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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급하고 위험한 팬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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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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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문화란 한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독특한 생활 양식을 의미하며 사회 구성원들이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공유하고 있는 행동 양식과 사고방식 등을 의미합니다. 문화(Culture)의 어원인 라틴어 ‘Cultus’는 ‘밭을 갈아서 경작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으로부터 문화란 자연적인 행동과 반대되는 문명화된 행동이라는 의미로 발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문화를 상류층 사람들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19세기에 이르면 문화란 훌륭한 예술이나 음악이나 사상을 가리키는, 이를테면‘고급문화’의 개념으로 등장하였고, 20세기에 들어와서 대중문화가 발달하면서 문화의 개념이 ‘세련된, 교양 있는, 고급스러운’의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 양식을 넓은 의미로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좁은 의미에서의 문화이고, 넓은 의미에서 문화란 의식주,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좁은 의미의 문화란 소수의 귀족들만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8세기 중반 영국의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시민'과 '대중'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는데, '대중'의 존재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던 19세기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대중'이 즐기는 새로운 유형의 문화가 본인들이 즐기는 진정한 예술과는 거리가 먼 ‘저급문화’라며 비판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문화 이해는 소위 문화 절대론의 입장으로, 모든 문화는 절대적으로 우월하거나 열등한 문화로 구분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1930년대 미국의 두 인류학자 베네딕트와 허스코비츠에 의하여“문화는 다양하며 인간의 인식과 가치관은 문화에 따라 다르다" 는 문화상대주의의 명제가 제기된 이후 개인의 인식과 행위는 각 문화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한다는 상대주의적 문화 이해의 입장이 오랫동안 많은 인류학자에게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문화상대주의의 대척점으로는 문화절대주의나 자문화중심주의가 일반적으로 거론되지만 문화상대주의의 정확한 대척점은 사회진화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문화상대주의 이론은 근대 제국주의의 이념적 바탕인 사회진화론에 대한 비판 및 반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문화와 문화의 산물은 각각 해당 문화를 향유 하는 사람들이 이룩해 놓은 사고와 생활방식, 지혜의 모음이며, 보고이기에 모든 문화는 각각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다양한 문화를 만약 어떤 하나의 문화 잣대로 평가한다면 당연히 고급한 문화와 저급한 문화로 구분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치 질서의 차원에서 볼 때 어떤 문화는 다른 문화보다 저급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치 질서마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구분도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문화는 한 사회에서 공동생활하는 인간들이 이룩해 놓은 일종의 생활방식이며 삶의 지혜이기에 다른 문화에 의해서 무시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어떤 문화가 다른 문화에 비해 절대적 척도의 가치가 고급스럽거나 저급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문화 절대론을 주장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문화상대주의가 문화를 바라볼 때 취해야 할 옳은 관점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현대는 문화상대주의가 너무 멀리 나가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 문제란,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저해하거나 침해하는 문화적 관습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식인 풍습, 여성과 아동 학대, 명예살인, 인신 공양, 인신매매, 노예제, 카스트 등의 신분 제도, 여성 할례 같은 전통을 문화 상대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지만, 동성결혼을 합법화하여 전통적 가정을 파괴하고 남녀 성을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만드는 것까지 문화 상대론으로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문화가 상대적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문화 상대론이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정당하다고 해도 절대 가치와 기준은 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창조물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고 은총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을 넘지 말도록 엄히 경계합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은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우상을 섬기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을 넘게 되면 아무리 탁월한 인간의 지혜라도 우매하고 어리석은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생각을 따르는 결과는 우상숭배이고 우상숭배란 곧 인간 사고와 지혜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문화가 공통체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된, 인간들의 지혜가 축척 된 결과로서의 행동 양식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금수와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음의 결과가 되고 맙니다.

