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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의 중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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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9-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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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사람들은 중세를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계관시인(桂冠詩人)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라고 합니다. 암흑기라는 말을 중세의 별칭처럼 사용하는 것이 중세에게는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암흑기라는 말은 르네상스 이후의 관점에서 붙여졌습니다. 르네상스 이전 시대를 통칭해서 암흑기라고 부르지만 중세시대 중에서도 어두운 면만을 강조할 경우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즉 유럽문화의 전성 시절을 이끌던 로마제국이 멸망함과 동시에 야만족들의 침략과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와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서유럽은 암흑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이것을 가리켜 중세 암흑기라는 것으로 통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세는 곧 기독교 역사입니다. 로마제국은 망했지만 기독교가 망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가 망하지는 않았지만 중세가 암흑기로 불러지는 것은 곧 기독교의 불명예입니다. 중세를 일컬어 암흑기라고 하는 것이 자칫 지나치게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일이 있다는 학계의 자성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암흑기라는 말은 개인이나 국가나 역사의 한 시기 가운데 불가피하게 겪었던 비극적이고 불행한 기간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1536년 제네바 인들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만든 주화에는 “어둠 뒤에 빛이 있으라.”(Post Tenebras Lux)라고 새겨 넣었습니다. 결국 교회사적으로도 중세는 어둠의 시기였고, 종교 개혁 시대는 빛이라는 역사관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중세를 암흑기라고 부르게 됨으로서 천년의 중세를 어두운 창고에 처박아 넣고 문을 잠가버린 꼴이 되어버려 중세에 묻혀 있는 보석까지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시대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너무나 어둡기 때문에 암흑기라고 불리는 중세를 여행해 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중세를 공부하려고 할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중세로 볼 것인가 부터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중세”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469년의 교황청 도서관 사서였던 지오반니 안드레아 (Giovanni Andrea)입니다. 그는 르네상스의 색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사는 시대가 과거와 다름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역사적 통찰은 17세기에 이르러 독일 지식인들에 의해 고대, 중세, 근대라는 시대 구분을 하게 하였습니다. 자크 르 코프 (Jacques Le Goff)는 중세의 4-9 세기까지를 중세 초기로, 10세기에서 14세기를 중세 중기로,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를 중세 말기로 보는 넓은 연대 구분을 하였습니다. 코플스톤 (Frederick Copleston)은 철학사의 관점에서 교부 시대를 중세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정치적으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5세기를, 교회 사적으로는 마지막 교부이자 첫 번째 교황인 그레고리 1세를 기점으로 6세기를 중세의 출발점으로 보았습니다.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는 중세를 476년에서 1492년까지라고 못 박기도 하였습니다. 일반적 역사는 주로 로마의 멸망에서 르네상스 시대까지를, 곧 5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1,000 년을 중세로 봅니다. 그러나 중세는 기독교의 역사이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로 인정받은 313년, 즉 4세기를 시작으로 종교 개혁이 일어난 16세기까지로 봅니다. 결국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중세는 그 절반에 해당하는 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단순히 암흑기였다는 말로 특징 지워 버리기엔 그 역사가 너무나도 유구합니다.

현대는 중세의 자궁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현대가 중세로부터 나왔으면서도 중세를 캄캄한 창고에 처박아 넣어놓고 문을 굳게 잠가 놓아서 중세를 잘 모르고 중세를 잘 모르기 때문에 현대를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온갖 오해와 진부함이 중세를 억누르고 있어서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대작 「중세」의 서문에서 중세는 무엇이다라고 하기보다 차라리 중세는 무엇 무엇이 아니라고 열거하는 편이 낫다고 하면서襬가지의 중세는 아니다.’라는 논리를 전개하였습니다. 심지어 자크 르 코프는 중세의 천 년을 암흑이 아닌 “위대한 천 년”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필립 샤프 (Philip Schaff)는 중세를 평가하면서, 중세의 빛은 성경 말씀이 발산하는 태양 빛 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전승이라는 별빛과 달빛이었다고 하였고, 이 빛이 야만성과 이교성의 암혹을 뚫고 들어가 어둠을 몰아냈고, 위대한 종교 개혁의 광명한 빛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무지한 민족을 비추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평가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중세는 그 천 년의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미스터리와 혼돈, 무지와 맹신, 그리고 광기로 얼룩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인들 중에는 어린 아이처럼 조금의 의심도 없이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았습니다. 신앙이 모든 학문과 정치와 문화까지 지배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주도하였고, 대학을 설립하며, 엄청난 학문과 건축과 예술과 문화를 이루었습니다. 기독교 세계의 모든 나라와 민족이 하나의 언어로 된 성경을 읽고, 하나의 언어로 예배드리며, 모든 사람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를 통해 살았던 천년의 세월이 중세입니다. 중세는 바로 기독교 신앙의 시대이자, 기독교 문명의 시대였습니다. 천 년 동안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로 된 성경과 교회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건축은 고딕 양식으로 통일 돼 있었고, 지붕은 붉은 색으로 통일 되어 있었습니다. 마을 중심 높은 곳에는 교회당이 있었고, 도시 중심에는 대성당의 첨탑이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교회당의 종소리에 따라 사람들은 일어나고 잠들었으며, 교회당 묘지는 천국과 영생을 의미했습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은 마녀의 존재를 믿었고, 심지어 연옥이라는 가상의 사망 후 세계를 수용했고, 마리아를 비롯한 성자들의 중재를 믿고 미사라는 개혁교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예배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수사들이 야만족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개인적 회심뿐 아니라 한 도시와 한 민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집단적 회심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설교나 교리 교육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세례 시 신앙고백의 뜻조차도 모른 채 라틴어로 된 그것을 암기했습니다. 켈트족과 튜턴족, 슬라브족이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기독교와 함께 문자, 학문, 농경, 법, 예술도 받아 들였습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잉글랜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까지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과학과 예술도 기독교 신앙에 동의했고, 심지어 황제마저도 기독교 앞에 무릎을 끓었습니다.

