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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력 함량 미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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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7-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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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를 졸업한지가 35년이 지났는데, 신학교 다닐 때 내가 좋아했던 교수님의 강의 녹음한 것을 지금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같은 강의를 35년을 반복해서 듣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같은 강의를 들어도 그 강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지력 함량 미달은 가르치는 일에서보다 보고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잘 알아서 바르게 말하려면 지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알아듣고 이해하기 위한 지력의 필요는 더 절실합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참으로 치명적입니다. 역사와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역시 치명적입니다. 그래도 계속하여 노력하면 조금씩 이해가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이것이 발전이고 성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그 교수님의 강의뿐 아니라 신학교에서 알게 된 주제와 과목들이 다 나에게는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복음, 교회, 하나님 나라, 신학, 역사, 윤리, 철학에 대한 결론이 무엇인가는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지만 그 과정을 모르는 결론은 삶과 목회에 별로 도움이 안 되었기 때문에 더듬어 살펴보려고 나름 애를 쓰고 있습니다. 내가 속한 교단과 공부한 신학교가 다 개혁신학을 표방하지만 개혁신학의 진가에 대해 눈을 뜨기 위해서는 누구나 각개전투 식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 지금의 교단과 신학교의 현실입니다. 지금 나의 신학과 철학과 역사와 윤리에 대한 이해는 거의 신학을 졸업한 후 혼자의 노력에 의해 형성 된 것이기에 검증되지 않았으므로 체계적이지 못하여 누구를 가르치거나 주장할 정도는 못됩니다.

신학교 강의 시간에 스치듯 지나가는 신학자와 철학자를 다 알아 볼 수는 없지만 철학을 모르고 신학을 이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판단에 한스 요아킴 스퇴릭이 쓴 세계철학사 상하권을 줄을 긋고 메모를 해가며 탐독하였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그렇게 읽고, 영국의 역사학자 Herbert Butterfield의 기독교와 역사를 읽고, 코넬리우스 반틸의 변증론을 읽다가 그가 평생에 존경하는 스승이 게르할더스 보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보스의 성경신학을 만난 이후 언제나 옆에 두고 읽고 또 읽곤 합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는 몇 년에 걸쳐 설교도 했고 몇 학기에 걸쳐 강의도 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은 마치 내가 쓴 책인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주로 철학, 교리사, 역사, 경제학, 정치사상사, 시집 등이 재미있어서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이제는 무엇이 그리 바쁜지 책을 많이 읽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전에 읽고 좋았던 책을 다시 읽습니다. 나는 보스의 성경신학이 너무 좋습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이 그렇게 존경한 보스를 내가 좋아하는 것이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겸연쩍지만 그 책은 나에게 훌륭한 선생입니다. 그 책 한 장을 제대로 읽는 것이 나의 경우는 신학교 한 학기 공부한 것보다 낫습니다. 그렇게 읽고 생각하고 알아보려 했던 덕에 설교나 글이나 삶에서 내가 표방하는 개혁신학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반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조금은 피할 수 있는 것 같아 여간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기독교와 정치와 경제와 이념과 사상과 철학과 가치관 등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또는 목회자로서 그 복잡한 관계 양상을 이해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기에 나의 지력이 턱 없이 부족한 감량 미달임이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습니다.

