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신비1 > 오피니언

본문 바로가기



이곳은 2017년 이후에 올려진 글입니다. 이전에 올려진 오피니언 글은 지난 오피니언 게시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오피니언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신비1

페이지 정보

황상하2019-04-28

본문

황상하성경과 만물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 논증하시거나 묘사하시는 방법이 아닌 당신의 뜻과 하시는 일을 드러내 보이시는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밝히 드러내 보여주셔도 인간이 하나님을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쉽다거나 어렵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바른 설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차원을 넘어 믿음의 차원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고, 인간이 사물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을 계시할 뿐 아니라 이해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해를 위해, 초월적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으로, 내재적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철학은 신의 존재를 이해의 대상으로 접근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인식 능력은 물론 상상력까지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만약 소나 말이 신을 그린다면 신을 소나 말처럼 그렸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도 하나님을 의인화의 방법으로 묘사하여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오른 손, 하나님의 마음 등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나 상상의 능력이 의인화의 방법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비록 의인화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묘사하지만 하나님이 인간과 같이 사지백체를 가진 존재는 아닙니다. 초월적 존재를 의인화의 방법을 통해 설명하지만 성경이 엄중히 경계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피조물의 어떤 존재처럼 이해하거나 상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인간을 비롯한 만물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어떤 피조물과 같은 존재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오해입니다. 성경이 이러한 오해를 심각하게 경계하였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일들은 반드시 일어나고 만다는 사실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중요성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해와 지식 가운데 인간 존재의 근본과 목적과 가치와 삶의 원리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바르게 교육되고 강조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은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만들지만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지식과 오해와 왜곡은 인간을 금수나 악마와 같은 존재로 만들기도 합니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은 인간의 문명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희랍 신화에 의하면 올림프스의 신들은 성질이 고약하고 질투와 시기와 외도와 강간과 심지어 근친상간이나 동성애를 하는 것도 예사였습니다. 고대 그리스는 기라성 같은 현명한 철학자들을 많이 배출했고, 또한 민주주의의 발원지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그리스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고, 남자들은 여자들을 재산의 일부로 생각하였습니다. 남자는 자유롭게 첩을 두었고 여자 노예와 창녀들과 자유롭게 정사를 나누고, 잘 생긴 소년들과도 사랑을 나누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런 삶이 정당화 되었던 배경에는 그리스 신들의 방종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온갖 권력을 쥐락펴락하고, 인간을 종처럼 부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고, 아름다운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크세노파네스는 그리스의 신들이 방종한 신들로 묘사 된 것은 인간 욕망의 투사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가“소나 말이 신을 그렸다면 소나 말처럼 그렸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이를테면 방종한 그리스의 신들은 방종한 그리스인의 반영이라는 지적입니다. 방종한 그리스의 신들은 방종한 그리스인들의 반영이고 또한 방종한 신들은 그리스인들의 방종을 정당화 하고 심화시켰다는 뜻입니다.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나 헤시오도스의 신통기(Theogony)가 “인간들이 저지른 추악한 죄악을 모두 신들에게 전가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리스 신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인도의 신들도 권모술수와 살육을 밥 먹듯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도의 가장 유명한 영웅 신 중 하나인 크리슈나는 아내를 1만 6천명을 둔 호색한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인도에는 인간 계급의 카스트 제도가 있고 최고의 계급은 브라만이고 맨 아래는 노예 같은 수트라가 있고, 수트라에도 들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이 전체 인구의 15%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습니다. 이런 것이 다 그들의 그릇된 신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가나안의 신 바알도 방종의 신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나쁜 짓 하는 신은 나쁜 짓 하는 인간의 반영으로 인간이 만든 신이지만 그 나쁘게 만들어진 신은 인간을 더욱 나쁘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희랍의 신들이나 인도의 신 같이 방종의 신이 아니라 고도의 윤리와 정의와 사랑의 신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초월적 하나님의 절대 주권도 강조하지만 내재적 하나님의 정의와 윤리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때로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때문에 권위주의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권위와 사랑이 조화롭게 통합된 신임을 보여줍니다. 고대인들은 하나님 대신 여러 신들을 만들어 섬겼지만 현대인들은 고대인들처럼 여러 신들을 형상을 우상으로 만들거나 섬기지는 않지만 모든 절대자를 부정하고 인간 이성을 의존하거나 혹은 부정하는 사상적으로 매우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현대 문화의 타락과 혼란은 현대인의 혼란스러운 신관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인간의 하나님 이해가 의인화의 방법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은 초월적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설명할 위험이 있음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인간보다 월등히 힘이 세고 지혜와 지식이 탁월한 존재로 설명하는 것은 일면 맞는 설명이기도 하지만 매우 위험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설명하기 위해 의인화의 방법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을 인간과 비교하는 것 자체를 옳지 않고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수준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악하다고 정죄하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어린아이 수준의 신앙을 정좌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인간과 비슷하게 상상하고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읽고 공부할 시간이 오래되어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어야 함에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책망 받을 일입니다. 