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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와 형통에 감사, 고난에 감사, 감사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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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9-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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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언젠가 “가난은 불편하고 풍요는 위험하다.”는 주제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먼저 풍요와 형통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풍요와 형통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불편하고 불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과 좌절과 낙심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풍요와 형통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풍요와 형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풍요와 형통을 주시는 방법으로 대부분의 경우 인간의 성실한 노력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성실한 노력을 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하여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 그 은혜는 풍요와 형통뿐만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포함합니다.

성경에서나 현실에서 고난과 역경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이나 역경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풍요와 형통을 구합니다. 풍요와 형통을 원하고 구한다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얻어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원하고 추구하는 것을 상당할 정도로 얻게 됩니다. 만약 인간이 아무리 풍요와 형통을 구해도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인류는 일찍이 그것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하셨을 때, 그 의미는 기도의 응답뿐만이 아니라 창조 질서에 따른 성실한 인간 노력의 결과까지를 포함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원하는 풍요와 형통이 막상 주어져서 누리게 될 때쯤이면 가난과 어려움은 어느 정도 사라지고 난 다음이기 때문에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인간이 풍요와 형통을 구했다면 그것이 주어졌을 때 당연히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난의 불편함과 불통의 절망감이 사라졌기 때문에 풍요와 형통의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풍요와 형통의 가치는 그 반대 상황을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결핍과 고통까지도 은혜인 것은 그것들이 일상에서 무심히 생각하고 취급했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풍요와 형통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 미국에서 보내준 구호품 티셔츠 하나에 한 없이 만족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칼라와 한 쪽 어깨 쪽은 검은 색이고 나머지는 노란 색깔의 그 티셔츠를 나는 너무도 좋아했었습니다. 색상과 천의 부드러움이 당시 한국의 의류 수준에서는 불가능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 티셔츠를 모든 친구들이 부러워했고 나는 그것을 입고 다니는 것으로 특권의식까지 느꼈었습니다. 사실 그 티셔츠는 사이즈가 나에게 맞지 않아 헐렁하여서 지금의 수준에서 본다면 촌티 줄줄 흐르는 꼴불견이었겠지만 당시 나에게 그 정도 맞지 않는 것은 전혀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티셔츠가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초등학교 2-3학년쯤으로 기억됩니다. 아버지가 신학교 다니실 때 서울에서 운동화와 책가방을 사오셨습니다. 당시 내가 다니던 4학년까지 밖에 없던 분교에서 운동화를 신은 아이는 나뿐이었고 등에 가죽 가방을 메고 오는 아이도 나뿐이었습니다. 당연히 이아들의 관심은 내가 신은 운동화와 가죽 가방에 쏠렸습니다. 부러워하는 이이들, ‘가방쟁이’라며 오히려 놀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특권으로 느껴져서 행복하였습니다. 명절 때 먹을 수 있는 떡과 할아버지 생신 때 먹을 수 있었던 닭고기 국에 행복했던 기억들이 있고, 어쩌다 잔치 집에 가서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던 순간들도 행복했었습니다. 잔치 음식 배부르게 먹고 난 후에는 배탈이 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또 다시 잔치 음식 먹을 기회가 주어지면 배탈이 나더라도 또 배부르게 먹었었습니다. 지금은 옷이나 신발이나 음식이 넘쳐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기까지 합니다. 풍요와 형통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가난과 결핍을 뼈아프게 경험했던 세대들도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풍요와 형통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풍요와 형통에 대하여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어쩌면 무리한 요구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풍요와 형통이 상대적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최소한의 의식주를 누리는 것에서도 풍요를 경험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것은 고난에 대해서입니다. 고난 자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소한 일상을 풍요와 형통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노환이나 중한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서 먹지도 못하고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 하는 이들을 종종 만나고 나면 그들이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세상이 좁다고 느낄 만큼 폭넓게 활동하던 사람, 예지와 지혜가 번뜩이든 사람, 남이 가지지 못한 탤런트로 사람들에게 감동과 유익을 주던 사람, 인생의 꿈과 계획이 유난히도 컸던 사람들이 병상에 누워 눈을 깜빡이는 것과 남이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말 밖에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간절하게 소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친구를 만나서 커피나 차를 마시며 대화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공원을 산책하고, 가족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면 그들에게 그러한 사소한 일은 기적이 될 것입니다. 중국 속담에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바다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며칠 전 무거운 것을 들다가 허리를 삐끗하여 세면대에서 세수하기 위해 허리를 굽힐 수가 없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줍거나, 허리를 굽혀 양말을 신거나, 앉았다가 일어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걷는 것, 보는 것, 음식과 물을 삼키는 것, 말하는 것, 듣는 것, 맛을 느끼는 것, 노래할 수 있는 것, 큰 소리로 웃는 것 등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늙어서 활동할 수 없고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 갈 때가 아니라 아직 젊었을 때 예상치 못하게 당하게 되는 고통이나 고난을 통해 일상의 일들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참으로 값진 것입니다. 그런 것은 고난이나 고통이 아니면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고난 자체가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지향하거나 의미하거나 도달하게 하는 것의 가치를 생각할 때 고난의 가치는 참으로 값진 것이며 그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마지막으로 감사에 감사하는 것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감사에 감사하는 것이란 감사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거의 모든 경우 감사는 결론입니다. 감사에 대하여 더 이상 어떤 의미나 설명을 부여할 필요를 우리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가지는 이 결론적 성격이 말만의 감사가 될 수 있게 합니다. 우리는 말만의 감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우리는 말만의 감사라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말만의 감사라도 괜찮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말로 밖에 감사할 수 없는 딱한 경우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한 말씀 중에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 8:1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말만의 감사는 성경이 가르치는 자원하는 헌금과 헌신의 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감사를 외치지만 진정으로 감사를 느끼고 실천하는지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나도 나이가 들면서 눈이 점점 침침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이들은 당뇨나 사고로 시력을 잃기도 합니다. 안구 하나 갈아 끼우려면 1억 원, 신장 바꾸는 데 3천만 원, 심장 바꾸는 데는 5억 원, 간 이식 하는 데는 7천만 원 등이 든다는데,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은 자기 몸에 51억 원이 넘는 재산을 지니고 다니는 것이라고 하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계산에 빠뜨린 것까지 포함하면 의학적 설명을 통해서도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엄청난 혜택을 누리면서 말만의 감사만 한다면 이는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정하는 사람이라는 성경의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역대상 29장에 다윗 왕과 온 백성이 성전 건축을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재물을 드렸고 재능이 있는 자는 재능을 드렸는데 온 백성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신이 드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우 특이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는데,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라고 하며 감사와 찬양의 이유를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자원하여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수 있었음에 감사하는 대목은 참으로 특이하고 인상 깊은 차원이고 수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감사가 결론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음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말만의 감사로는 할 수 없는 감사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풍요와 형통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풍요와 형통 자체를 터부시 하면 안 됩니다. 다윗이 이 감사를 드릴 때 다윗 왕국은 왕으로부터 온 백성이 풍요와 형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풍요와 형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말로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많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인정하고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풍요와 형통의 복을 받아 누리는 자가 겸손하고 감사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풍요와 형통을 누리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 세상에 임시 거주자로 진지하게 자각하여 인정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와 형통에 집착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상대화 하여 자신들의 삶은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겸손함으로부터 풍요와 형통에도 감사하고, 고난에도 감사하며, 감사하며 살았던 것에 또 감사할 수 있는 경건의 능력이 동반된 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대하 29:11-15).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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