도록 주의시킬 필요는 있다고 봅니다.
 
주의 교훈에서 떠나도록 미혹하는 영이 신앙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도록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하는 것보다 사람이 만든
종교적인 형식과 절기에 치중하도록 꾀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까요.

꾀임받지 않도록 이렇게 시기적절하고 유익한 글로 수고해 주시는
우리 별똥별 사모님께 감사와 안부의 인사를 드립니다.

별똥별님의 댓글

별똥별 댓글의 댓글

졸글에 함께 동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 님...
처음 대하는 닉인 것 같은데...
최송연 = 별똥별이란 것을 아시는 것보니까
아멘넷의 오랜 독자님이시겠습니다.^^
"우리 별똥별"이라고 불러주시니 정겹고,
시기적절하고 유익한 글이라시니 큰 힘이 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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