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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페이지 정보

짐보 (96.♡.♡.163)2017-01-07 11:10

본문

12.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신약 권능의 대표적인 권능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But ye shall receive power.
after that the Holy Ghost is come upon you:
and ye shall be witnesses unto me both in Jerusalem,
and in all Judaea, ane in Samaria,
and unto the uttermost part of the earth.  사도행전 1:8]
이 구절은 누구나 잘 알고 있으면서
잘못 해석한 사이비 목사들과 부흥사들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고
호도 된 해석으로 이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고 가르쳐 올바른 복음적인 개념을, 하나님의 공의의 개념을 저해(沮害)하여, 세상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관보다 못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그릇된 전도, 선교라는 개념을 가르친 자들이 대부분이며 그런 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란 주장에
대다수가 맹종하여 반사회적인 정서를 만들게 자초한 일들은
복음의 정의에 대한 무지였고 아직도 이런 개념과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한국교회와 해외 교회는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곡해하여
복음을 전하는 전도, 선교만이 증인이 되는 길 인양 가르치고 배웠기에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의 정체성을 확립하지도 못하였으면서,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식하지 못하면서
신학을 가르치고 배운 자들의 가르침이 온전하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정의(正意)에 대한 정의(精義) 조차 판단하지 못하여 분별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무지하여
‘공의’를 제대로 설명할 사람이 제대로 없으니 통탄할 일이다.
그러니 아무 때나 하나님의 뜻이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주장하고
선교제일주의에 빠져서 선교에 모든 역량을 써야 한다면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계획과 간절한 기도도 없이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면서 끝없이 여러 선교지의 자랑으로 이를 교인들에게 자부심으로 심어주었고 언제부터인지 단기선교의 유행의 열풍이 불어
단기선교가 현지 선교사와 교제와 교통 속에 이루어지지도 못하면서
단기선교라는 선교의 거창한 명칭으로 적선과 봉사가 믿음의 척도가 되어
교회의 구걸걸이가 되었고 어느 목사는 선교를 자신을 위한 욕심의 유익으로 비자금을 만들고 선교는 자신의 사적인 여행이 되었으면서
선교 비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지원자나 후원자 명단까지 발표하며 독촉한다.
선교는 선교지의 장기적인 계획으로 언어와 문화 등을 미리 습득하여
지혜롭고 효율적인, 조직의 역량을 판단하여 조직적으로 중단 없는
넉넉한 인적 물적 지원을 미리 기획하고
단기선교는 현지 선교사의 지원 역할을 해야 하는데,
어느 목사들과 장로들은 은퇴 후 선교사가 되거나 선교지로 간된다.
미리 장기간 계획을 하고 준비를 하여도 미흡한 환경에 육체도 거둥하기 힘들 때까지 기다려서 은퇴하고선 가서 무엇을 한다는 건가.
그리니 교회에 손을 내밀어 생활비로 사용하고 명분은 선교이니 거룩한
변명거리가 될지 모르나 은퇴목사라는 명예의 타이틀도 버리지 못하면서
자신의 그릇된 명분에 뭔 효율적인 선교가 되겠는가.
선교지 는 늙은 몸이 쉼을 얻는 휴양지인가 도피처 인가.
하기야 어느 사람들은 짧은 기간 선교지에 다녀와서 선교사, 목사, 뭔 모임의 장 등 마치 자신의 경력에 이력 거리를 만드는 이력서를 자랑하니,
현실을 바라보자.
교회는 내부적으로 잘못된 신앙관으로 세상의 질타의 대상이 된지 오래라 전도는 진전이 없고 남은 교인들마저 순수함을 잃은 교회를 떠나
교인은 줄었고,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하겠다는 전도는
교회가 걸림돌이 된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주체인 교회가 세상의 변화에 압박을 당하고
이제 교회는 세상과 등진,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고 더 고립되어간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마치 현대교회는 근본의 바탕이 잘못 지어진 집 같다.
견고한 지반(地盤)에 터를 잡지 못하고 기초마저 튼튼하지 못한 집이 
얼마나 유지 되겠는가.
그러니 조그만 일에도 교회가 흔들리고 작은 사건에 교회가 날아갈 듯 하고
목사의 말 한마디에 교회가 이편저편으로 나누어져 모두 하나님 편이라
고함과 폭력이 난무하니 싸움이 소문이나 으레 교회는 싸우는 장소로
오래전에 세상에 인식되었고
목사의 부정으로 교회가 갈라지고 사라지는 일들이 일상이 되었으니
허약하다 못해 유지에 안간힘을 쓰는, 이제 병들어 신음하는 교회가 되었고
교회가 복음의 걸림돌이 된 이 기이한 상황을,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가 믿음의 단절된 이 현상을,
믿음을, 다음세대에 유산으로 남겨야 하는데
세대와 세대가 단절된 이 현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의 믿음은 눈뜬 맹인이고
세상의 비난이 들리지 않는 다면
당신은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난청자 이고
그리고도 지도자라면, 당신은 믿는 자를 가장한 종교인이고
분별력이 애초에 없는 삯꾼일 뿐이다.
보라,
총체적으로 부패한 한국과 해외 교회와 단체의 모습을.
조금의 믿음이 있다면 조금의 신앙의 양심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믿음의 작은 눈이 라도 바라보라.
이제 근본으로 돌아갈 때다.
이제 늦으면 유럽교회처럼 교회가 사라지고 미국교회처럼 노인만 남고
교회 건물은 세상 사람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다 이 마저 사라진다.
화려한 대형교회의 건물?
화려하고 거대한 만큼 교제를 막는 큰 콘크리트 덩어리 일 뿐이며
그 안에서 군중 속에 안정(安定)을 찾다 믿음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어버리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갔으며 가고 있다.
그리고도 대형교회라 선교를 위하여 거금의 선교비를 만든다는 말은
맘몬 니즘에 절은 자의 변명이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통을 막고
교회와 교회가 서로 교통하는 교통을 막은 대형교회의 모순을
외면한 자의 변명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자.
근본의 하나님의 의,
의를 알려면 공의(righteousness)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는, 공의는, 복음에 나타나서,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 이루어졌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하나님의 의, 공의를 알고 깨닫는 믿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로 믿음이 되며
오르지 의인,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이 의인이며,
오르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를 지켜야 할,
정의롭고 진실하고 공평하고 평등한 삶으로
세상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규범과 상식을 초월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의 문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의 문화를 세우는 일,
정직하고 정의로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문화는
한국교회에서 이제 거의 다 사라졌기에
믿음, 믿음, 믿음하면서 믿음이 변절하여 종교 의식화 하였고
종교적인 자기 위안(慰安)도 못되면서 버릇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한다.
대체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란 말인가.
전도가, 선교만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이었나?

