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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웨버의 개혁신앙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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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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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농촌사회에서 도시사회로 급속히 발전하였습니다. 마치 한국이 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과학의 발전이 새로운 제조 기술을 혁신적으로 발전시켜 경제 부흥에 이바지하였습니다. 17세기부터 자본주의는 경제 철학으로 국가와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요인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생겨난 더욱더 근본적인 요인은 칼빈주의 때문이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Max Weber가 그의 유명한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s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칼빈을 ‘무간섭 자본주의의 창시자’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믿는데, 자신들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경제적 번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한 것은, 먼저는 어떤 직업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또한 그들은 그 당시에 신앙적으로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소수였기 때문에 정부나 법이나 교회의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었고 오히려 박해를 받는 처지에서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구두 수선공이나, 도살업이나, 상인으로 부지런히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소명으로 여겼기 때문에 각자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일하였습니다.

칼빈의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주의 신학이나 청교도 신앙은 노동의 가치와 근검절약의 가치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청지기적 태도를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본이 점점 축적되어 제조와 새로운 시장 개척과 무역과 산업화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Max Weber의 종교개혁 윤리 설명은 매우 일리 있고 인상 깊은 주장이 틀림없습니다. 칼빈이 개혁을 단행한 제네바시는 축적된 자본으로 은행을 설립하여 가난한 자, 약한 자,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들을 부양하고 돌아보았습니다. 두 개의 병원도 세워, 하나는 병든 자와 노인과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치료해 주고, 다른 한 병원은 전염병에 걸린 자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생긴 것이든 칼빈주의에 의해서 생긴 것이든 간에 자본주의는 경제적 부와 함께 사회적 갈등도 만들어냈습니다. 많은 소작농과 공장 노동자들은 더 나은 도시 생활을 꿈꾸며 산업노동자가 되었지만 노동이 힘든 만큼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공장 노동자가 되지 않았다고 해도 더 나은 삶이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꿈과 기대는 만족스럽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산업화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이지만 60년대 말이나 70년대 초에 도시 공장으로 몰려든 공장 노동자들의 형편은 열악하였습니다. 소위 닭장이라고 불리는 숙소와 고된 저임금 노동은 나이 어린 근로자들의 꿈을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요원하였습니다. 그전에 유럽은 한국보다 더 암울한 시기를 거쳤습니다. 아침 6시에 줄지어 공장으로 들어가 밤 10시가 되어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오지만, 그들의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노동 현장이나 집이 모두 열악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절망만 깊어갔습니다. 여섯 살의 어린아이들이 공장이나 광산에서 오랜 시간 일하면서 채찍질을 당하고 성적 학대를 받으며 혹독하게 다루어졌습니다.

그러자 노동자들의 부자들에 대한 분노가 쌓여갔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이 같은 분노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빈부격차에 대한 사회적 갈등은 사회주의 혁명을 불러오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약점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와 혁명을 성공시켰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차별이 심하여 소수의 부자들과 엘리트들은 풍요와 특권을 누리고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자들이 늘어나게 되면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종교적으로는 이단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점점 심화하는 빈부의 격차가 가난한 자들이 부자를 미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역사에서 수도 없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요즘은 진보주의자들이나 좌파들이 부자들을 미워하는 것 때문에 경제가 망가지고 있는데, 이 문제의 근본적인 책임은 무신론과 그릇된 인간관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자본주의의 부작용에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풍요와 가난의 문제는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은 끝나지 않을 문제입니다. 어느 시대나 인류는 번영과 풍요를 구가하였지만, 성경은 번영과 풍요를 구가하게 하지도 않고, 가난을 장려하지도 않습니다. 부와 가난은 그것 자체로 찬양을 받거나 정죄할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부하게 되거나 가난하게 되어도 위험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부와 가난은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복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저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하게 된 사람은 무조건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가난하게 되었다고 하여 모두 저주받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부하게 된 것이나 가난하게 된 것으로 신앙과 불신앙을 증명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소명의식이 있어야 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해야 하며 근검절약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자본주의 아래서 성실하게 노력해도 부하게 될 수 없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는 예도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약점이라기보다 인간 자신의 불완전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보다 백배 나은 제도 아래에서도 그런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를 선호하는 중요한 이유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무신론의 전제 위에 세워진 이론이고 자본주의는 유신론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 하나님을 믿기란 불가능하고,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는 하나님을 믿을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가치관을 기독교의 가치관과 동일시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특히 풍요를 추구하는 데서 자본주의의 가치관과 성경적 가치관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대 교회에서는 예수 믿고 부자가 되거나 형통하게 되었다는 간증이 많아서 부와 형통이 마치 신앙의 척도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막스 웨버가 칼빈주의를 오해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조엘 오슨틴 목사 같은 사람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주장이 “긍정의 힘”으로 발표되자마자 한동안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같은 책은 많은 교회가 특별 세미나를 통해 성도를 가르치는 교재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단순히 긍정적인 생각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문제 삼을 필요가 없지만 그런 생각이 곧 성경의 가르침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한 달 보름쯤 되었을 때 양식이 떨어져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실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들의 처한 환경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살지 않는 황무지입니다. 양식을 살 곳도 없고, 꾸러 갈 곳도 없었습니다. 양식이 언제쯤 떨어질 것인지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참으로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 낚시할 바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냥할 산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식물도 동물도 살 수 없는 광야에서 양식이 고갈되어가는 절체절명의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잊지 말았어야 할 사실은 지금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계신다면 그들이 직면한 상황은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실 물이 없거나 양식이 떨어진 상황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상황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상황을 하나님께서 설정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했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은 마실 물이 없을 때나 양식이 고갈된 때에 모세를 원망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인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자신을 원망하는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그들을 시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만나를 주시는 것으로 그들을 시험하신 것은 양식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먹을 것이 풍족해도 하나님을 원망할 것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지적하신 것은 인간은 무엇이 결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40년이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나 수없이 증명되었고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증명되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무엇이 결핍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잘 못 되었기 때문에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경제적 풍요나 형통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오해한 것입니다. 막스 웨버가 오해한 것처럼 우리는 경제적 풍요를 통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풍요와 형통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인 것을 증명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풍요와 가난을 복이나 저주로 사용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앙의 유무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주시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감사하는지 원망하는지 시험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양식을 배불리 먹고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굶든지 배부르게 먹든지 어떤 형편에서든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감사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지 시험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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