지력 함량 미달이 치명적인 것은 목회자로서 전하고 가르치기에 역부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보고 듣고 이해하고 수용하거나 거부해야 할 상황에서 도무지 뭐가 뭔지 이해도 파악도 할 수 없는 경우입니다. 하나님 나라, 가정, 교회, 개혁신학, 복음주의, 실존주의, 상대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 민족, 문화, 이념, 국가, 정치, 경제, 국제관계, 예술, 환경, 식량, 교육 등 알아야 할 분야는 많은데 그것들에 대한 지력은 함량 미달입니다. 그런 주제들과 치열하게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그런 것에 대한 개념파악도 하지 못한 목사가 설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능하면 그런 주제를 피하고 말씀을 전하려는 유혹을 받지만 그것은 나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알지도 못하는 것을 전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것들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허공을 치는 권투 선수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법치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지금의 정치적인 갈등과 혼란에 대해 잘 파악이 안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답답합니다. 그러면서도 나와 생각과 판단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용기가 생기지만 반대의 경우나 내가 판단하기에 단편적 지식이나 정보를 가지고 전체를 오해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현저하게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이나 언론보도를 접하면 화가 납니다. 나 스스로가 지력 함량 미달로 사실을 오해하는 경우도 자신에게 화를 내야 되겠지만 언제나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다른 사람이 지력 함량 미달로 나의 주장과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게 되면 화가 납니다. 하나님 나라 원리는커녕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도 일종의 지식 하량 미달인 셈입니다. 자유민주주와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한 국가 안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떤 주장이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자본주의의 토대를 부정하거나 해치는 주장이나 발언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설교나 교육이나 제도나 활동을 통해서 개혁주의를 부정하거나 왜곡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교단 목사의 설교가 표방하는 교리와 신학을 자유롭게 무시하고 왜곡하는 경우를 접하게 될 때 속이 상합니다. 정치계나 교회들이 심한 갈등과 혼란을 겪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지도자들의 지력 함량 미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대는 정보의 홍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또한 공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또한 모든 것이 전문화 되고 세분화 되어, 소위 원자주의의 특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분야에 대해 깊이는 알지만 넓게는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컴퓨터나 물리학 분야에서 일하면서도 세분화 때문에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가 발생합니다. 한 분야에 대한 지식이 다른 분야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서는 서로 다른 전문 분야의 발전한 기술과 지식이 융합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기술적 전문 분야가 아닌 일상의 삶에서 소통과 통합에까지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정치 경제 사상 이념의 내일이 모두 불확실합니다. 정치인이 정치적 내일을 예측할 수 없고 경제 전문가가 내일의 경제를 예측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특징입니다. 수많은 정보와 지식, 복잡한 사회적 시스템과 그 관계들, 가치의 상대화 등이 모든 것을 불확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이러한 현상을 다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파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측 또한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현대나 원시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태도는 정직과 겸손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기에 모든 사람은 지력 함량 미달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의 지력 함량 미달로 인하여 발생시키는 문제가 마치 중세 암흑시대와 같습니다. 중세는 모든 것이 닫혀 있어서 지도자까지 지력 함량 미달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열려 있는데도 그렇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안다는 지식의 의미와 한계를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처럼 사회 시스템과 지식과 정보가 폭발적으로 복잡하게 된 상황에서는 거의 모든 지식이 단편적인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 단편적 지식이 어떤 구체적 기술 분야에 관한 것이라면 그 분야에서 문제를 발생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지식이 종교나 정치나 이념이나 사회현상이나 가치관에 대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복잡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했을 때 그 평등은 그 사회가 선택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평등이어야 합니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보편적 평등의 잣대로 평등을 이야기 하게 되면 그 사회를 지탱시키는 법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보편적 평등 개념의 잣대로 판단하면 국회의원의 면책 특권은 불평등이 되기 때문입니다. 현행 법 아래서 국회의원은 일반 시민이 갖지 못하는 면책 특권을 갖는 것이 평등입니다. 대통령은 내란이나 외환의 죄가 아니면 형사소추를 받지 않고 탄핵도 할 수 없는 특권을 갖는 것이 평등입니다. 예를 들어 법은 100의 힘이 필요한 어떤 직책의 사람에게 100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50의 힘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50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정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정치나 법 뿐 아니라 경제에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여러 명이 함께 투자해서 회사를 세웠다면 투자한 액수에 따라 이익의 지분을 나누는 것이 자본주의의 평등이고 공평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사회주의 식 공평을 요구하는 것은 지력 함량 미달이거나 아니면 불순한 의도라고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정치 경제적 논쟁과 사회적 갈등이 발생할 때 정치가나 사상가나 문학가나 예술가나 언론인이나 시민이나 어떤 학자라도 자기의 주장이 그 국가나 사회가 채택한 이념과 사상과 법의 토대를 흔드는 이론이나 주장이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패러다임이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나 법치의 의미와 그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사회적 갈등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은 혼란만 증폭시킵니다.

지력 함량 미달의 경우는 많이 배우지 못한 일반 국민이나 지식인과 전문가들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무지렁이 같은 민초라도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구국적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고 석학이라고 할지라도 지력 함량 미달로 역적질을 할 수도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당연히 예상해야 합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지력 함량 미달의 대표적 경우는 단연 국회의원이고 언론과 검찰, 나아가서는 스스로 학자라고 생각하는 대학교수들 중에도 지력 함량 미달인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국가적으로는 경제와 안보위기보다도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인 지력 함량을 갖춘 사람이 많지 않는 것이 더 심각한 위기이고 교회도 지력 함량 미달 지도자가 점점 갈등과 분쟁으로 인한 혼란과 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요 8:32 -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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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작은자님의 댓글

작은자

목사님의 긴 글을 읽으며 지력함량 미달의 경우가 바로 저 자신임을 고백합니다.
어떤한 사회적, 또는 교회적인 이슈에 대해서도 섯불리 이렇다 저렇다 하지 못 할 뿐더러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 알이만 할 수 밖에 없는 미달자인거지요

목사님은 자신을 지력미달자라고 하시지만
목사님의 글과 행간을 통해 고수의 반열에 오르신 거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의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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