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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가 된 부자청년

페이지 정보

대장쟁이 (72.♡.♡.208)2019-03-0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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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법”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물리학과 학생은 냉장고의 부피가 코끼리의 부피보다 작기 때문에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기계공학과 학생은 냉장고를 코끼리보다 큰 것으로 특별제작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식품가공학과 학생은 코끼리를 토막 내어서 조림가공을 해서 부피를 최소화한 다음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육사생도는 냉장고 앞에 코끼리를 세워놓고 명령합니다. “들어 갓!”

부자청년(또는 부자관원)이 영생을 얻고자 하나 재물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 하고 근심하며 돌아가는 이야기는 마태복음 19장, 마가복음 10장, 그리고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청년이 돌아간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제자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그러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깜짝 놀랐던 것처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또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이 각박한 세상을 살면서 돈, 재물이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돈 없는 것, 가난한 것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고 저주와도 같은 것입니다. 돈 때문에 도적질하고 빼앗고 다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고 돈 가지고 안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돈은 말도 히죽 웃게 만들고 죽은 자도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3세기 때 중동지역과 이집트에 복음이 전해지고 기독교가 흥왕할 때 (7세기에 이슬람이 생기기 전까지 중동지방은 기독교 지역이었습니다) 안토니인지 혹은 안토니우스(Anthony, Antonius)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시절 바로 이 말씀을 듣고 나서 고민을 했습니다. 결국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옷 한 벌만 가지고 사막, 광야에서 수도하였습니다. 친구들이 1년에 두 차례씩 음식을 갖다 주었습니다. 음식을 소금과 함께 먹고 포도주도 안 마시고 물만 마셨으며 1년에 한 번 부활절을 제외하고는 머리를 깎거나 빗지도 않았고 물론 목욕을 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기둥에 올라가서 수도하여 ‘기둥성자’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버리고 수도를 하였습니다. 가난한 성자들, 맨발의 성자들... 이러한 신앙생활의 행태가 나중 유럽에서 베네딕트 수도원이라든지, 프란시스 수도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도 이들처럼 모든 재산을 버리고 수도를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16절을 보면 이 사람이 주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사람의 관심은 예수님이 아니라 영생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선생님이여.”라고 부르면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또 이렇게 묻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아니 영생이 무슨 선한 일과 맞바꾸는 상품입니까?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것은 돈을 주고 사겠다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그리고 죄인은 선한 일을 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과나무에서 무엇이 열립니까? 사과가 열립니다. 다른 것이 열릴 수 없습니다. 죄인에게서 무엇이 납니까? 죄가 납니다. 다른 것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청년은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을 제가 지켰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아, 주님께서도 율법을,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고 하셨구나.” 그러나 이것은 잘못 생각입니다. 지금 이 청년은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까? 이 청년은 지금 가슴이 허전한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양심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속을 다 아십니다. 이 청년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님을,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이라 한 것같이 악한 인간이 계명을 지킨다 해도 그것은 그 악한 본성을 덮는 가식적 행위일 뿐이라는 것을, 인간은 다 악하다는 것을, 계명으로 고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금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모든 소유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

그렇습니다. 영생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바로 생명입니다.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입니다. 온전하려면, 영생을 원한다면 생명 되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생명 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 곧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네가 가진 재물을,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부자청년의 비극은 그것이었습니다. 등에 진 재물을 내려놓지 못 해 낙타가 된 것입니다. 그 재물, 그 짐을 내려놓고 영생이신 주님을 따르면 될 것을......

그 부자청년에게 말씀하셨던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생명의 주로 믿느냐? 내가 너에게 생명을 주려고 온 하나님인 것을 믿느냐?”
이 물음에 당신은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주여, 믿습니다. 주님은 이 죄인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고백이라면 당신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내려놓아야 한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결코 세상 것을 내려놓지 못 하는 낙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인이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 되신 주님을 따르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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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황서경님의 댓글

황서경 100.♡.♡.24

문학의 관점에서 이해 하자면, 시선에 관한 답변 입니다. 우리가 시선을 하나님에게 돌리면 낙타가 바늘 구명으로 들어 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선은 곧 우리의 관심이 가는 곳으로 눈이 쏠리기 마련 입니다. 바늘 구명을 눈에다 가까이, 바싹 대어 보십시요, 그 구멍을 통하여 하늘이 보이고 구름도 보입니다. 낙타는 당연히 보이죠. 세상이 다 바늘 구멍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대장쟁이님의 댓글