중세는 정치, 경제, 사회가 봉건제라는 튼튼한 사회 구조 속에서 숨 막히는 지경의 경직성과 또한 해학성을 지녔습니다. 중세 인들을 세 부류, 즉 성직자, 기사, 농노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직자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사는 싸우는 사람, 농노는 일하는 사람이었으며, 이는 곧 세 개의 신분이자 계급이었습니다. 중세를 떠받치는 두 기둥 같은 그룹이 기사와 학자였습니다. 박사에게는 기사의 작위와 같은 특혜를 부여했습니다. 기사가 가장 중세적인 이미지를 지닌 집단이었습니다. 당시 기사단은 사제와 귀족을 보호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천상의 천사 기사단을 지상에 복제 해 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기사단은 금욕과 절제, 이타심, 충성심 외에도 로맨스와 결투정신, 기사 서약과 맹세 같은 인간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기사단은 예루살렘 기사단, 스페인 기사단, 신전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이었는데, 이는 수도자들의 종단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후 셀 수 없이 많은 기사단들이 생겨났습니다. 황금 양털 기사단, 성모 기사단, 황금 방패 기사단, 심지어 고슴도치 기사단, 심지어 사냥개 기사단까지 등장 했습니다. 기사 계급은 사제와 농노 계급 사이에서 경직된 중세 사회를 해학과 상상으로 이끌며 종교와 문학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중세를 특징짓는 두 세력인 교황과 황제는 언제나 지배권을 두고 긴장과 갈등과 불화와 투쟁의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1075년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교황 칙서를 통해 “로마 교황 만이 보편적 교황으로 불려야 마땅하다”라고 했고, 이후에 교황은 성 베드로의 대리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교황의 수위권을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이런 권력의 갈등은 영적 권력과 세속적 권력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 샤를마뉴(Charlemagne) 시대에 와서는 황제-교황이라는 제왕적 사제직으로 발전했고, 1077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관용을 구걸한 저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중세 교회는 언어의 다양성을 원죄의 결과들 중 하나라고 말하면서 중세 문명의 동일성, 나아가 유럽 문명의 통일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라틴어를 고집했습니다. 라틴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자는 야만인으로 짐승 취급을 했습니다. 당시 라틴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특권을 가진 집단에 속하였음을 의미했습니다. 로마 교회는 라틴어만을 사용했고. 모든 나라와 민족은 라틴어로 번역 된 불가타 성경만을 사용했으며, 라틴어로만 예배를 드리고, 모든 종교 음악은 라틴어로 불렀습니다. 다중 언어 사용은 타락의 결과이기 때문에 단일 언어로 라틴어만을 사용하도록 통제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중세를 형성 한 주요 요소로 수도원과 대학을 들 수 있습니다. 중세 인들은 천상과 지상이 혼재 한 시대를 살면서 세속을 경멸하여 세속으로부터의 도피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러한 경향이 수도원 제도를 만들었고, 불행하게도 대표적인 도미니크 교단과 프란체스코 교단은 민중에게 위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수도사들이 교황청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때 수도원은 지상에서 가장 깨끗한 곳이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장 타락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수사들의 수도복은 유럽의 의복 문화에, 수도원의 식단은 유럽의 보편적인 음식문화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수도원은 수도원 학교와 주교좌성당학교를 운영했는데, 이것이 학교와 교육의 발전을 촉진했고 마침내 이탈리아에 볼로냐 대학과 파리에 파리대학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중세 대학은 3학(문법학, 논리학, 수사학)과 4과(산술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자유학예에서 의학, 법학, 신학의 상위 학부가 설립 됐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의 집대성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중세의 역사에서 누구나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은 십자군 원정과 도시와 상업의 발전입니다. 기독교는 외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지만 유대인 대량 학살과 약탈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남겼습니다. 또한 상업의 부활과 함께 중세 도시가 탄생했고, 농촌에서는 토지 소유의 한 형태인 장원이 생겨났습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종교 재판을 통해 마녀 사냥에 미쳤고, 중세 인들은 여행을 즐기는가하면 인육을 먹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중세에는 성경보다는 전승에 의존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중세는 성경이 닫혀서 어두웠습니다. 성경을 소유하지 못하고 읽지 못하고 배울 수 없는 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보여 준 시대가 중세입니다. 그 결과 중세의 교회는 계시 의존적 종교가 아니라 인문학의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중세 인들은 성경의 종교가 아닌 상상의 종교를 믿었고, 그 결과 중세는 판타지로 넘쳐났습니다. 중세는 소름이 돋을 섬뜩 할 정도의 단일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는가하며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 통제 받지 않고 드러나는 해학성을 보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여행에 대한 동경과, 세속으로부터의 도피, 로맨스와 에로스가 혼재했습니다. 성경의 언어, 강단의 언어, 종교의 언어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기호에 불과하였습니다.

중세는 온갖 상상과 무지와 왜곡이 판을 치기도 하였지만 또 한 편 성경 시대와 종교개혁시대와 더불어 신학과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 하나님 중심이었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시대이고, 거짓과 왜곡을 걸러내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중세에서 부정적인 것들을 잘 가려내면 아주 귀한 보화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중세는 이 시대에 비하면 보화가 감추어진 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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