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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자성을 넘어 회복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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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신ㆍ2012-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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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목협 열린 대화 마당에서 이상원 교수(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가 목회자여, “영적 성찰을 통해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라”는 주제로 발제를 하고 있다. 

 

신자들의 공동체가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공동체로서 확장된 구조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애굽인들을 포함한 중다한 잡족이 구성원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출애굽공동체부터였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갖추도록 하기 위하여 많은 장치들을 준비하셨는데, 그 많은 장치들 가운데 하나가 성막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의 특성을 잘 구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막이 구현하고 있는 이와 같은 특성들 가운데 두 가지 요소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막이 세워진 장소가 어딘가 하는 것입니다. 성막은 극히 값진 재료들로 구성된 구조물입니다. 세마포, 염소 털, 아카시아 나무 등과 같은 흔하게 얻을 수 있는 재료들은 물론 열두 가지 보석들, 정금, 금, 은, 구리처럼 값비싼 광물들이 필요했고, 성막덮개를 위해서 바다표범을 죽여 가죽을 얻어야 했으며, 자색 물감을 얻기 위하여 구하기 어려운 벌레들을 수집해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성막은 보물 덩어리였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모든 구조물 하나하나마다 크기와 길이와 넓이와 필요한 재료를 일일이 규정할 정도로 극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성막을 만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세심하게 배려하는 가운데 준비한 성막을 세우는 장소에 이르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뜻밖의 상황을 만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성막을 맨 땅 위에 세우도록 명령하셨다는 점입니다. 보물 덩어리라면 이 덩어리를 세우는 장소도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특별히 좋은 장소를 선택한다든지, 바닥을 값비싼 대리석으로 깐다든지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보물 덩어리를 그냥 맨 땅, 흙바닥 위에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 황량한 흙바닥 위에 세워진 보물덩어리!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곧 교회는 거칠고 죄악으로 물든 세상을 외면하지 말고 그 한복판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교회는 세상 한 가운데서 세상과 긴밀하게 관계하면서 존재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성막이 세워진 뜰을 흰색의 세마포천으로 둘러싸도록 명령하셨습니다. 흰 색의 세마포천은 거룩성을 상징하며, 거룩성은 구별을 뜻합니다. 따라서 세마포천이 성막 뜰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은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성막이 지닌 이 두 가지 특징을 조합하면 교회는 세상 한 복판에 존재하면서 세상의 모든 일에 관여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세상과는 구별된 모습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물리적으로는 세상 속에 있고 세상일들에 관계하지만 세상에 관계하는 정신과 방식에 있어서는 세상과는 구별된 특징을 가져야 한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관계해야 할 세상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을 좀 더 구체적이고 구조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을 구조적으로 이해하는데 독일의 윤리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네위임론이 도움이 됩니다. 본회퍼는 하나님이 네 개의 영역에 대하여 고유한 소명을 위임하셨다고 주장했는데, 네 위임은 노동, 혼인, 정부, 교회입니다. 노동의 위임(창2:15;3:17-19)과 혼인의 위임(창2:24)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주어진 위임입니다. 정부의 위임은 노동의 위임과 혼인의 위임을 전제하며 이 두 창조의 위임을 보호하고 지도합니다. 

 

교회의 위임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을 실현하며, 다른 위임 안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미칩니다. 네 개의 위임들 가운데 세 개의 위임이 바로 세상을 구조적으로 대표하는 것으로서, 노동의 위임은 노동을 통하여 획득한 재화를 통하여 생계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서 돈과 관련된 위임이며, 혼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을 이루고 자녀출산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성과 관련된 위임이며, 정부는 법적이고 물리적인 강제력으로 다른 영역들을 보호하는 것으로서 권력과 관련된 위임입니다. 