또한 이 구절은
사이비 세대주의자들, 대체신학을 주장하는 자들이 인용하는 근거의 구절로
잘못된 예수님의 재림과 선교관을 퍼트린 구절로
이들의 특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문자적인 것은 문자적, 상징적인 것은 상징적, 비유적인 것은 비유적,
계시적인 것은 계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몽땅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땅과 국가,
성전 회복 등이 이루어져 성경의 약속들이 문자적으로
무조건 이루어진다고 본다.
세대주의 문제점은 성경을 비틀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인이 거부함으로
이방교회가 생겨났다는 대체신학이
첫 번째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부인이라 복음의 어그러진 길이며
예수님이 말씀인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나로 말미암고는’ 는
누구든지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시인 하는 듯 하면서 복음 이전의 구약으로 돌아가 부인하기에 복음을, 전 인류를 위한 권능을 부인하고 비틀어
복음의 능력을 감소시킴은 물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오신다는 성경 구절을 이스라엘에 국한(局限)
시켜 종당에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킨다는
제한된 교회관은 두 번째 위험한 사이비의 주장일 뿐이다.
또 아브라함을 통한 유대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은
요한 계시록을 전 세계의 교회가 아닌 유대인을 만을 위한 계시록이라
이방인 교회는 곁들어 구원 받는 존재일 뿐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된다.
그토록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선택한
이스라엘만은 단념할 수 없으신 편애를 가지신 편협하신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풍요와 평화만을 누렸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이스라엘의 패악으로 나라가 없어지고 민족이 흩어지는 고통을 당하였는데 이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만 선택된, 일부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비틀린 복음,
그건 복음이 아니다.
다시 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씀도 아니고 ‘uttermost part of the earth’ 최대한 넓게 복음이 세상에 알려진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고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 다는 말씀은
이 권능 ‘power’ 는 누구나 받지만 모두 같은 ‘power’ 가 아니라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약하고 강한 능력이고
power 의 분량이, 믿음의 분량이 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양과 비례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었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8-2]
분부한 모든 걸 가르치고 행하라 시는 말씀은 명령이다.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I have commanded you.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구약의 대표적인 권능인 이사야 33:13-16절 과 같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 포함된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받은, 세상의 창조자 이신 하나님으로 부터의 권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었으니’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권세
그 권세로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으시라는 말씀은,
그 권세로, 성령님께 받은 권세로 세례를 베푸는,
성령님이 세례를 베푸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이름은 히브리어 ‘쉠 shem’ 으로 사람이나 사물 등 다른 것과 구별하는
표시로 세상과 구별된, 모든 우상과 구별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이름과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거룩하신 성령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이름’ 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죄로 죽고 다시 새 명명을 얻은 자가
부르심에 합당히 응한 자가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거룩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옛사람을 죄를 죽이는 회개의 상징임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 죄를,
성령님이 임하시면 불같이 태워버리는 권능을 받기에,
성령님의 권능을 받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음은,
권능은 증인이 되기 위한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의 시작이라
거룩하신 이름을 부르기에 합당한 부르심을 받은 자의 능력이다.
그럼 이제 권능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한 말을 보자.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사도행전 3:7]
베드로는 은과 금이 없지만
내게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I have give I thee: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천한 나사렛에서
낮아지고 낮아지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진리를 전하여 주시고 삶의 길을 보여주신 구세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고귀하고 숭고한 사랑 ‘charity’ 의 이름,
그리고 부활하신 권능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베드로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베드로의 가슴에 간직한 사랑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인으로 가슴에 새겨진 사랑의
힘(power of charity)으로 베드로의 생명과 같은 이름,
그 이름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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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보 ㆍ 52.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댓글(3) 2017-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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