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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은 예수, 실제는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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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7-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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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예수님을 본받자고 하는 데는 이견이 많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그분의 삶을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위대한 가르침이요 또한 위대한 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십자가의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즉 그분의 가르침을 본받는다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당신과 같은 십자가가 아니라 각자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본으로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제적 행동과 십자가는 희생적 섬김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져야 할 십자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그리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십자가임을 가르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설명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절대적인 것임에 비해 그 외의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들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이란 영원한 것을 말하고 상대적인 것이란 언젠가 없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믿는 것에 비하면 이 세상 것은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부모처자 형제자매 목숨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그것들의 가치가 예수님을 믿는 것에 비하면 그 정도의 가치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의 의미는 결국 희생적 섬김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일찍이 이런 교훈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상식이고 가치이며 질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원리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이 상식이고 가치이고 질서입니다. 이 가르침이 너무나 탁월하고 위대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조차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입니다.
   
목사나 장관을 가리키는 영어 minister란 말은 종을 뜻합니다. 목사야 주님의 가르침과 본을 따라 섬기는 종이라고 하지만 정부의 장관을 종이라고 하는 것은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은 이런 개념이 정치와 기업과 모든 분야에까지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왕이나 대통령이나 사회 고위직을 국민을 섬기는 직책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 의식이 아무리 발전해도 역사적으로 볼 때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의 가치를 능가하는 고급 가치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자가 섬김을 받고 있지만 명분상으로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웁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대선주자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중 대통령 하고 싶어 대통령 되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과거 김영삼 대통령은 “내사 마 대통령 되고 싶어 대통령 됐다.”고 했는데,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가장 솔직한 대통령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선 주자들은 한결 같이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자세를 낮춥니다. 대선 출마자들은 모두 국민의 종이 되겠다, 머슴이 되겠다고 합니다. 반기문씨도 ‘기회가 되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이 한 몸 불사를 각오가 돼 있다.’고 하였습니다. 소위 속내를 감추고 있던 잠용들도 이구동성으로 나라를 위해 자기 한 몸 불사르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 소방대가 바빠질지도 모릅니다. 잠용인지 잡용인지 모르지만 너도나도 나라와 국민을 섬기는 머슴이 되겠다고 합니다. 요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보다 설득력 있는 다른 말이나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이 희생적 섬김의 가치관으로 불 같은 시련을 견뎠을 뿐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 나라 능력임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상당한 시간이 경과 된 후에 증명되었습니다. 천 년의 로마가 온갖 내외의 적들을 물리쳤지만, 로마가 그렇게도 철저하고 집요하게 말살하려고 했던 기독교에게 오히려 점령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부모처자나 형제자매나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가치관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로마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와 같이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역사가들도 납득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로마의 역사는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은 결코 폄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높은 자가 섬김을 받고 있지만 명분상으로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웁니다.
   
일찍이 니체는 인간에게는 원초적으로 권력에의 욕망이 있고 인간은 누구나 그 욕망에 지배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적 가치관이나 개화된 사상과 의식으로 니체를 비판하지만 어떤 면에서 니체는 매우 정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힘과 권력 찬양논자입니다. 강자만이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니체에게 있어서 약자보호 같은 것은 전혀 가치 없고 쓸모 없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여자와 어린아이들과 약자를 아주 무시하였습니다. 강자만이 살 가치가 있다는 주장은 정글의 법칙인 약육강식의 논리입니다.
   
현대 사회는 명분상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니체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니체는 노골적으로 약자를 무시하고 힘과 권력을 찬양 한 반면에 현대인들은 명분상으로는 섬김의 리더십을 표방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군림하는 리더십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현대인보다 니체가 훨씬 정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기 위해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너무 속보이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그런 위선이 통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선 출마자들이나 국회의원들이 국민의 머슴을 자처하지만 그런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교회는 어떨까요? 목사인 나 자신도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신 섬김이 최고의 가치일지라도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섬김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이라도 하고 있다면 그래도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을 필두로 권력을 추구하였으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어머니를 동원한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면 국정조사를 해야 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실 때 그 좌우편에 앉는 것은 공정한 선발 기준으로 결정되어야지 청탁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정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청탁하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청탁 행위보다 더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입니다. 군림하는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세상 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원리나 법 자체가 다르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너무 고상한 가치이기 때문에 불신자들까지 이 가치를 표방합니다. 세상과 교회가 타락한 면에서도 비슷하지만 섬김의 리더십을 표방하는 데서도 비슷합니다. 정치 사회에서도 섬김의 리더십을 내세우고 교회에서도 섬김의 리더십을 내세웁니다. 교회나 사회나 앞선 이들은 온갖 특권과 특혜를 누리면서도 명분적으로는 섬긴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수 백 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놓고도 교회와 선교를 위해서 라고 궁색한 명분을 내 세웁니다.
   
정치인도 교회 지도자도 모두 섬긴다고 하는데 누구를 위한 섬김이냐가 중요합니다. 자신을 위한 섬김은 섬김이 아닙니다. 섬김의 대상을 위한 섬김이라면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섬김에는 노골적인 권력 투쟁과 다름없는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 정치계와 교회들 안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자신을 위해 섬기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것은 수단이고 목적은 권력을 잡고 군림하는 것입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면 갑질하기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교만해 지기 위해 겸손하고, 군림하기 위해 섬기고, 자기 꿈을 성취하기 위해 희생하고, 대접 받기 위해 봉사하고, 부자 되기 위해 근면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방법이 아닙니다. 명분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내 세우지만 실제는 니체의 논리에 지배를 받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섬김의 대상을 위해 섬기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하셨는데, 이 사랑에는 분쟁의 소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기왕 상대를 위한 일이라면 내 주장을 세우기 위해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섬긴다고 하고, 봉사한다고 하고, 정의를 위한다고 하고, 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싸웁니다. 심지어 사랑한다고 하면서 죽으라고 싸웁니다. 그 싸움들이 그들의 주장이 위선임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혁명보다 혁명적인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면서도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신 것은 철저하게 섬김의 대상을 위해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으뜸이 되는 수단으로 섬기는 자와 종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실제로 높아지기 위해 낮아지고 으뜸이 되기 위해 종이 되라고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섬김과 사랑은 목적이기 때문에 수단이 되면 안 됩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데 무슨 싸움이 필요할까요? 서로를 위하면 싸우기까지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분쟁과 싸움은 정욕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 막 10:43, 44 -

황상하 목사(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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