 

본회퍼가 말하는 세 개의 위임의 핵심 주제들인 돈, 성, 권력은 인간세상의 모든 영역을 다 포괄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이 윤리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영역들이 바로 이 세 영역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바로 돈, 성, 권력이라는 세 영역에서 세상 사람들이 왜곡된 인식과 관행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 세 영역에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태도와 정신과 방식으로 규범적으로 관계하는 위임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 소명을 바르게 수행하도록 지도해야 할 목회자들이 이 세 영역에서 무너진다는 것은 목회자가 세상과의 모든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는 곧 목회자의 지도를 받는 교회가 세상과의 모든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다는 사실 자체가 돈, 성, 권력의 영역에서 일탈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막아 주는 방패막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돈궤를 맡는 등 물리적으로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으나 이 자리가 이들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을 막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리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일수록 하나님을 배반할 확률이 증가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중심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성전제사였는데, 이 성전제사를 독점하고 있었던 사두개인들이 모두 부활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교회나 교단의 업무의 중심에 서 있는 목회자들에게 주는 경고적인 시사가 매우 큽니다. 교회사상 등장했던 배반자 중 최고의 배반자는 바로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자처해 온 교황이었으며, 예수님의 배반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에 앞장서 온 신약신학자들이었습니다. 신학자의 자리와 교회와 교단의 중직자의 자리는 하나님의 배반자들이 출현하는 자리입니다. 

 