고대 희랍의 우상을 비롯하여 모든 우상 종교에는 윤리나 도덕이 없어서 우상의 권위를 인간이 그 우상을 광신적으로 섬기는 것으로 세우려 하였습니다. 우상에 대한 인간의 광신은 그 종교 행위가 사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묵인되고 정당화되었습니다. 광신은 신앙의 내용이 윤리 도덕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지만 그 신을 모독하는 그 어떤 인간도 가혹한 처벌을 받게 합니다. 이러한 우상 종교의 광신은 종교를 넘어 정치와 문화 일반에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늘날 ‘광신”이라고 하면 딱히 종교에만 국한되어 사용되지 않고 신앙이나 이념이나 사상이나 유행 따위에 대하여 이성을 잃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광신도는 건전한 종교에서부터 정치와 이념과 사상, 철학,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광신의 형태는 개인을 넘어 집단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광신의 행위가 개인이었을 때보다 집단의 형태를 띠게 되면 정치와 법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이 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합니다.

영국 심리학자 맥스웰 테일러는 그의 “광신도들”이라는 책에서 광신의 10대 특징을 집중(focusing), 개인적 관점의 세계관(personalised view of the world), 무감각(insensitivity), 기본적인 분별력을 상실, 모순에 대한 무한한 관용, 확신(certainty), 단순 이분법, 변화에 대한 저항, 경멸과 무시, 상황적 아전인수 등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은 광신적 특징을 지닌 팬덤이 문화가 되고 있습니다. ‘광신도’라는 말은 고대 희랍 신전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사람을 의미합니다. 광신도를 라틴어로 ‘fanaticus’라고 하는데, fandom이라는 말은 fan에다 영역이나 나라를 뜻하는 접미사 dom을 붙여 만들어진 단어로서 특정 인물이나 분야, 취미에 열성적으로 몰입한 사람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팬덤이 가장 활발한 분야는 대중음악, 대중 스포츠 등인데, 요즘은 정치나 사회운동 등에서 더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팬덤 현상이 정치권으로 전이되자 그 폐해는 예측을 불허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팬덤의 뜻이 광신자이고 광신자란 옳고 그름을 이성적으로 분별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성적으로 좋아하는 인물이나 대상에 천착하기 때문에 저급한 문화를 만들고 그 결과 보편 가치와 윤리와 도덕의 실종을 불러오게 됩니다. 한국 정치에는 노사모 모임의 활동이 정치 팬덤의 출발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고, 미국에서는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이 정치 팬덤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 같았으나 지나치게 과격한 탓에 역풍을 맞아 좌절하였습니다.

팬덤 정치나 문화는 그 단어의 본래 뜻처럼 객관적 사실이나 옳고 바른 판단에서 출발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감성을 따르는 특징 때문에 그 활동의 사회적 폐해나 해악이 드러나도 일체 자신들의 생각이나 방향을 수정하거나 바꾸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인물이나 대상을 지지하기 위해 거짓말이나 폭력까지도 정당화합니다. 팬덤 정치가 되었건 팬덤 문화가 되었건 문화상대주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나름 명분과 일리가 있지만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어떤 명분이나 일리 정도를 따르고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팬덤 정치나 문화를 만들고 활동하는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나 정책들이 명백히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단 교주도 좋고 옳은 말을 할 수 있고 독재자도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문화 절대론에도 좋은 것이 있고 문화 상대론에도 좋은 것이 있고 나쁜 것이 있습니다. 문화 상대론자들이 옳은 것을 주장하면 받아들이고 따라야 하고 성경과 보편 가치에 어긋나는 것을 주장하면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정치 지도자나 정당이 내놓는 복지 정책이나 경제 정책이나 에너지 정책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좋은 것일 수도 있고 안 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정책들에 대해 언제나 바른 선택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더 나은 정책이나 그보다 못한 정책이나 장단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국가 정책이나 정당 정책이 합리성과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소위 팬덤 정치나 문화처럼 되어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나라의 지도자나 정당이 완전할 수 없으므로 무조건 지지하거나 반대해서도 안 됩니다. 옳고 정당한가를 보아서 판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구체적 정책이나 말이 옳고 정당한지를 판단하기란 역시 어렵기 때문에 그 정책이나 말이 성경과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현저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정책을 내놓는 지도자나 정책은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모든 정치 지도자들은 국민을 위하고 정의를 위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행동을 유심히 살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보편 가치에 부응하는지 여부를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하나같이 모세의 율법의 권위를 앞세웠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백성을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한 지도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 23:2-7)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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