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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과 평등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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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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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평등하게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각각 크기, 형태, 피부색,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피부색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피부색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능력, 지능, 개성, 감정, 말하는 법, 기호나 식성, 교육, 경험, 직업 등에 있어서 서로가 아주 다릅니다. 또한, 사람들은 시대나 영적 성숙도에 따라서 도덕적, 영적으로도 많이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며 대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사실은 피차 존엄과 가치를 존중하여 서로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며 피차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지위와 역할을 자신의 것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기뻐해야 할 의무를 갖게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각자에게 부여하신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동등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소홀히 하여 피차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거나 피차의 은사를 질투하고 피차의 높아짐과 잘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고 불법과 술수와 횡포를 자행하는 것은 명백한 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거나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탁월한 성악가는 탁월한 성악가로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학문이 깊은 학자는 학자로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피아노를 연주하지 못하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존경받아야 합니다. 공평하고 정의로운 판사는 그 공평하고 정의로움 때문에 더욱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판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판사로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한 분야에서 힘든 노력을 통해 진보를 이루고 그 진보가 공익에 이바지한다면 그 역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선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아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 교회 지도자들, 세속 권력자들도 존경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존경과 공경을 드려야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을 존경해야 하지만 그 어떤 위대하거나 탁월한 사람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선 존경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모든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높여야 하지만 각자가 받은 은사와 직분을 자신의 것처럼 기뻐하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서 차이를 인식해야 합니다. 만약 모든 이들이 같한 은사를 가졌다면 더 높이고 더 존경해야 함은 불필요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동등함이나 다름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동일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고 보수주의자들은 다름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성적 지향이 도덕적으로 같다고 주장하며 그 사실을 부정하여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편견이라고 주장합니다. 보수주의자들은(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 차이를 과장해서 인간 사상과 문명에 끼친 여성과 소수자들의 기여를 무시하였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은 학교에서 시험을 최소화해서 한 집단의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보다 우월감을 느끼는 것을 차별이라고 하여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참여를 최대화하기 위해 군대, 경찰, 소방대원 같은 특정 직업의 자격 조건이 현저하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모든 사람이 모두 똑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집단이나 배경이나 교육적 수준이 달라도 누구나 모든 직종에 똑같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격에 못 미치면 그 자격 요건을 낮춤으로써 그들이 같은 자격을 얻어야 한다는 식으로 인종차별을 없애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모든 직업에 자격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핵물리학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국가 대표 축구팀의 골키퍼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갱도 작업이나 벌목 일에 적합한 사람은 남성이 여성보다 많습니다. 어떤 NBA 감독이 사실을 말했다가 해고되는 예도 있었지만, 농구 선수 중에 탁월한 선수는 백인보다 흑인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와 같은 사실을 근거로 백인에게 농구를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동등을 희생하고 다름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성경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동일과 다름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모든 인간을 한 종족으로 보았습니다(행 17:26). 아담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고 홍수 이후에는 노아가 우리의 조상입니다. 성경은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과 나라들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노아는 셈에게 축복을 선언했고 야벳은 셈의 장막에 거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야벳은 이방 나라들의 조상인데, 노아가 축복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된 것이 그 약속의 성취입니다. 노아의 이 축복 예언에서 함은 제외되었는데, 함은 술 취하여 벗은 아버지를 범한 죄로 저주를 받았고 함의 아들 가나안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멸하라고 명령한 불레셋 족속의 조상입니다. 따라서 나라들 안의 개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 나라들이 모든 면에서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라들이 역사 안에서 각각 행해야 하는 다른 역할들을 주셨습니다. 셈이 받은 복은 세상을 구원하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할을 보여주고 있으며, 야벳이 받은 복은 모든 나라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오며 그에게 의존하는 것을 기대하고, 가나안이 받은 저주는 하나님이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서 찾으신다는 출애굽기 20:5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에서 나라 간의 실제적인 구분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홍수 심판 이후 인간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하기보다는 우상적인 구조를 중심으로 하나 된 문명을 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계획을 심판하셨습니다. 언어의 다양성은 나라 간의 주된 차이점 중 하나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같음보다 다름이 강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속의 복이 계속해서 한 나라 이스라엘로 좁혀지며 결국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좁혀지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시작부터 아브라함의 복이 결국 세상의 모든 나라를 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2-3) 이사야는 이스라엘과 적들이 같음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사 19:22-25).

