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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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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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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시골 어느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보리타작이 한창이던 때였으니까 6월 쯤 되었을 것입니다. 시골 장날이 되어 아버지는 장에 가고 두 아들은 보리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사가지고 돌아오던 중 집 가까이에서 이웃을 만나 이야기가 길어지자 시장 본 물건들을 집에 들여다 두고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보리타작을 하던 두 아들들은 잠간 쉬는 중이었습니다. 쉬었다가 다시 타작을 하려고 일어난 아들이 아버지가 사 온 물건들 중 가스 활명수가 있는 것을 보고 타작하느라 고생하는 아들 먹으라고 사 온 줄 알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활명수 병에는 농약이 들어 있었습니다. 농약을 마신 아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몇 번이고 방을 들락거리다가 온 동내를 몇 바퀴 돌고는 쓰러져 죽었습니다. 옛날에는 농약을 가스 활명수나 사이다 병에 담아서 팔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고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그런 사고가 종종 일어났지만 농약은 여전히 가스 활명수 병이나 사이다 병에 담아 팔았습니다. 농약 중에 가장 치사율이 높은 것이 제초제입니다. 제초제는 가장 최소량을 먹어도 반드시 죽습니다. 그렇게 치명적인 농약을 병째 마시면 몸 뿐 아니라 정신이 견디지를 못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온 동네를 몇 바퀴 돌다가 쓰러져 죽습니다.

그렇게 치명적인 농약이라도 농약 병에 담겨 있으면 비교적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겉에 농약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농약이라고 쓰여 있어도 위험합니다. 실제로 글을 몰라 농약을 마시고 죽는 사고도 일어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옛날에는 가스 활명수 병과 농약 병의 사이즈가 비슷해서 그와 같은 사고가 더 쉽게 일어났습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에도 겉에 가스 활명수라는 글자가 붙어 있는 농약 병이 몇 개씩이나 늘 있었습니다. 그래도 별 탈이 없었던 것은 우리 집은 한 번도 가스 활명수를 사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스 활명수 병에는 당연히 농약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에 가스 활명수를 종종 사 먹는 사람들은 당연히 가난하여 그것을 사 먹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위험했을 것입니다.

