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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목사 “기성 성도들의 구원파적인 구원론을 경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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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8-05-11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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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참빛교회(황주 목사)는 5월 10일(목) 저녁부터 주일까지 4일간 봄 말씀잔치를 열었다. “고난 가운데 넘치는 기쁨: 빌립보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집회의 강사는 김도현 목사. 김 목사는 콜로라도 크리스찬 대학교에서 신약학교수를 역임했으며, 미주 코스타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또 <내가 사랑하는 책:로마서>와 <빌립보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의 저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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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도현 목사와 황주 목사
 

황주 목사는 교회도 이전하고 원래 집회 계획이 없었지만 대학 때부터 믿음의 스승으로 삼은 김도현 목사가 뉴욕에 멘토 컨퍼런스 강사로 온 김에 집회를 열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김도현 목사는 2년 전 참빛교회 여름 수양회를 인도한 바 있다.

 

집회 주제에 “빌립보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김도현 목사는 집회기간 동안 6번의 말씀을 전하는데 본문이 모두 빌립보서이다. 첫날 집회에서 김도현 목사는 빌립보서 1:1-8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선한 일”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구원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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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목사는 “구원파가 이단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신학적으로 보면 기성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한번 구원받으면 아무리 잘못해도 된다는 구원파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하며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마무리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어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의 삶이 점차 변화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말씀중 구원에 대한 내용이다.

 

1.

 

빌립보서는 구원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것인데 그것에 인간의 노력이 들어가야 되는가 하는 관계를 빌립보서가 잘 보여준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구원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는 단지 구원을 받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사도바울이 1:6절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새번역)” 말씀대로 예수의 날에 선한 일을 완성하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 구원자체가 완성이 된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여러 군데에서 이에 대해 표현했다. 1:10 후반부에 보면 “그리하여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이 없이 지내며”, 2: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리하면 내가 달음질한 것과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여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2:12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라고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보는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죄와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끓어 놓으셨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여정에 우리가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아직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도 갈 길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다. 이유는 세월호 사건 때에서도 나왔고 이번에 가수 박진영과 관련하여 구원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런데 구원파가 이단이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신학적으로 보면 기성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파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

 

구원파에서 가르치는 구원은 대충 이런 것이다. 분과 초까지 따져 자기가 특정한 시간에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나는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파에서 가르치는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께서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십자가에서 피를 통해 다 해결해 주셨기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기성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는 것은 구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회개할 필요도 전혀 없고 무슨 잘못을 하고 아무리 비도덕적으로 살아도 자기가 받은 구원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한번 받은 구원이 영원하다면서, 심지어는 죄를 짓고 싶으면 당당히 지으라는 식으로 까지 가르친다. 물론 기성교회는 대부분 그런 식까지 가르치지 않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구원파에서 대놓고 주장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한번 구원받았으면 그것이 끝이라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가지는가?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이 어떤 부흥회에 가서 목사가 예수님을 믿을 사람 걸어 나오라 해서 걸어 나갔고 그곳에서 죄인의 기도라는 것을 드렸기에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구원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빌립보서에서 분명히 가르치는 것은 사도 바울 자신도 아직도 구원을 잡은 줄로 여기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직 달려갈 길을 달려간다고 말한다. 빌립보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아직 갈 길이 남아있다는 의미이다. 1:6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를 보면 아직 구원이 완성하지 않았고 갈 길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구원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당당히 외치는 모습이 마치 구원파의 구원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오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2.

 

1:6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6절에서 사도 바울이 의미하는 선한 일은 바로 구원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마무리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어서 그 구원에 동참하고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의 삶이 점차 변화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구원시켜 주시는데 그것에 우리가 팔짱 끼고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하시는 일에 우리가 같이 참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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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게 참여하게 되는가 하면 우리 삶의 역사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서 그것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은혜라고 표현한다. 은혜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변화되려는 의지, 그리고 우리가 예수그리스를 점점 닮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이 선한 일이 우리의 삶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되고 증거가 된다. 

