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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가운데 은폐된 부활의 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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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9-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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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부활공동체로 인식하였습니다. 신학이 발전한 오늘날에도 교회를 부활공동체로 설명하는 것이 옳고 정당합니다. 부활공동체의 속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특징은 부활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종말에 완성될 생명의 완성을 지금 앞당겨 사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선취라고 하는데, 미래에 완성될 생명의 완성을 지금에 적용하여 사는 것으로 이를 종말론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란 영원한 생명, 즉 부활생명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생명은 종말에 완성될 창조와 구속을 지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창조와 구속을 지향하는 부활생명의 특징이 바로 하나님 나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변함없이 창조와 구속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모든 영역과 시간 속에 임하여 역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지만 교회는 하나님 나라 통치를 따릅니다. 세상이 하나님 나라 통치를 거부해도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작동합니다. 심지어는 악한 자가 준동하고 설쳐도 하나님 나라에 이용될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고난과 부활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지만 이론이나 논리로 다 설명할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종교적 신앙의 개념뿐 아니라 정치, 경제, 학문, 문화, 예술 등 자연과 문화의 모든 영역을 포괄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구상한 하나님 나라의 인류사적 목표는 완성된 인간성, 도덕성, 이성의 목적을 보편적으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학이 철학과 손을 맞잡고 만들어 놓은 것으로 역사에 대한 진보적 또는 낙관적 이해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 실현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세계 내의 인간의 가능성에 두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최고선”의 이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여 철학과 신학의 공생(共生)을 위한 전제조건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자 양자 간의 돈독한 연대 관계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목표를 시민계급의 직업윤리를 통해 가시적으로 실현하려고 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 나라를 철학과 연대하여 이 땅에 이상적 나라와 문화를 만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낙관적인 자유주의적 이상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칼 바르트가 자유주의 스승들과 결별하게 된 결정적 계기도 제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칼 바르트는 “그 해(1914년) 8월 초순은 적어도 나에게는 암흑의 날이었다. 93명의 독일 지식인들이 빌헬름 2세의 전쟁선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지지성명을 발표했는데, 이 지식인들 중에는 이제까지 내가 숭앙해 왔던 신학스승들의 이름들(하르낙, 제베르크, 헤르만 등)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경악케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들의 윤리학과 교의학, 성경해석과 역사관을 따르지 않기로 결심했고, 더욱이 19세기의 신학은 더 이상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 나라 신학은 결국 독일의 이기주의적 영토 확장을 지지하는 왜곡된 세상 나라의 신학으로 귀착되었습니다. 이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이론적이고 실천적 실패의 징후였고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허구적 자유의 체계와 그 이데올로기의 내적 모순으로 인하여 붕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그들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에서 도덕과 체험과 역사의식을 강조하기 때문에 정치적 진보좌파의 논리에 편승하거나 휩쓸릴 위험이 높습니다. 부활신앙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부활을 아무리 확신하고 강조한다고 하여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실증적으로 보여줄 수도 없습니다. 부활이나 부활생명을 설명할 수 없고 실증할 수 없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 나라 백성의 부활생명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작동되지만 그 역시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이 비록 아직 부활에 이르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부활을 믿는 것이 부활생명의 현상입니다. 성경과 개혁신학은 부활생명이나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이지 않는 것이 소극적으로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은폐하시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믿는 자들은 새 생명 즉 부활생명으로 살아가지만 부활은 아직까지 잠정적이고 종말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활생명을 통해서 유한한 모든 인간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부활생명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가시적인 어떤 현상보다 부활생명 자체에 관심을 집중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적극적이고 소극적인 많은 일들과 설교와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등이 하나님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그저 교회 생활에만 집중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존재망각이 문제이고 기독교 신앙에서는 하나님 망각이 문제입니다.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현대인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부활, 생명, 하나님 나라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소극적으로는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폐 때문이라고 하여도 인간은 결코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부활, 생명, 하나님 나라를 인간이 비록 눈으로 볼 수 없어도 믿고 지향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 능력이 바로 부활생명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설명이 논리적으로는 모순을 일으키지만 전능한 하나님과 새로운 피조물의 경건한 삶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은 현대화 된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어떤 실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부활생명의 존재에 대한 깨어 있는 인식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부활생명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그 나라를 경험하고 감격하며 찬양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경험은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의 언제나 고난에 은폐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고난 가운데 긴 시간을 보내게 되자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시간이 길어지자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 때문에 고난 가운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자신의 백성을 훈련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를 다 알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고난의 현실에 처하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시는지 알 수 없어 당황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이나 고통의 원인을 명확하게 다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고난 가운데서 은폐의 방식으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부활생명과 하나님 자신이 왜 은폐의 방식을 취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성경 계시를 통해 유추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우리에게 유익이기 때문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규범과 판단에 따라 저울질 하며 하나님의 응답이 없거나 늦어질 때 용기를 잃고 절망하게 되지만 고난의 때를 지나고 뒤돌아보면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서 함께 하신 흔적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국가의 안보와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시는지를 우리는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종말론적 시대는 머지않아 여명이 밝아오겠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어둠에 가려져 있는 어두운 새벽과 같습니다. 태양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여명은 어둠에 가려져 있습니다. 은폐의 요인은 인간의 한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숨어계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은폐하심은 교훈과 훈련과 배려이기도 하지만 또한 징계와 심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숨어 계심이 연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라면 불평이 합당하지 않고 범죄에 대한 징계라면 더더욱 불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와 사역을 인간에게 은폐하신 대표적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현이지만 또 한 편 하나님께서 저주와 죽음의 옷으로 자신과 구원의 사역을 은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결정적 계시이지만 인간의 관점에서는 구원과 부활과 생명과 반대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정 반대의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습니다. 칼빈은 성경이 하나님의 숨어계심을 이야기 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신다면 우리는 욕망과 이 세상의 삶에 오히려 더 매달리고 집착하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폐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며, 죄인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이기도 합니다. 또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순종하는지를 시험하시고 훈련하시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눈은 캄캄한 어둠 가운데서도 부활의 여명을 통찰할 수 있게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1-16, 19)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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