목회자는 돈과 성과 권력을 멀리해야 하는 자리라는 사실은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아는 명제가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가지를 멀리하지 않으면 목회사역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이 세 가지를 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또 그렇게 할 각오를 하고 목회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인식과 각오가 목회자로 하여금 평신도들 나아가서는 불신자들보다도 돈과 성과 권력에 더 취약하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인간 안에는 탐심이 있고, 탐심은 돈과 성과 권력에 집착하는 태도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목회자 보다는 평신도가, 평신도 보다는 불신자가 마음의 거리낌을 덜 느끼면서 더 쉽게 이런 재화들을 획득할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어떤 재화가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때 보다는 재화의 획득이 더 어려운 상태에 있을 때 재화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입니다. 예컨대 남녀가 연애를 하는 경우에 연애가 잘 진행되어서 사랑하는 상대방을 원하는 때 언제든지 만날 수 있을 때는 연애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상대방을 만나기가 힘든 상황이 되면 연애에 훨씬 더 집착하고 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위대한 연애소설이 대부분 연애에 실패한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목회자에게도 일반인들과 대동소이하게 돈, 성, 권력에 대한 욕구가 있는데 일반인들보다 이런 것들을 획득하기가 훨씬 더 어렵기 때문에 목회자는 이런 것들에 더 집착할 위험이 일반인들보다 더 큽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 가지 위임들과 목회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경제적 재화를 핵심으로 하는 노동의 위임과 목회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목회자와 관련된 돈의 문제는 교회의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일부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잘못된 경제생활 때문에 한국교회의 대다수의 신실한 목회자들의 눈물겨운 수고가 도매끔으로 폄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통계조사에 의하면 전체 한국교회들 가운데 최소한 60% 이상이 목회자에게 기초생활비를 지급할 수 없는 미자립교회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한국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60% 이상이 최소한 7년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인력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 사회의 최하빈민계층에 속해 있으며 최저생활비에도 이르지 못하는 사례금을 받고 생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목회자들이 이런 빈민의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투철한 소명감과 희생적인 마음가짐으로 자신들이 목양하는 작고 약한 교회를 하나님이 맡기신 목양지로 알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평생을 헌신하는 있는 모습이 한국교회의 주류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목회자들이 음지에서 보여주는 이와 같은 눈물겨운 헌신이 한국교회를 기둥처럼 떠받치고 있으며, 한국교회 일각에서 상식을 벗어난 재정사고들이 빈발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붙들어 주시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주류들의 열악한 상황은 비교적 재정이 넉넉한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에게 강한 연대적 책임의식과 실천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교회는 어느 곳에 그리고 어느 시대에 있든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하나의 몸으로서의 연대성(solidarity) 안에 있습니다. 하물며 이 교회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들은 더 긴밀한 연대성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중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이들의 생활수준보다 몇 배 이상이 되는 중상류 이상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동일한 헌신과 수고를 하는 동료 목회자들이 빈민의 생활을 하는 모습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중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자신의 생활수준을 어느 정도 낮추면서라도 빈민 생활을 하는 동료 목회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이런 도움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필요하지만,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의 생계비를 돕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으로도 표현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목회자의 경제생활은 동료 목회자에게 뿐만 아니라 한 교회내의 교인들에게도 상실감과 질투를 유발하지 않는 수준 안에서 영위되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밀레도설교에서 바울은 “자기를 위하여 또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권고합니다(행20:28).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지도자들 자신의 행동 때문에 교인들의 마음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행동을 삼갈 것을 명령합니다. 그 실천 방안 가운데 하나로서 바울은 자기 자신과 동료 사역자들의 생활비를 스스로 일을 하여 충당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행20:33-35; 참고 - 살후3:7-9). 바울의 이 언명에서 바울이 사례금을 받지 않고 일을 하면서 사역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로 경제생활을 영위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현대 교회의 목회자들은 조금만 방심하면 교회 안에 있는 낮은 계층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구조 안에 갇힐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는 교회운영을 위하여 장로들과 같이 하는 시간이 많습니다. 대체로 장로들은 경제력에 있어서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높은 위치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목회자는 장로들과 같은 교회 지도자의 수준에 서는 것은 물론 장로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게 되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경제생활 수준도 이들의 수준에 맞추려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생각을 갖게 되기가 쉽습니다. 더욱이 여성이 남성 보다는 비교의식과 질투심이 많다 보니까 목회자의 사모들이 장로부인들과 교제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장로부인들의 경제생활수준에 맞추려는 생각을 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장로들의 인의 장막 안에 갇혀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교회 안에 가장 낮은 자의 입장을 배려하면서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바울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자는 교회의 평균경제수준을 고려하여 중간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수준에서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됩니다. 목회자는 장로들과 자연스럽게 교제해야 하지만 경제생활 수준에 있어서는 장로들과 차별화된 의식을 확고하게 가져야 합니다. 요즈음 웬만한 대교회 목회자들 중에는 에쿠우스, 체어맨 급의 자가용을 타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는데, 에쿠우스나 체어맨을 타고 셋방살이 하는 교인들 집에 심방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목회자는 셋방살이를 하는 교인들 집에 심방을 갈 때에도 심방을 받는 교인들이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실용적인 차를 타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목회자가 은퇴를 할 때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에 달하는 퇴직금을 챙겨서 나가는 일도 바울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관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목회자들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는 일이 일어났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가 취했던 조치의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도행전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가난한 성도들이 많았고, 이들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재산을 출연하여 기금을 만들고, 이 기금으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사도단이 관장을 하는 과정에서 헬라파 출신 과부들이 식사에서 누락되는 일들이 빈발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히브리파 출신 유대인 신자들과 헬라파 출신 유대인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사도단이 전원 히브리파 출신이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파 출신 유대인 신자들을 지도부인 사도단에 포함시키고 싶었으나, 사도단으로 받아들이려면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함께 했던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헬라파 출신 유대인 신자들에게는 이 조건이 맞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대안으로 말씀을 증거하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업무는 사도단이 맡고 재정관리는 헬라파 유대인 신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이들 가운데서 7인의 집사를 뽑아 그 역할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업무가 분장이 되었다고 해서 사도들이 재정문제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또 집사들이 말씀사역에 전혀 관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두 사역은 구분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업무분장은 향후의 교회들이 교회를 운영할 때 참고해야 할 기본틀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정신을 살려서 목회자 자신은 말씀증거 및 성도들을 돌보는 사역에 집중하고 교회재정을 관리하는 일은 신실한 집사들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재정사고들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조금 번거롭고 견제를 당하는 불편함이 수반되더라도 목회자들 자신의 영적인 건강으 위해서라도 이 방식을 철저하게 견지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섯째로, 목회자와 관련된 많은 재정사고들이 목회자들의 기술적인 재정사용방식만 조정하면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목회자들이 사용하는 모든 항목에 대하여 영수증처리를 철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재정사고 때문에 법정공방을 벌이다가 패배하여 목회자가 구속된 어느 사건의 경우에도 법원이 목회자가 사용한 항목에 대한 증빙서류를 제출하기만 하면 정상을 참작해 주려고 다방면으로 애를 썼으나, 증빙서류를 하나도 제출하지 못하여 정상참작을 해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목회자가 교회재정을 사용하는 내역 안에는 선교기관을 돕는다든지, 아니면 어떤 자리에서 불가피하게 음식값을 지불하지 않을 수 없었다든지 하는 등과 같이 양해될 수 있는 것들도 많이 있는데, 용처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 보니까 횡령으로 몰리게 됩니다. 

