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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논쟁'' 5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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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2019-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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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환중세 종교개혁 역사가운데 ‘라이프치히 논쟁(Leipzig Debate)’이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이번 주 7월 14일부터 20일 사이에 벌어졌다. 1519년에 일어난 사건이니 금년이 꼭 ‘라이프치히 논쟁 5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교개혁하면 1517년을 기억한다. 그래서 지난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으로 지키며 세계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독일 등 종교개혁 발상지를 여행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신문도 수차례 이 학습여행을 실시한 적이 있다. 그 바람에 나도 독일이나 스위스, 프랑스를 수차례 드나들었다. 그 1517년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 항목에 걸쳐 카톨릭 교회를 비판하는 ‘반박문’을 써 붙인 것을 기념하는 해다. 이 일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2년 후에 벌어진 라이프치히 논쟁은 교황청에서 루터에게 “그래? 니가 그렇게 잘났어? 촌동네 비텐베르크에 사는 일개 사제 주제에 뭐가 잘 났다고 교황님께 딴지를 걸어? 그럼 해코지는 안 할테니 한번 논쟁으로 붙어 보자. 네가 얼마나 잘났는지 한번 나와 봐!” 말하자면 그런 분위기에서 성사된 삼엄한 논쟁이었다.

라이프치히는 동독에 속해 있던 도시로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지금은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도시가 되었다. 이 도시엔 독일 통일을 위해 비폭력 평화기도회를 시작했던 성 니콜라이 교회당이 있는 도시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유명한 교회당은 성 토마스 교회당이다. 카톨릭교회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루터교회다. 이 교회당이 유명한 두 가지 이유는 ‘음악의 아버지’ 세바스찬 바흐의 무덤이 있는 교회당이다. 교회당 밖에는 그의 동상도 서 있다. 바흐는 평생동안을 이 교회 칸토르(합창장)로 살다가 생애를 마감했다. 그래서 성 토마스 교회하면 바흐를 떠올린다.

이 교회가 유명한 두 번째 이유, 그것은 루터의 라이프치히 논쟁이 여기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교회당 안에는 이 역사적 논쟁을 기념하는 동판 속에 루터와 에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

루터의 맞상대 요한 에크(Johann Eck)는 누구인가? 당대 최고의 신학자였다. 루터가 교황청에 대드는 것이 그냥 변두리에 사는 한 사제의 치기어린 신학적 독백이 아니라 그의 주장이 은근슬쩍 유럽으로 퍼져가면서 형성되는 반카톨릭 흐름이 심상치 않자 교황청에서 뽑고 뽑아 교황을 변론해줄 최고의 신학자로 낙점된 이가 바로 에크였다.

에크가 라이프치히에 도착하자 시의회는 76명의 호위병을 붙여 주었다. 76명의 호위병? 종교개혁 당시의 분위기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며칠 후에는 드디어 루터 측에서 절친 멜랑히톤을 포함하여 6명의 비텐베르크 일행이 이 도시에 도착했다. 이 루터일행을 호위하겠다고 무기로 무장한 학생 200여명이 함께 들이닥쳤으니 이 논쟁이 얼마나 살벌했고 목숨을 건 투쟁이었는지 짐작케 해준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조목조목 카톨릭 교회를 비판했다. 그의 모든 비판은 지금 우리 개신교가 믿고 있는 교리로 정착되었다.

우선은 교황무오설을 치고 나왔다. 교황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그는 무오하다고 에크는 주장했지만 루터는 교황도 인간이며 하나님 앞에 우리와 같은 죄인으로서 죄와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황의 권세를 허위라고 반박한 것이다. 감히 교황의 권세를 허위라고 말할수 있었던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둘째는 성경의 권위에 관한 것. 루터는 ‘오직 성경’만이 신앙의 도리와 생활의 규범이라고 주장했지만 에크는 오직 성경 사상은 중세 말 현대주의 사조를 따르는 이단들의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셋째 에크는 연옥사상이 외경인 마카비서에 나오므로 성경적이라고 주장했지만 루터는 마카비서가 성경이 아닌 외경에 불과하므로 신적인 권위가 없고, 당연히 연옥교리는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넷째 에크는 면죄부와 고해성사가 교회 전통에 근거한 것이므로 교회가 따라야 한다고 했고 루터는 교회의 전통이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잘못될 수 있다고 반박하면서 면죄부와 고해성사는 성경의 교훈에 배치된다고 맞섰다.

게임은 루터의 승리였다. 이 논쟁이후 루터는 독일의 국가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열받은 에크는 교황청에 하소연했다. 제발 마틴 루터를 파면하라고. 결국 교황 레오 10세는 이듬해 “오 주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옵소서”란 파문교서를 통해 루터의 책을 불태우고 카톨릭 교회서 그를 쫓아냈다.

이때 루터가 어찌했는가? 교황의 교서를 비텐베르크 한 참나무 밑에서 지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에 태웠다. 그 아름드리 참나무는 역사의 증인인 양 작은 표지석과 함께 지금도 비텐베르크 관광코스로 자리잡고 있다.

라이프치히 논쟁 500주년에 다시 곱씹어 보는 마틴 루터의 결기. . 진리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수 있다는 그의 용단이 없었다면 ‘프로테스탄트 처치’가 과연 탄생할 수는 있었을까?

조명환 목사(발행인)
ⓒ 크리스천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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