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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인간 행위의 최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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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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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인간 교육의 목적은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상의 가치들이 비가치화 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육에서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 희소의 가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치들의 비가치화는 필연적으로 허무주의로 전락하게 됩니다. 현대 젊은 대학생들은 다양한 이념과 주의들(ism)에 둘러쌓여 무한경쟁의 이론적 구조에 무차별적 공세를 받고 있지만 절대 가치의 전제적 토대가 없어서 극심한 심리적 불안과 혼란을 겪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현대인은 비록 의식하지는 못할지라도 지식의 근거에 대한 철학적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극심한 심리적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지식은 인간의 구성물이나 사회적 관습의 결과물이라는 포스트모던 사상의 명제를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절대적 진리나 지식이 사라짐으로 인하여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존재하지도 않은 것의 사라짐을 인하여 허무주의와 실존적 불안을 느끼는 것이 인간 지식의 수준입니다. 파스칼의 우울한 고백처럼 내 삶의 이전과 이후의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 속의 나의 인생과 측량 자체가 불가능한 무한의 우주 공간 속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티끌 같은 나라는 존재가 왜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지, 왜 다른 때가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두렵고 놀라울 뿐입니다. 인간은 시대마다 인간의 실존적 불안의 문제를 자신의 세계관을 통하여 극복해보려고 노력해왔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부터 지식의 추구는 인간 삶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을 위하여 이론적 지식의 추구와 실천적 지혜의 습득을 강조하는 철학과 사상은 동서양 어디서나 낯설지 않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고대 희랍 철학은 현상과 진리, 인식과 사고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와 맺어 온 신비적이고 불분명한 관계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이에 대한 지적 열정이 깨어난 고대 희랍인들은 그 열정을 외부세계에 투사시켜 원천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철학자들이 우주를 관찰하면서 그 아름다움에 놀라고 철학적 호기심을 갖게 되는데, 이들은 이러한 현상들 뒤에는 자신들의 지적 호기심을 강열하게 일깨워 주는 참된 진리가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은 현상과 진리 간의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인간이 우주의 질서를 발견할 때 실존적 행복이 성취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과 우주는 애초에 조화를 이루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관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큰 체계로 통합되었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진리를 소유한 자는 필연적으로 도덕적 선한 상태에 있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절대 선의 형상으로서의 이대아는 곧 우주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최상의 목적은 우주 질서 내에서의 인간의 복지이며 인간의 실존적 행복은 우주 질서에 대한 진리를 소유하는 것을 통하여 얻어집니다. 하지만 소수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대부분의 인간이 진리를 소유하여 행복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타난 동굴 비유에서, 진리란 동굴을 빠져나와 진리를 목격하고 돌아온 선택된 소수의 철학자들이 여전히 동굴 안에 갇혀 있는 다수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직접 목격한 진리와 다른 이에 의해 매개되는 진리가 동시에 존재하게 될 때, 진리는 단지 그럴듯한 개연성의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따라서 회의주의자들은 철학이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회의주의자들이 당면한 이 문제를 자신의 신적 세계관 안에서 구원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희랍의 인간 중심의 목적론과 중세의 신적 세계관 사이의 가장 눈에 띄는 차이 중의 하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중세적 신학 세계관 안에서 고대 희랍적 세계관이 보여주는 인간과 자연 간의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만남은 불가능합니다. 플라톤의 우주는 독립되어 있고 객관적인 영역에 이미 존재하는 이상적 현실의 형태로 존재하는 한편, 중세적 신학 세계관 속의 자연은 신의 창조에 의한 산물입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세계관 안에서 자연을 향한 통로는 오직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합니다. 희랍 철학자들은 사물들이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생각하였으나 성경은 “보여진다”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빛을 창조한 하나님이 그것들을 보이게 하는 원천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것은 인간이 초월적 존재인 창조자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세계를 기본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보았으며, 실존적 행복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이 관계를 벗어난 세계에 대한 그 어떤 이론적 호기심도 인간 행복에 반하는 것이기에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출애굽 사건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사람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에 인상을 받지만, 그것은 홍해를 건넌 다음 그 꿈같은 출애굽을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도록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를 건너게 한 사건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나 사건 한가운데서는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행가 ‘숲’이라는 노래의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고”라는 노랫말이 있습니다. 숲속에서는 숲을 볼 수 없습니다. 숲에서 나와야 숲이 보이는 것처럼 사건 속에서는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스라엘도 홍해를 건넌 후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홍해를 건넌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홍해를 건넌 일에서 누가 주도적 기여를 했는지, 모두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질서와 연합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등의 합리적이고 이론적인 설명은 다 부질없는 일입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지켜보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하도록 홍해 저 편에서 이미 지시하셨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 이 말씀은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언제나 전제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빠져나오기까지 그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에게 닥친 일을 그들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처럼 생각했을 때 불평과 원망을 하였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지만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것이 아니고 모세가 그들을 인도한 것이 아닙니다. 가시적으로는 모세가 앞장서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기 전 진퇴양난에 처하였을 때 이스라엘을 앞에서 인도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구름 기둥과 함께 이스라엘 뒤로 가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였습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한 사실을 목격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그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한때는 하나님을 믿고 무엇이나 할 것 같았던 이스라엘이지만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는 하나님을 믿으며 어려움을 감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서 애굽인들을 섭기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고 화가 날 때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해서는 안 되는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이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사소한 일에 진퇴를 거는 사람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인 것처럼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이나 사람을 섬기겠다는 것은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태도입니다. 그렇게 유치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다음 모든 백성이 다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동기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출애굽 사건은 애굽에 내린 열까지 재앙에서부터 홍해를 건너게 된 사건 모두가 능력의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스라엘이 그 계시의 사건들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기보다 거룩한 하나님이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만으로도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능력이 무한하시지만, 공의도 거룩성도 없다면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이 힘이 세다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잘한다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희랍에서는 강한 것과 능력 있는 것이 찬양의 대상이었습니다. 요즘도 능력이 찬양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현대 정신에 물든 사람들은 강한 것과 능력을 구가하고 찬양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능력의 하나님보다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거룩한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존경하되 하나님의 그 거룩성을 드러내는 사람을 존경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것은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거룩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룩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심은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이 좋다는 정도가 아니고, 그것을 단순히 agree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찬양을 하게 하셨습니다. 찬양은 논리적 설명이나 어떤 감동이나 설득력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에 대하여 인간만이 나타낼 수 있는 반응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찬양했으면 그것을 위해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것이 찬양입니다. 찬양은 맹세나 다짐이나 결심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서도 이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인간 행위 가운데 최상의 가치일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고의 가치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능력이나 성공이나 부나 권력이나 탁월한 재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므로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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