 

평소에 철저한 용처에 대하여 영수증처리를 하는 습관을 익숙해지면 이런 오해를 피해갈 수 있습니다. 또 영수증처리를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용도에 대해서도 조심하게 됩니다. 사실 교회재정은 하나님께 드린 공금이기 때문에 단 한 푼이라도 투명하지 않은 방법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돈을 사용하는 방법을 통해서 증명해야 합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말씀처럼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성과 관련된 위임의 영역과 목회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검토해 보겠습니다. 

 

성과 관련해서도 목회자는 일반인들보다 일탈과 유혹에 더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목회자도 일반인과 똑같이 성적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일반인들 보다 이 욕구를 더 강하게 절제해야 한다는 요청을 늘 받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면적으로 이 욕구에 집착하는 태도가 더 강하게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대개 남성 보다는 여성이 더 많은 교회 공동체의 특성이 이런 유혹을 부추깁니다. 남성들은 일주일 내내 직장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목회사역은 여성도들과 함께 이루어질 때가 많습니다. 

 

목회자는 모든 여성도들을 영적으로 지도하는 지도자이며, 대체로 여성도들은 목회자를 존경하고 목회자의 지도에 순종하기 마련입니다. 여성도들이 목회자를 존경하고 목회자의 지도에 순종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마땅한 태도이지만 이 태도 안에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성에 대한 끌림이 어느 정도는 뒤섞여 있기 마련입니다. 모든 남녀관계에 어느 정도의 이성에 대한 끌림이 있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끌림과 긴장은 관계에 활기를 불어 넣습니다. 그러나 이런 끌림이 관계에 활력을 불어 넣어 주는 정도에서 적절히 통제되지 않고 존경과 순종과 어우러져 쉽게 연정(戀情)의 단계로 발전되어 성관계를 맺는 단계에 접어들 수 있습니다. 혼외정사는 목회자가 절대로 빠져 들어가서는 안 되는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혼외정사는 목회자의 목회사역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사실상 목회사역을 파탄에 빠뜨리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혼외정사에 일단 발을 들여 놓으면 순식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계명들을 줄줄이 범하는 죄의 사슬 속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여 온 영혼 전체가 죄의 사슬에 겹겹이 둘러싸여 영적인 힘을 상실하게 되고 마침내는 목회 사역을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목걸이에 꿰어 있는 구슬들과도 같습니다. 목걸이에 꿰어져 있는 구슬 하나를 잡아당기면 모든 구슬들이 줄줄이 따라 나오듯이, 하나님의 계명 하나를 범하면 다른 계명들도 줄줄이 범하게 되는데, 특히 7계명으로부터 그런 특징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혼외정사를 하여 7계명을 범한 사람이 자기의 행동을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말할 리가 없으므로 순식간에 9계명을 범하게 됩니다. 혼외정사를 하려면 자금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자금은 합법적으로 확보하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다른 용도에 쓰여야 할 자금을 부당하게 유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8계명을 범하게 됩니다. 혼외정사은 다른 사람이 누려야 할 파트너의 성을 탐내어 가로챈 것이므로 열 번째 계명을 범하게 됩니다. 