 

우리가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기에 내 삶이 조금이라도 변해야 하고, 나날이 내 믿음이 자라서 하나님도 더 잘 믿게 되고,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나쁜 버릇과 성격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들이 내 삶에 있다면 이것들을 자꾸 없애고 변화되어야 한다. 그냥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티켓을 하나 가지고 있으니 구원을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구원파적인 구원론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흠 없고 아름답고 기쁘게 받으실 그 향기로운 제사로 나를 받으실 것을 알고 있기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 날 앞에 설 때까지 내가 자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변화되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에 그렇게 되지 않는 모습을 본다면 그래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좀 더 하나님을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더 복음의 진보와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서 내가 점점 예수그리스도와 닮아가야겠다는 의지, 안타까운 소원 그런 것들이 있다면 여기에 사도 바울이 보여주고 있는 구원의 확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완성하시리라는 것을 확신한다는 의미는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도 그렇게 가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2:12-13)”

 

만약에 우리들의 삶에 내가 정말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해드려야겠다, 그리고 내가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구원을 계속해서 이루어 나가야겠다는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다고 하면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불행하게 그런 마음이 전혀 없고 - 좀 더 잘 믿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내가 말씀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은 어떤 염원도 없고 그냥 옛날 몇 대째 믿는 집안이라는 모양으로만 산다면 위험한 모습이다. 

 

4.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3:1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를 붙잡아서 우리 안에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 여정 그 길에 있다면 우리는 구원을 향해서 계속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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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우리 삶에 그런 의지조차 없다면 우리 삶에 그런 안타까움조차 없다면 우리의 구원을 심각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성경에 나와 있는 구원은 단순히 예수 믿고 죽은 다음에 천당 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게 구원을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다. 미래의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현재 거룩한 삶을 향하여 살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믿음의 증거가 되는 열매를 하나하나 맺으며 점점 더 거룩해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파트너가 되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나하나 나가는 그런 확신에 찬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내가 아직 잡을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않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마음을 빌립보 성도들이 가지기 원해서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5.

 

결론적으로 빌립보교회 안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자신이 도대체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항상 불안해하는 그런 부류이다. 다른 부류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 너무나 확신을 가진다. 자신은 다 이루었으며, 더 이상 진보될 것이 없는 완벽한 경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들을 가진 두 양극단을 향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이 구원의 과정 속에 있게 되는 것은 어떤 것인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이 여정을 가는 그 길에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을 주시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끄시는지 보여주는 편지가 빌립보서라고 생각한다.

 

맺는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하나님께서 완성하리라 확신하고 그래서 감사와 기쁨으로 이 편지를 쓴다.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이것을 온전히 완성하시리라는 확신 속에서 이 편지를 쓰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그리고 하나님과 동반자가 되어서 선한 일에 참여해서 같이 완성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이 귀한 여정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완성되는 기쁨을 누리는 모든 성도들 되기를 축원드린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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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무슨 뜻인가요님의 댓글

무슨 뜻인가요 ()

설교 내용이 무슨 뜻인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한번 받은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구원이 상실되거나 완성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좀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네요.

오직믿음님의 댓글

오직믿음 댓글의 댓글 ()