그런데도 율법은 대부분 이스라엘을 다른 문화의 악한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이 율법은 또한 증인의 기능을 하게 하려고 주어진 것입니다(신 4:5-7). 다른 나라들로부터 구별된 이스라엘의 순결함은 그 나라들의 질투를 유발시켜 참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유혹하는 증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이 주신 이 구별을 사용하여 도리어 다른 나라들을 경멸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파 운동은 "이방 나라들은 개와 먼지"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자신은 이방인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분에 관한 설명인 마태복음 12:18-21은 이사야 42:1-3의 약속을 인용하고 있습니다(참고 눅 2:32), 마태복음 8:5-13을 보면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에게 대하여 그의 믿음이 이스라엘의 어떤 이들보다 큰 것을 보셨습니다. 마태복음 15:21-28에서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비유대인 혈통을 강조하며 유대인의 식탁에서 그녀를 "개"라고 부르는 역설적인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 이후에 예수님은 그녀의 요청을 받아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20의 지상 명령에서 예수님은 교회의 주된 의무를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지상 명령은 구약에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구심력 운동을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나라들에게로 복음을 가지고 가는 원심력 운동으로 바꾸셨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나라들로부터 구분시키기 위한 구약의 율법 기능을 폐지했습니다. 하지만 초대 기독교인들은 오순절 이후에도 이방인들을 향한 사역을 꺼려서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주시고 직접 명령하시기 전까지는 이를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순종하며 응답했습니다(행 10:34-35), 그리고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임하셨음을 듣고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행 10:47). 교회는 또한 이방인 신자들을 환영했습니다(행 11 : 1-18), 하지만 후에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들에 대한 열린 자세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했으며 이로 인해 바울의 책망을 들었습니다(갈 2 : 11-14).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가라는 특수한 책임과 함께 바울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행 9:15). 바울은 그가 가는 곳 어디서나 회당에서 설교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의 복음을 거절했을 때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로 갔습니다(행 13 : 46-48; 186 : 22:21; 26 : 17-20 : 28:28). 그 이후로 하나님은 계시록의 놀라운 찬양을 고대하며 전 세계에 교회들을 세우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 : 9; 참고 계 7 : 9)라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높은 인종적 장벽을 극복해야 했었습니다. 유대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으려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그러한 유대인들 때문에 이방인들은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특히 할례가 어려운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5:1-35에서 예루살렘 공회는 이방인들이 이러한 요구들에서 벗어난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비록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 죽인 것과 피를 멀리"(행 15:20)해야 했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편안한 지대를 벗어나 조금씩 양보를 해야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으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주의와 배타성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신약은 헬라인과 로마인들 혹은 아테네 사람들과 고린도 사람들 사이의 다른 인종적, 국가적 긴장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셨기에 이보다 덜한 장벽 또한 깨뜨리실 것이라고 사도는 분명히 말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8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이는 이러한 차이들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선언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교제를 막는 장벽들이 제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모든 이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우리 사이의 차이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하나 됨에 비하면 사소한 것입니다. 지도자가 섬기는 지도자가 되며, 따르는 이가 섬기며 따르는 이가 될 때, 지도자와 따르는 이들 간의 긴장 역시 해소될 것입니다. 로마서 12:3-13과 고린도전서 12:4-31은 인종이나 국가적 차이에 집중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절들은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다른 차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며 이 차이들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한 몸을 세우기 위해서 우리 개개인에게 고유한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발은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 하였다"(고전 12:15)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눈 또한 손에게 "내가 너를 쓸데없다"(고전 12:21)고 할 수 없습니다. 몸의 모든 부분은 다른 부분들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차이점들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어떤 면에서 그분은 우리 개개인에게 다른 선물을 주심으로서 이 차이점들을 더욱 키우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차이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이 차이들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더욱더 사랑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2장의 은사들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13장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찬양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와 아주 다른 사람들의 존엄과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종적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라고 부르십니다. 다른 이들의 은사나 진보를 탐하는 것은 계명을 범하는 죄입니다. 성경은 다른 사람의 은사나 성취를 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우리가 이렇게 할 때 교회 안에서부터 인종차별이 극복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사회와 국가 간의 인종차별 문제가 극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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