 

혼외정사를 행하면서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을 사람이 없으므로 5계명을 범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혼외정사를 하면서 주일 날 예배에 참석하고 있으면 온전한 마음으로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므로 4계명을 범하게 되고, 그의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없는 노릇이므로 1,2계명을 범하게 됩니다. 더욱이 혼외정사에 빠진 사람은 오직 합법적인 배우자만을 사랑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 앞에서 한 서약을 정면으로 파기한 것이므로 제3계명을 범합니다. 혼외정사의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관련 당사자들 사이에서 질투와 미움과 다툼이 시작되고 이런 혼란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치정살인에까지 이를 수 있으므로 6계명을 범하게 됩니다. 마음 속에 형제를 향한 미움을 품는 자는 이미 살인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고려할 때 치정살인까지는 안 갔어도 이미 살인을 범한 것입니다. 이처럼 혼외정사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10개의 계명 전체를 범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계명 전체를 범한 죄의 사슬로 영혼이 휘감겨 있는 상태에서는 목회사역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둘째로, 혼외정사에 발을 들여 놓으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복음)를 가르쳐야 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도 가르쳐야 합니다. 두 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계명들을 범한 당사자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라는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혼외정사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사역을 인간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사용하신 중요한 유비(喩比)들 가운데 하나를 사장시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과 사역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실 때 사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유비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아버지의 유비이고, 다른 하나는 신랑의 유비입니다. 혼외정사에 빠져 있는 목회자는 두 번째 유비인 신랑의 유비를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할 중요한 가르침들 가운데 하나는 가정을깨뜨리지 말고 온전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혼외정사를 영적인 차원에서나 도덕적인 차원에서나 법적인 차원에서 모두 타당한 이혼사유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2장24절에서 결혼의 질서를 직접 제정하셨지만, 이혼의 질서를 세우신 일이 없습니다. 이혼의 질서를 세운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 혼외정사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신 가정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을 허용하실 정도로 혼외정사를 심각한 죄악으로 간주하고 계십니다. 목회자가 혼외정사에 빠져 들어가 있는 한 가정에 관한 어떤 가르침도 제시할 수 없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목회자의 설교와 가르치는 사역이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현재의 한국의 법학자들은 혼외정사는 두 당사자 간의 사적인 문제이므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혼외정사의 폐해는 두 당사자 사이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제3자들에게까지, 나아가서는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상해를 가하게 된다는 점에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죄가 아니라 사회적인 죄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4장6절은 혼외정사를 행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형제는 혼외정사에 관련된 여성 파트너의 현 남편, 혹은 장차 남편이 될 사람을 가리킵니다. 만일 혼외정사에 임하는 여성 파트너가 기혼자라면 현 남편이 될 것이고, 만일 미혼자라면 장차 이 여성과 결혼하게 될 미래의 남편이 될 것입니다. 여하튼 혼외정사는 이 여성과 관계를 맺게 될 제3자에게 상해를 끼치는 행위라는 것이 본문의 의미입니다. 혼외정사는 자기를 희생하여 이웃의 유익을 도모해야 하고 또 그렇게 가르쳐야 하는 직분자인 목회자의 삶과 가르침에 역행하는 행위입니다. 

 

목회자가 혼외정사를 피해 가는 좋은 길이 있는가? 그런 발상 자체가 문제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혼외정사는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아예 발을 들여놓을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단호하게 끊어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최선입니다. 

 

셋째로, 권력과 관련된 위임의 영역과 목회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목회자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고린도전서4장1절에서 바울은 바울 자신과 아볼로, 그리고 소스데네와 같이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자들을 지칭하여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본문에 등장하는 “일꾼”이라는 단어는 목회자의 직분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꾼이라는 단어는 공장에서 어떤 부품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일정하게 주어진 단순한 작업을 수행하는 단순 노동자를 지칭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만일 일꾼이 이런 뜻이라면 목회자의 직분의 성격을 표현하는데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 곧, 휘페레테스는 당시에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호의 집에서 재산관리를 전담했던 직위를 가진 자를 가리키는데, 이 직위를 가진 자에게는 재산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재산을 사고 팔 수 있는 권한까지도 주어졌습니다. 

