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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몽 아롱과 장폴 사르트르를 통해 생각하는 오늘의 사상과 이념의 대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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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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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레이몽 아롱은 68혁명, 5월 학생운동을, 수구반동(reactionary)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비판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드골 정권의 정책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들어선 정권이며 근본적인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폭력을 정당화 하는 68혁명 학생운동을 비판하며 “정직하고 똑똑한 사람은 절대로 좌파가 될 수 없다. 정직한 좌파는 똑똑하지 않으며, 똑똑한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 모순투성이인 사회주의의 본질을 모른다면 똑똑하지 않은 것이고, 알고도 추종한다면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유명한 촌철살인을 남겼습니다. 전후 프랑스는 “사르트르와 함께 틀리는 것이 아롱과 같이 옳은 것 보다 낫다”는 말이 유행할 만큼 좌파사상이 대세였습니다.

아롱은 반공산주의적 태도로 인하여 미국과 많은 접촉을 할 수 있었고 하버드 대학과 시카고 대학의 방문교수로 초빙되었으며, 포드와 록펠러 재단들로부터 풍성한 연구자금을 지원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아롱은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막스 베버의 사상을 들여오고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사상을 재 부흥케 하는데 힘썼습니다.

아롱은 단순한 우파가 아닌 독립적인 자유주의자였기에 우파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1957년에 프랑스 정부의 알제리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고 알제리의 독립을 위한 집회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6.25가 발발하자 르 피가로지에 장문의 비평기사를 썼습니다. 1977년 방한 후, 르 피가로 지에 한국여행기를 3차에 걸쳐 연재하면서 한국의 경제 발전을 호평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 사회의 정치, 자유, 인권문제에 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경제 발전을 호평한 것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한말이다. 개인소득 5천 달러가 넘으면 민주화는 분명히 올 수 있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아롱은 오히려 “다수의 한국지식인들이 군부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어 실망했다.”고 지적하고 경제수준이 필연적으로 민주시대를 부른다고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의 학생 시위를 바라보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가깝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소련이 붕괴되고 공산주의 정권의 실책과 정의롭지 못한 면들이 드러나면서 그의 통찰력은 빛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지식인층이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게 된 변화는 전 세계적으로도 변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즉, 제3세계의 학자, 학생, 지도자들로 하여금 영.미권 정치사상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대안을 찾기 위해 더 이상 프랑스를 주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롱의 저서와 사상은 국제관계에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진보와 보수 사이의 균형 잡힌 시각과 통찰력을 위해 반드시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20세기 서구 지성계와 우파와 좌파를 대표하는 두 인물인 레이몽 아롱과 장폴 사르트르는 수십 년에 걸쳐 치열한 이념 대결을 벌였습니다. 이 둘을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한 사건이 1950년의 6.25 전쟁이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6.25가 발발하자 아롱은 ‘르 파가로’칼럼을 통해 6.25는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전쟁이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중대한 사건이라고 규정하며 북한을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사르트르는, 6.25는 남한의 괴뢰도당이 북한을 침략한 전쟁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공산당의 주장을 대변한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국제 사회에 의해 6.25는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전쟁임이 확실하게 드러난 뒤에는 북한의 남침을 부정하기가 곤란하게 되자 좌파들의 장기인 말 바꾸기를 통해 남한과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프랑스 공산당과 극좌파들의 6.25는 한반도 통일전쟁”이라는 주장에 동조하였습니다.

이러한 형편에서 사실을 말하는 아롱은 프랑스 공산당과 사르트르와 좌편향의 지식인들에 의해 미 제국주의의 주구라고 매도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 아롱 외에도 우파 지식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좌파들에게 아롱처럼 매도당하는 것이 두려워 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당시의 프랑스 사회는 “아롱과 함께 옳은 것보다 사르트르와 함께 실수하는 편이 낫다.”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롱의 “지식인의 아편”은 그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서 195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아롱은 이 책을 통해 반인권적인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좌파가 ‘진보’의 이름을 독점하고 민중에게 거짓 선전과 선동을 일삼는 현실을 개탄하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역사의 변증법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무산계급의시대가 억압된 자들을 해방시킨다고 했는데, 이는 마치 사이비 종교와 같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공산주의를 사이비 종교와 같다고 비판한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공산주의 이념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결코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사이비 종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공산주의 이념 아래서 소련은 거대한 수용소 국가로 전락 하였는데, 사르트르를 비롯한 좌파 지식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진보라는 이름으로 공산주의 이념을 포장하여 민중을 고난으로 이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진보라는 이름을 독점한 좌파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아편’의 중독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좌파들은 진보라는 이름으로 민중들에게는 열린 마음과 자세를 견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절대적 마르크스주의 이념이라는 아편에 중독되어 객관성이나 보편성과 소통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추종하는 사상과 이념과 주장이 잘못 된 것임이 드러나도 말 바꾸기나 보편적 가치들과 적당히 엮어 프레임을 만들어 씌우기 때문에 대중들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아롱은 절대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의 치명적 결함이 소련의 몰락을 이끌 것이라고 예견하였고 그 예견은 적중하였습니다. 성경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하였지만 우리에게는 열매가 맺기 전에 나무의 실체를 간파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싹을 보고 보리와 밀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농부는 어린 싹을 보고도 밀인지 보리인지를 알아봅니다. 진보나 보편 가치를 강조하는 주장과 운동이라도 그것이 참 진보나 보편 가치인지 아니면 사이비 종교 같은 마르크스주의 이념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인지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롱은 사르트르를 비롯한 좌파 지식인들이 진보나 보편 가치를 빙자하여 공산주의 체제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비호하는 것을 진보적 폭력론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진보 좌파들은 혁명의 완성을 위해 반혁명 세력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 하는 진보적 폭력론자들입니다. 이를테면 공산주의자들은 새로운 미래 건설을 위해 반문명적인 폭력행위를 허용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같은 이론적 바탕에서 소련은 자유를 갈망하는 헝가리 국민을 탱크로 짓밟았습니다.