뜬금없이 농약사고에 대한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은, 가스 활명수 병에 농약을 담아 팔고 사고 했던 것이 이 시대의 정치 사회 현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온갖 좋은 음료수가 지천이지만 옛날에는 나의 기억으로 사이다와 노란 식용물감에 사카린을 탄 오렌지라는 음료수가 전부였습니다. 가스 활명수는 소화제 겸 고급 음료수였기에 그것을 사먹을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은 그것을 마시는 사람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러한 때 헌 가스 활명수 병이 아니라 깨끗한 가스 활명수 병을 만나면 그 안에는 시원하고 똑 쏘는 맛있는 가스 활명수가 들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쉽고 곧 마시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나의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 문득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농약은 내용이고 가스 활명수 병은 형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모두 치명적 농약을 담은 가스 활명수 병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이들은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려는 관성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나는 복잡한 철학적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식과 내용의 관계는 헤겔 철학을 비롯하여 서양철학 전반에 걸쳐 가장 어려운,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주제들 중의 하나입니다. 헤겔에 의하면 형식 없이는 어떠한 내용도 존재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내용 없이는 어떠한 형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자를 서로 완전히 구별하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 대한 헤겔의 핵심적인 주장은 형식과 내용은 절대적으로 상호 전환하며, 그래서 그것들은 동등하게 본질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도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내용이고 하나님 나라 백성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담아내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분을 내용으로 신자를 그릇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고후 4: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는데 성경 다른 곳에서는 천국이나 복음을 보배라고 하지만 여기서 보배는 직분을 말하고 질그릇은 연약한 신자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보배를 은 그릇이나 금 그릇에 담지 않고 질그릇에 담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언제나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명을 못 지킬 것을 아십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그 사실을 압니다. 그렇지만 지키라고 당부도 하고 경고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준을 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지만 소망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계명을 온전하게 지킬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능성이 없는 그들이 계명을 지키고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능력은 언제나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인정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능력이란 구원과 생명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그릇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질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금 그릇이나 은 그릇이 아닌 질그릇이라 함은 그릇 자체가 아닌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질그릇”의 의미는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질그릇이 하나님의 능력이나 복음을 드러내지 않고 그릇 자체를 돋보이게 한다면 그것은 곧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 독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 즉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능력이나 복음을 드러내는 질그릇이 아니라 금 그릇이 되어 자신과 타인에게 치명적인 독을 쏟아낸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나 그리스도인이 리더십이나 인기나 권력이나 재력이나 학문이나 예술이나 그 외에 어떤 능력이나 재능이라도 그것 자체를 추구하거나 자랑하거나 드러내는 것은 그 자신과 많은 사람에게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나 교회 지도자가 비록 고결한 신앙적 인품은 지니지 못하더라도 치명적 독을 쏟아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천국 문을 닫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을 강조하고, 기도를 강조하고, 금식과 헌신과 충성을 강조하는 교회 지도자가 나라 법을 어기고, 교회법을 어기고, 공금을 횡령하고, 거짓말 하고, 스캔들을 일으키고, 폭력을 행하거나 사주하고, 탈세하고, 속이고, 모함하고, 패거리를 짓고, 자기를 반대하는 이들을 저주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갈등과 증오심을 부추기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교회 지도자나 교인들 천만 명이 함께 모여 소리를 질러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규모나 물리적인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시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자라서 새들이 깃들이는 큰 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싹도 아니고 잎도 아니고 줄기도 아니고 꽃도 아니고 열매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싹이 돋게 하고 잎이 나게 하고 꽃이 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입니다.

세상은 악이 지배합니다.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 이만큼 가치질서와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과 악을 억제하시는 간섭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특별 은총으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한다면 악은 더 억제되고 정의와 평화는 확대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의 영적 형편을 생각할 때 세상은 더욱 악하게 되고 혼란과 무질서로 함몰할 것만 같습니다. 교회 때문에 세상이 더욱 악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가 악을 억제하는 기능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책임이 큽니다. 어떤 면에서는 세상보다 교회가 먼저 원칙을 버리고 반칙을 선호하고, 거짓으로 진실을 억누르고, 무식으로 유식을 비난하고, 불법으로 법치를 왜곡하고,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 대신 온갖 음모론에 휘둘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될 일들만 골라서 하는 경향이 심각합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 지도자들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사 41:14-15절에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

여기 “버러지”를 개역성경은 “지렁이”로 번역하였습니다. 지렁이를 버러지로 고친 것은 아주 잘못한 것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렁이와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계를 대조시키십니다. 버러지 중에 지렁이는 가장 연약한 버러지입니다. 강한 타작기계와 대조가 되는 것은 지렁이가 제격입니다. 버러지 중에는 딱딱하고 강한 버러지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러지 같이 유약한 이스라엘을 타작기계로 사용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렁이를 타작기계로 바꾸어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렁인 채로 사용하셔서 산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특별한 경우 솔로몬처럼 지혜를 주셔서 사용하시기도 하시고, 삼손처럼 힘을 주셔서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미련한 대로 사용하시고, 약한 대로 사용하시고, 무식한 대로 사용하시고, 가난한 대로 사용하시고, 병든 대로 사용하시고, 천한 대로 사용하시고, 지렁인 채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혜와 능력이 특출하게 뛰어난 존재로 고쳐서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지렁인 채로 질그릇인 채로 사용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만 드러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힘이 있어 잘하고, 권세가 있어 잘하고, 머리가 좋아서 잘하고, 지혜가 있어서 잘하고, 돈이 많아서 잘하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모고 자기가 잘한 줄 알고 자랑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도 망하고 세상도 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못나고 천하고 무능한대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고전 1:26-29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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