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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과 헛되고 무익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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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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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과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생명과 구원이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고 가치이고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과 생명과 구원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그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구원보다 더 큰 상위 개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창조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요리문답 제1문이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구원도 결국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개인적으로든지 집단적으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면 본래의 존재 목적을 벗어나는 것이고 성경은 그것을 곧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개념으로 말한다면 신앙생활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아닌 기독교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심각합니다. 물론 기독교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해도 엘리야 때처럼 남겨진 의인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남겨두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국가나 사회의 전반적인 상황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헛되고 무익한 것을 추구하는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상황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그러한 상황 자체가 죄라는 것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는 경건한 삶을 살기가 몹시 어렵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무익한 것을 추구하는 주도적 상황 가운데서 정직과 공의를 위하는 인간의 노력이란 마치 떼강도가 은행을 털어 훔친 돈을 나눌 때 공평가 정의와 양심을 운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현실적 상황 뿐 아니라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러한 실패의 전형을 보게 됩니다. 성경이 그러한 역사를 기록해 놓은 이유는 이스라엘에 대한 단순한 고발 차원이 아니라 그런 전형을 통해 인류가 그 존재 목적에 얼마나 역행하여 사는가를 깨닫게 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여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레미야는 힐기야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거의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보수적인 신앙의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교육받은 엘리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고향은 베냐민 땅 아나돗입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깝습니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국내외 정치 상황을 몸으로 겪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소위 당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고급 정보를 통해 듣고 배우며 생각하고 고민하며 자랐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레미야의 소명과 활동을 소개하면서 세 명의 왕, 요시야와 여호야김과 시드기야를 이야기 합니다. 요시야는 8세의 어린 나이로 주전 640년에 유대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와 나이가 비슷합니다. 요시야가 왕이 된지 13년이 되던 주전 627년에 예레미야는 스물 한 살의 나이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아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한 5년 뒤인 주전 622년부터 요시야 왕은 개혁운동을 시작 하였습니다. 그때 요시야의 나이가 27세였습니다. 요시야의 개혁 운동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의 개혁 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이 끝까지 잘 되었다면 유대의 역사도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유다 나라는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려운 외교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는 바벨론이 그리고 남쪽에는 애굽이 그 세력을 확장하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이나 애굽은 모두 강대국입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유다 나라는 어느 나라 편에 설 것인가를 판단하고 결단해야 하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요시야 왕은 바벨론 편에 서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유다가 바벨론 편에 섰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애굽이 바벨론을 공격하기 위해 올라오자 요시야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애굽 군대를 가로막고 싸웠습니다. 유다가 애굽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입니다. 요시야가 용기가 있어서 그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싸움을 시작하면 바벨론이 내려와서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시야는 그 전쟁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때가 주전 609년인데 그가 개혁을 시작한지 13년 되던 해였고 그의 나이는 서른아홉 살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의 왕은 파라오 느고였습니다. 성경에는 그 이름이 바로느고라고 나옵니다. 바로느고는 자기 마음대로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여호야김을 유대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여호야김은 왕의 자질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애굽 왕이 시키는대로 하는 왕이었습니다. 여호야김이 그런 왕으로 유대를 다스리다가 요시야가 죽은 지 22년만에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시드기야가 왕이 된지 11년이 되는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시야는 바벨론을 위해서 애굽과 싸우다가 애굽에게 패하여 자주권마저 잃었는데, 이제는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대의 왕족을 비롯한 귀족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 모두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고 유대 땅은 바벨론 총독이 와서 다스렸습니다.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이제 유다라는 나라가 없어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나이 20대 초반에서 시작해서 60대 초까지 선지자로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정서적으로 예민하였습니다. 그는 시대를 보는 눈이 남다르게 예리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러한 그의 성품이 그를 더욱 불운한 선지자로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감지하였던 것입니다. 철학자는 동시대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예언자는 다른 사람이 깨닫지 못한 민족의 불행한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안목이 그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감사인 시인의 “별을 보며”라는 시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렵혀지지 않았을까/. 시인은 별과 하늘을 너무 쳐다보아 그것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하는 소심증과 결벽증 환자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더럽히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덜덜 떨며 살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런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백성을 책망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세상을 더럽히고 다른 사람을 더럽힐까 두려워서 덜덜 떨며 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조국의 운명이 그와 같은데도 그 심각성을 감지하거나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조국이 처하게 될 그 처참한 내일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는 조국 유대가 처한 상황을 인하여 한없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백성들로 인하여 그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인데 누가 감히 건드리겠느냐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유대가 바벨론 포로가 된다는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믿을 리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성격이 까다로운 엉터리 선지자라고 취급하였습니다. 늘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 지적하는 못된 선지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선지자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참 외롭고 고독한 선지자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를 바벨론의 간첩이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늘 테러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한평생 마음 편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는 참 불운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유대인들의 영혼에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설교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렘 2:5). 당시 제사장들은 여호와를 찾지도 않았고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었고 선지자들은 바알의 말이나 따르고 전하였습니다.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나 선지자는 모두 유대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바알의 말을 좋아하고 전하고 가르치고 따랐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일체 관심도 없고 바알의 말만 좋아합니다. 유대 백성들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바알의 말을 좋아했고 지도자들이 그것을 가르쳐 주기를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은 오늘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가 볼 때 이것은 개인적인 악일 뿐 아니라 집단적이고 종교적이고 문화적이고 윤리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악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상대하여 싸우지 않으시고 유다를 상대로 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가치 질서를 존중하려는 이들의 의로운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우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모든 상대적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그 수준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것을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과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런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기독교적인 무신론자들과 거짓과 불법을 자행하는 세력에 의해 무시되고 통제되고 심지어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레미야 때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나 애굽을 상대로 싸우시는 것이 아니라 유다를 상대로 싸우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무신론자들이나 거짓과 불법을 자행하는 이들을 그냥 두시고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헛되고 무익한 것을 추구하는 교회를 상대로 싸우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악하고 불법한 자들의 공격보다 하나님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이 더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그들이 생명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헛되고 무익한 것을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헛되고 무익한 것이란 유다가 바알을 섬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가 이렇게 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적하셨습니다. 먼저는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물을 가두지 못할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 2:12)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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