대장쟁이 댓글의 댓글 72.♡.♡.208

황서경님, 처음 뵙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바늘구멍에 눈대기.... 참 재미있는 착상이네요.
그러나 바늘구멍에 눈만 갖다대고 보면 뭐 합니까?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요. 주님은 그 바늘구멍 안, 곧 천국으로 우리의 눈, 머리와 몸통까지, 몰고 온 낙타까지 다 들어가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황서경님의 댓글

황서경 댓글의 댓글 100.♡.♡.24

저 편에 보이는 낙타는 이미 바늘 구멍을 통과 한 낙타 인데요 ..

대장쟁이님의 댓글

대장쟁이 댓글의 댓글 72.♡.♡.208

하하... 그렇군요.
그럼 그 낙타는 누구이고 들여다 보는 낙타는 누구인가요? ㅋㅋ

황서경님의 댓글

황서경 댓글의 댓글 100.♡.♡.24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하옇든 우리는 종종 성경을 철학 처럼 이해 하는 경우가 있지요.

나그네님의 댓글

나그네 67.♡.♡.193

바늘귀와 낙타를 세상의 과점으로 보면, 불가능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는 가능합니다. 에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죄인의 죽음으로 더이상 죄의 값을 선고할 대상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부활의 주님을 따라, 십자가로 죽은 모든 자들은 주님을 따라 함께 부활에 동참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에 갖고 부활했으니, 더 이상 죄인도 아닙니다.

이런 상태를 "바늘귀로 통과한 낙타"라고 합니다. 이 개념은 따라서 십자가의 대속이 포함된 것으로, 부활의 뜻까지 내포하는 개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단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이나 능력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빠진 단순히 기적을 운운하는 것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친 당사자였지요.
낙타와 바늘귀 비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사역을 설명하는 간단한 비유였습니다.

다른 문젲만, 말이 나와서 한가지 우려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가톨릭의 전유물인 사순절이 어떻게 개혁교회 안에 또 정착하게됐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를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의 새피조물로 변화된 존재이기에 부활을 가져다 준 십자가의 필연성을 고백하고 기념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세운 교회를 또다시 율법화 의식화 시키는 계단으로 많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형식을 다시 강요합니다. 사순절 기도회 사순절 금식 등 갖가지 형식을 만들어놓고 이 과정을 잘 하는 자와 그렇지 못하는 자가 구별됩니다. 목회자는 매우 자주 이런 과정을 설치해 놓고 잘 하는 자를 구분하여 제직으로 삼습니다. 율법화의 전형적인 모습들입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황서경님의 댓글

황서경 100.♡.♡.24

사순절에 대한 언급은 너무 앞서 간 것 같네요...처음 듣는 데요.

니그네님의 댓글

니그네 댓글의 댓글 67.♡.♡.193

사순절은 가톨릭의 유산이지 개혁교회 유산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 고난을 사순절 처럼 법으로 정해서 지켜야한다고 한 곳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사순절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사도바울처럼 열심을 품은 자가 어떻게 침묵하겠습니까.

최근들어 개혁교회들 속에 형식화 율법화가 쓰나미처럼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현상입니다. 소위 에큐메니칼운동을 통해 가톨릭의 문화가 개혁교회로 엄청 밀려들어오는 중입니다. 보수진영의 교회들도 어느새 따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형교회 운동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큰 교회는 단지 건물과 재정만 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포장이 필요한데, 성경말씀의 율법화 경향이 그것이죠. 말씀과 복음을 몸으로 지켜서 소유하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가톨릭이 수천년동안 해왔던 방식을 큰 교회들이 모방하는 현실입니다. 십자가에 천으로 둘러 사순절 혹은 부활절, 고난주간 등을 표시하는데..... 이건 정말 가톨릭으로 회귀한 현상입니다. 비극이죠

황서경님의 댓글

황서경 100.♡.♡.24

그런데, 대형 교회는 건물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크긴 큽니다. 물론 문제도 크지만. 어쨋거나 소형 교회가 못 따라 가는 점이 있기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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