 

휘페레테스는 일종의 경영자입니다. 단 자기 재산을 관리하고 경영하는 자가 아니라 주인의 재산을 경영하고 관리하는 자입니다. 휘페레테스가 하는 역할과 가장 유사한 역할을 하는 현대의 직업은 “고용사장”입니다. 고용사장은 회사라는 사람들의 집단을 경영하는 사람입니다. 단 회사의 소유주는 아닙니다. 소유주는 따로 있습니다. 고용사장은 회사를 경영하되 소유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고 소유주로부터 위임받은 지침에 따라서 회사를 경영합니다. 바울은 목회자가 하는 일을 고용사장에 비유합니다. 저는 이 비유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를 단순노동을 하는 노동자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한 비유가 아닙니다. 사실 목회자는 단순노동자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성도들로 구성된 공동체 전체를 경영하는 직분자입니다. 교회는 목회자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교회의 실소유주는 그리스도입니다. 목회자는 교회의 실소유주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교회를 경영하는 업무를 위임받은 일종의 경영인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실소유주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면밀하게 살펴서 그 뜻에 따라서 교회를 경영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자기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경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서 교회를 경영해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 말씀이므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사역의 방편은 말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방편으로 사용하는 목회자의 사역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목회자의 사역의 특징을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만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섬기는 태도로 교회를 경영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임재해 계시는 ‘그리스도의 사람들’(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사람들도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경영하는 목회자의 리더쉽은 섬김의 리더쉽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사건은 목회자의 리더쉽이 어떤 리더쉽이 되어야 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권력의 힘에 의지하여 사람들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경영을 도모하지만, 목회자는 성도들의 발을 씻기고 섬기는 방식으로 교회 공동체를 경영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목사 위임식에 참석해 보면 축사를 하는 목사들이 거의 타성적으로 교인들에게 ‘주의 사자인 목사를 극진히 섬길 것’을 강요하다시피 요구하는데 이런 축사는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한 사건이 발생하자 많은 국민들이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면서 사죄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많이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접하면서 정말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대통령이 국민들을 지켜 주어야지 왜 국민들이 대통령을 지켜 주어야 합니까? 국민들이 대통령을 지켜 주어야 한다면 북한주민들이 김정은을 장군님으로 받들고 지키고자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물론 교인들은 담임목사가 사역을 잘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해야 하지만 교인들이 목사를 섬긴다는 발상은 시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목사직분은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이나 로마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중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자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섬기도록 은혜로 주신 다양한 은사들 가운데 하나이며, 하나님과의 거리에 있어서 다른 모든 은사들과 등거리에 있는 은사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 바른 이해입니다. 성경에는 어떤 한 두가지 특정한 은사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모든 은사들을 병렬해 놓습니다. 가르치는 은사, 섬기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등이 하나님과의 거리에 있어서 등거리를 가진 은사로 소개됩니다. 다만 이 모든 은사들의 날과 올을 엮어 주는 것이 말씀의 은사이기 때문에 말씀을 은사를 받아 사역하는 사역자들을 먼저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목회자들은 교회의 정치구조가 신률적 민주주의 구조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률 곧 하나님의 법 앞에서는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절대적으로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절대적 권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 앞에 서있는 교회의 구성원들의 상호관계는 민주적인 정치적 관계입니다. 개혁파의 다섯 가지 정치원리들 가운데 네 번째 항목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정치의 권한을 모든 신자들에게 균등하게 위임하셨음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박형룡은 모든 목사들은 신율 앞에서 모두 동등하다고 말하고 있는 바, 이 말에 근거하여 볼 때 오늘날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는 제왕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부목사들은 그 밑에서 수종드는 위계구도를 형성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로마 카톨릭적인 계층적 성직계급화되어 가고 있는 실태는 왜곡된 교회정치질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상원(총신대 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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