더 나쁜 것은 초월적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인간 인식의 대상으로 만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초월적 하나님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계시를 비틀거나 왜곡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인간 이성의 인식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인간의 실수는 이성적이고 지식적 사람들에 의해서만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맹신적으로 믿는 이들에 의해서도 저질러집니다. 하나님을 보았다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사회보장과 시스템이 완벽한 것 같은 천국을 보았다는 경험들도 초월적 하나님을 인간 이성의 인식 차원에서 오해하는 실수일 수가 있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초이성적인 경우도 있지만 보고 듣는 것이야 말로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것일 수 있고, 다 신령한 것은 아닙니다. 보고 듣는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과 논리와 합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동일하게 이성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성적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을 포함하고 있지만 또한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영역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그렇고 하나님의 뜻과 행위도 역시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영역과 이해할 수 있는 내재적 영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만물도 역시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양면성은 하나님께서 자연과 자연법칙을 창조하셨지만 자연을 자연법칙에만 맡겨두지 않으시고 직접 통치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연법칙은 과학으로 규명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직접 통치는 과학이나 이성으로 다 규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만물은 자연법칙에 의해 작동되거나 영향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다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이성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을 성경은 십계명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대할 때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셨다는 사실은 그 계시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인간이 도무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계시하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적 능력의 한계와 수준을 충분히 감안하시고 그 같은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앎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이며 또한 오해되고 왜곡되는 일이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자유주의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합니다.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 일반 신자들도 그들의 지도자들의 신학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보수적인 신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신자들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교회 역사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시비는 끊임없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그의 계시에 대한 인간 이해에서 불가피하게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 보여주시고 설명하는 것이지 논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을 변증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 때문이지 계시 자체가 변증의 대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모든 계시가 합리적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합리성에 의존하지 않지만 합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합리성은 초월성을 설명할 수 없지만 초월성을 부정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소홀히 하면 심각 한 신학적 문제들이 고개를 들게 됩니다.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문화적 상황과의 관련성을 잃게 되고,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어떤 특정의 문화에만 얽매이거나 신앙의 초월적 영역을 상실하게 됩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이전에는 하나님의 초월성 사상이 지배적이었지만 계몽주의 사상이 지배적이 되자 초월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의 부작용을 극복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내재성으로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계몽주의 이전의 신학은 위로부터의 신학이었다면 계몽주의적 신학(이신론, Deism)은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 성찰이기에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신앙주의, 후자를 객관주의라 부르기도 합니다. 신앙주의와 객관주의 양자에 다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주관주의입니다. 그러나 주관주의 역시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토대로 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지성적 극단적 보수주의가 되기 쉬운 신앙주의도 경계해야 하고, 하나님과 계시에 대한 절대적 권위와 초월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로 흐르게 될 객관주의의 위험도 예방해야 하며, 계시의 역사성과 객관성을 소홀히 하여 신비주의로 귀결될 위험이 있는 주관주의를 조심해야 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사 40:13-1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 아멘넷 뉴스(USAamen.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오피니언 목록

게시물 검색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안내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