이념의 절대화가 인류의 보편 가치인 자유와 인권을 짓밟는데도 지식인들이 그러한 현실에 눈을 감은 것은 이념의 우상과 독선의 도그마에 빠진 때문입니다. 좌파들은 자본주의를 착취의 도구라고 하였지만 아롱은 좌파들에 의해 매도 된 시장 경제의 우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공산주의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욕망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선전을 허공의 유토피아라고 간파하였고, 절대로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 폐쇄성 때문에 전제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진보 좌파들은 예나 지금이나 선동적인 “진보팔이”로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호도하여 문명의 퇴보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호도 된 나라들 중에는 수 십 년의 문명의 퇴보와 경제의 파탄을 경험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는 인간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키우고 자체 안의 모순과 실패를 파악하고 치료하는 자체 프로그램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의 자기모순과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월등하고 탁월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6.25 전쟁을 두고 사르트르와 좌파들은 “북한을 이해하려면 북한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는 소위 ‘내재적 접근법’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들의 내재적 접근법은 남침이라는 사실보다 그 전쟁에 대한 해석(통일전쟁)이 더 중요하다는 식의 궤변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나름의 사회과학이기 때문에 지식인들에게 아편과 같다는 아롱의 지적이 너무나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내재적 접근법 같은 시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바라보면서 비판하여왔습니다.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을 시민혁명의 모범처럼 생각하지만 그 프랑스 혁명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공격의 대상으로 설정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이념과 이론을 생존을 위한 기댈 언덕으로 여겼고, 그들에게 있어서 마르크주의는 곧 모든 것을 판단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바이블이었습니다. 독일의 마르쿠제, 헝가리의 루카치, 프랑스의 알튀세르 같은 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아롱의 주장을 외면하고 소련을 찬양한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 더 주목하였습니다. 사르트르는 6.25를 “미국의 사주를 받은 남한의 북침”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다가 사상적 동료였던 메를로 퐁티와 결별하였고, 강제수용소 문제로 세계의 비난을 받았던 소련을 “비판의 자유가 완벽하게 보장됐다.”고 하다가 카뮈와도 절교하였습니다. 좌파 지식인들은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사회주의가 무력하게 된 21세기에 들어서도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좌파지식인들이 새롭게 기대고 있는 사상적 언덕은 생태주의입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이념적 도그마를 뒤집어씌우는 순간 차원은 달라집니다. 지금의 진보주의나 좌파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생태주의의 본질은 반자본주의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인정하지 못하듯이 생태주의가 반자본주의와 함께 하는 한 세계 시장을 대표하는 미국은 그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태주의는 필연적으로 반미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둥지를 튼 마르쿠제는 거의 모든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그 아편을 권하여 중독에 빠지게 하였고 작금에는 민주당과 언론과 글로벌 기업인들과 딥 스테이트까지 그 영향 아래 허우적거리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현실적으로 보수 우파 인사의 미국 대학에서의 공개강연은 극단적 좌익들의 반대로 인하여 거의 불가능하거나 개인 경호원을 대동하고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경찰관 소빈에 의한 플로이드의 죽음을 순식간에 인종주의와 제도적 인권문제로 프레임을 씌워 미 전역에서 폭력시위가 가능하게 한 것은 우연이거나 자연적인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플로이드의 죽음이 수많은 폭력 시위자들을 만들고 그들이 대통령과 경찰을 공격하고 교회당을 불태우고 수많은 상점들을 강탈하는 정당한 원인과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자들이라고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소빈이 플로이드를 죽게 한 것은 법대로 사실하여 처리할 일이고, 플로이드는 범법자였는데 억울하게 죽었으니 범법 행위까지 미화 되어서는 안 되고 억울하게 죽은 것은 동정해야 합니다. 경찰 소빈의 실수였다면 안타까운 일이고 의도적 이였다면 비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론과 시위자들이 플로이드를 인권을 위한 순교자로 만드는 것은 사회정의가 아닙니다. 인간은 언제 어디에서나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싸우는 일도 사양하지 말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건을 자유와 인권 문제와 연관 짓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플로이드의 죽음 때문에 경찰을 없애야 한다거나 생태주의가 마치 자본주의 자유시장 체제를 뒤집어엎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태도입니다.

참 지식은 하나님께서 내신 보편 가치를 깨닫고 배우고 존중하며 지키는 것이고 무엇보다 법과 질서를 통해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론이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볼 때 자유주의와 자유시장 경제 제도를 버리고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에 나는 신앙인의 양심상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와 주장에 대해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이지만 사상과 철학과 이념과 정치와 문화는 덜 나쁜 것을 선택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무를 펼쳐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기독교와만 관계하시고 다스리시거나 관심을 쏟으시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그 영향을 미치는 모든 곳과 분야까지 다스리시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도 하나님과 함께 그 모든 영역에 관심을 기울이고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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