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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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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9-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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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예수님을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지난주에 쓴 글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썼고, 오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에 대해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골로새서는 에베소서와 비슷한 시기인 주후 62-63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용도 에베소서와 비슷하게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를 중심으로 한 교훈을 강조합니다. 차이점이라면, 에베소서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지체에 비유하여 서로 존중할 것을 강조하였고, 골로새서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일 뿐 아니라 만물위에 뛰어나심을 강조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이나 기독교의 가르침을 여러 다른 종교나 철학이나 사상들 중 하나로 취급합니다. 철학이나 사상이나 과학이나 기타 세상적 학문이나 이론은 기독교를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 이성의 능력으로는 그 이상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 이성의 산물인 지식으로 성경 계시의 초월성을 인정하는 것은 지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불가능합니다. 합리적 지식 이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아닌 합리적 지식 이론으로 성경 계시에 접근하면 성경 안에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라서가 아니라 믿을 만 하지 않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한“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한 것입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이성의 한계를 극복하게 되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의심과 갈등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가 그러한 과정을 겪고 난 후 믿음을 갖게 되었기에 여러 초월적 계시에 대한 이성이나 합리성의 도전이 집요할수록 더욱 하나님께 의지하며 믿음을 붙들었습니다.

합리성을 초월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라고 하여도 이성이나 지식이나 문화 일반에 대해 초월하여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 경제 문화 자연과도 관계를 맺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지만 또한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이시고 통치자이시며 주인이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그리스도가 만물과 갖는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그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믿는 자들과만 관계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골로새교회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 밖의 모든 것들과도 관계를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진 교회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골로새서 교회 교인들은 거의가 개종한 이방인들로서 믿음이 약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여러 이방종교를 믿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골로새 교회 교인들은 이방종교나 이단의 미혹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골로새 지방의 이방 종교는 동방의 신비종교, 유대의 율법주의, 헬라 철학의 사변 종교, 금욕주의와 천사숭배, 비밀의 지식, 인간 지혜와 전통을 신뢰하는 관습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관습들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이방종교나 이단들을 경계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구주일 뿐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지배자이신 만물 위에 뛰어나신 분임을 증거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은 신학적으로 기독론의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만물보다 먼저 나신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그 예수가 골로새교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바울을 포함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이들을 속량하신 분임을 이야기 합니다. 즉 죄의 노예인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을 노예 값으로 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주 특별한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무리 탁월하고 위대해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 유익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분과 관계의 특별함을 먼저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제 나와 그렇게 특별한 관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가를 이야기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5-17절에서 설명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잘 배우고 더욱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지난 번 글에서 약술 했고 오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에 대해 설명하려고 합니다.

천지만물과 인간을 비롯하여 천사들까지도 피조물이지만 예수님은 창조되신 분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다른 창조물과는 달리 “나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생물학적으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지만 바울은 여기서 단순히 예수님의 생물학적 출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뜻으로 “나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창조되었다는 것과 태어났다는 것은 다릅니다. 이 용어들은 성경의 창조를 이해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문자대로 받아들여 어떤 상을 만드는 것도 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무 형상이든지”를 문자대로 믿어서 어떤 상이라도 만드는 것은 죄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것입니다.성경은 하나님이 아닌 섬김의 대상으로 무엇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금한 것이지 어떤 상이라도 만들지 말라고 금한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서방교회는 성상을 만들어 놓고, 비록 하나님께 예배하듯 성상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성상에게 기도를 하거나 예를 올리는 것을 정당화 합니다. 하지만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는 금령의 참 뜻에 그런 설명은 변명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상이나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 놓고 그 상에게 기도하거나 예를 올리면서 그 상에게가 아니고 그 상이 가리키는 분에게 하는 것이라는 설명은 제2계명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한 설명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은 그 상을 섬기는 것을 금한 것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어떤 상으로 만들었을 때 일어나게 될 부작용까지를 경계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이 우상이었고,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의 가족에게는 장신구가 우상이었고,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는 금송아지 뿐 아니라 단장품이 우상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물질이 우상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권력이 우상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종교생활의 규범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예배당이 우상이 되기도 하고, 목회의 프로그램이 우상이 되기도 하고, 큰 업적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배우고 증거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길에 하나님을 형상화 하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유혹이고 위험인지를 사려 깊게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제2계명에서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고 한 3가지 동사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점층적으로 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들지 말라는 것은 우상을 만들기 위해 힘과 물질과 기술과 시간과 모든 노력을 투자하고 쏟는 관심까지를 금하신 것입니다. 절하지 말라는 것은 우상을 눈으로 보거나 보는 것을 통해 상상하는 것으로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바른 종교심으로 오해하여 절하는 것을 금하고, 그릇된 종교심으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경배를 한낱 물질에게 드리는 것을 금하는 것입니다. 섬기지 말라는 것은 경배하거나 숭배하지 말라는 뜻으로, 자유의지를 상실하고 우상에게 완전히 노예가 되어 지속적으로 섬기도록 요구 받는 상태, 즉 종교적 경배나 제사 또는 입을 맞추는 것이나 물건을 봉헌하는 것이나 우상이 요구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에 복종하는 모든 행위를 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통치하시고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구원하시는 분으로 우리가 마땅히 경배 드려야 할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은 부분적이지만 그 부분적 지식이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충분하지만 더 잘 섬기기 위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아무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형식에 치우칠 수가 있고 또한 반대로 인위적 상상과 정성으로 하나님 섬기는 방법을 고안할 수도 있습니다. 형식에 치우친 예배나 인위적 방법이나 극단적 헌신과 정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우상화 할 수 있습니다.

제2계명 가운데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질투”는 부정적인 의미로는 모욕당한 사랑에 대한 분노이지만 긍정적인 의미로는 한 대상에게 집중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마치 부부 관계와 같다는 전제에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 곳곳에서는 우상숭배를 영적 간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상적인 부부 관계에서, 부부는 서로에 대한 지식이나 감성과 진정성만으로는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부부는 결혼의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는 의무와 서로에 대한 사려 깊은 배려를 통해 사랑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 감정과 기교와 좋은 방법들이 적용되면 금상첨화지만 그 순서가 뒤바뀌면 이는 마차가 말을 끄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마치 부부 관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른 의무와 사려 깊은 배려가 깃든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그분의 뜻을 충분히 잘 몰라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드리신 기도를 깊이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확실하게 계시하여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지만 성경은 그 예수님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순종하여 사신 모습은 그를 믿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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