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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표상-정의와 공의의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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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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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하였습니다. 음식으로 인하여 분쟁을 발생시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표상을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음식 때문에 형제를 정죄하거나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는 정죄와 분쟁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는데, 구약의 이사야는 하나님 나라 표상을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온전하게 실현되는 때는 주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니까 당연히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고 평강과 희락이 가득하겠지만, 그때가 아닌 지금의 하나님 나라 표상도 역시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고 평강과 희락이 가득한 것이라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진지하고 심각한 도전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온전하게 실현될 때에는 그 나라의 표상이 그 나라 백성에게 심각한 도전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가 완전하게 실현될 때에는 그 나라 백성도 온전하게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표상이 정의와 공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정의와 공의와 평강과 희락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나라 백성에게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여러 설명이 가능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님이 그 나라의 왕이시고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그 나라의 왕이라는 사실은 인류와 우주 만물이 그의 통치를 받고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많은 오해를 할 만큼 신비롭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어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가서 보았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볼 수 없고 ‘정의’를 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없습니다. 사랑이나 정의는 볼 수 없지만, 그 현상은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나 정의의 현상은 사랑이나 정의 자체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그 나라의 현상은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현상이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겨자씨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는 씨도 아니고 싹도 아니고 잎도 아니고 줄기도 아니고 꽃도 아니고 열매도 아닙니다. 씨가 열매를 맺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그것이 가능하도록 역사하는 능력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자는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며 보호를 받습니다. 그 왕의 통치를 받는 것은 그 왕께서 이루시려는 하나님 나라의 표상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왕께서 정의와 공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그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나라 백성은 바로 그 하나님 나라 표상인 정의와 공의와 평강과 희락을 실천하는 순종으로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일반 불신자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기독교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주고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 좀 더 선량하게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구원론도 권선징악 차원에서 이해합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불신자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기독교가 불신자들이 생각하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복음만이 고통 중에 있는 인간에게 유일하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고, 그 복음은 고도의 윤리와 도덕을 능가하는 사상과 철학까지를 포함하지만, 현실적 기독교는 일반 불신자들의 상식적 기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심각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통 기독교가 자유주의자들의 사회구원론을 경계하는 것은 옳지만 사회의 구조적 악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구약의 예레미야는 철저하게 망하여 희망까지 포기해 버린 조국 유다를 향해 구원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날에 정의와 공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는 그 날이 곧 유다가 구원을 받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유다는 살길이 열려 예루살렘에서는 모든 사람이 마음 놓고 살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날에 다윗의 왕손에서 한 의로운 왕이 일어나 올바른 정치를 실현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의미심장한 사실은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이루실 유다의 구원을 정의와 공의의 실현이라고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이런 기대와 전망은 현실적으로 망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조국인 유다가 불의한 세력에 의해서 억압받는다고 생각하였는데, 그 불의한 세력은 바벨론입니다. 당시의 바벨론과 유다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바벨론은 근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제국이었고, 유다는 여러 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겨우 생존의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약소국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을 불의를 행하는 나라로 본 것은 바벨론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대조되는 세상 모든 나라와 집단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궁극적인 희망이고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해야 했던 메시지는 그 날이고 메시야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다른 것은 진정한 복음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임시적이고 가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것은 그날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공자 왈 맹자 왈이 아니라 그 불의에 대한 구체적 저항이고 분명한 분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왕께서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려고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나라 백성은 왕의 통치를 따라 불의를 거부하고 저항하고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불의한 세상과 싸우는 방법은 우선 정의와 공의를 인정하고 외치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물리적인 힘을 규합하여 시위하고 폭력을 사용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씨가 싹을 내는 일에서 싹이 잎을 내는 일에서 가지가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에서 그 나라 왕의 통치를 따라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고 평강과 희락을 이루어내는 방법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불의한 세상 나라를 대항하여 싸워 이기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그 나라 왕이신 주님의 통치를 따라 순종하기만 하면 정의와 공의를 그 왕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나라 왕께서 정의와 공의와 평강과 희락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의 토대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인 우리는 들레거나 세상적인 방법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낙심이나 실망하지 않고 불의한 세상에 대해 저항하고 분노하고 진정한 평강과 희락을 제시하고 선포하고 가르치며 살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불의하고 불법한 세상의 도전에 사회 정의를 위해서 물리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도전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자신은 그럴 용기도 없고 그렇게 할 만한 역량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되는 분은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합법적인 방법으로 불법과 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직접 그렇게 하지는 못해도 그런 운동에 협력하고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 것까지 마다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먼저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 복종하여 정의와 공의와 평강과 희락을 지향하고 성취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백성 전체가 자기와 같아야 한다고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몫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일일이 다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찾고 참여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일과 약한 이웃에게 관심을 쏟으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의 통치인 정의와 공의와 평강과 희락에는 분명 약한 자를 우선 돌아보는 배려가 포함되어 있고 우리가 불법과 부정의에 저항하도록 하시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힘에 의해 세월질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제시한 그날에 일어날 일들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날,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 준비는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 일입니다. 산이 낮아지고 깊은 계곡이 솟아올라 평지가 되고 대로가 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 메타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바벨론이 무너짐으로 일부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나라가 일어나 유다를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재림의 메시야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표상에서도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고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표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기에 역시 아직은 악이 득세합니다. 그러한 사실에 당황해하거나 실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그 궁극적 구원을 선포하였지만, 그 구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확증된 것을 알고 믿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구원은 역사상에서 실현된 은혜이며 그 어떤 방해와 도전에도 무효화 되지 않을 전능한 그 나라 왕께서 이루실 일입니다. 정의와 공의는 우리의 왕이신 메시야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실 것이지만 지금 이 땅에서도 그의 백성인 우리와 함께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통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불의와 죄와 그릇된 욕망에 포로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큰 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큰 은혜의 손이 하나님의 손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그날을 대망하며 오늘을 사는 그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 렘 33:14-16 -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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