도움이 될지 안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도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적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모호하게 생각된다면 로마서와 야고보서
 히브리서를 주석과 함께 읽어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일지라도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이후 모두가 죄 있는 육신을 가지고 죄가
학습되는 세상에서 태어나서 어릴때부터 악으로 기우는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데 그런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즉 인간의
일하기에 따라서 구원이 유지 또는 상실 ,완성 또는 실패된다면
과연 누가 구원 받을 수 있고 인간에게 달려있는 구원이 어떻게
은혜요 선물이겠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시고 그리스도안에서 한번
시작하신 구원은 변함이 없는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입니다.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로 미리 정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믿음에서 난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에게 내주시킨 성령으로 또한 성화시키시고
영화롭게 하실것을 선언하셨으니까요. 또한 그 뿐 아니라 이런
언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그 마지막은
영생)를 이미 받은 신자들에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까지 주심으로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재
확신시켜 주셨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진리안의 자유을 의에게 종이 되는 기회로
삼아 믿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굳게 세워야 한다는 성경의
교훈은 버리고 진리안의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 하나님의
법을 폐하고자 꾀하는 거짓 믿음을 가진 자들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외치며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처럼 믿음과 구원의 관계를 호도하는데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데 그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과 함께 일하는 산 믿음인
것입니다. 즉 주께서 명하는대로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데까지 나아가는 자들이 곧 믿음의 결국인 영혼 구원을
받게 되는 자들이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는 이가 바로
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을 성경에서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으로 분리하였는데 그 기준은 바로 믿음입니다.
생식기에 사람의 손으로 한 할례가 이면적 유대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 아니듯 단지 교회 출석하고 성경 가지고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 언급한다고 신자되는 것 아닙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게 된 자들이 바로 이면적 유대인이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속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곧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이 바로 구원받은
신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들려오는 것을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귀에 들려오는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진리로 받는 것을 의미.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란 곧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선을 행하는 자들인데 그런 자들이 만왕의
왕이신 주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일을 하시는데
,또한 일할 수 있는 상태인데 종되고 백성되고 자녀된 자신은
일하지 않겠다고 감히 거부하거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두렵고 떨림으로 또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뜻을 좇아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일해야겠지요.
일한 것 없이 은혜로 받은 구원에 감사하면서 또 일한대로
심판하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소망하면서요

마귀는 간교해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금하시지 않은 것까지
금하는 금욕주의로 미혹하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해도 좋다는 방탕주의로 미혹하기에 사도들과 선지자들도
그 서신서에서 이같은 것을 경계시셨으니 양방향으로 오는
이런 유혹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심을 잡고 좌우로
치우지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나가야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오직믿음님의 댓글

오직믿음 댓글의 댓글 ()

참고하시라고 로마서 주석내용도 일부 올려 봅니다.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본절에서
'하기아스모스'를 '거룩' 또는 '성별'로 해석하든지
'성화'로 해석하든지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을 위해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은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하고 있는가?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와 '구속'과 '거룩'(성화)을
 믿음으로 전가받았으나 아직 연약한 육신에 매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몸의 구속'을 기대한다고도 했으며(8:23)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듯이(13절)
당연히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할 수 있었다.

따라서 본절에 언급된 바울의 권면은 '거룩'(성화)이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실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 여기에 언급된
'거룩함'도 19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기아스모스'(*)이다.
이 '거룩'은 인간의 순수한 노력만으로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셨던 '성화
'(sanctfication)를 의미한다. 그리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는 해석상 애매한 표현이지만 구체화시키자면
 '거룩함의 열매' 또는 '성화의 열매'로 해석될 수 있다.
바울은 이 '성화의 열매'를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얻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케테'(*)의 시제가 개역성경과는 달리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이 시제는 본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성화의 열매'를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말하지 않고 성도가 현재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19절의
'거룩함(성화)에 이르라'는 권면과 함께 종합적으로
 해석되어야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다. 본절과 19절을
종합해 볼 때 성도는 '성화의 열매'를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으면서도(고전 1:30;6:11) 동시에 '성화'를 수행해야
할 의무를 지닌 신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화' 자체도
'의'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성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성취된 것을 바라보면서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그것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 예수의 가르침대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요 5:24;6:47, 54). 그렇지만 완전한 의미의
영생은 마지막 부활 때에 거룩함의 열매를 소유한 자에게
주어진다.

나그네님의 댓글

나그네 ()

데살로니가전후서를 보면, 전체적인 흐름을 봐야 하는데요. (사실 살후가 먼저 씌여지고 그 후에 살전이 씌여졌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습니다만) 세상의 끝이 오며 그 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한다는 얘기가 전서의 주제라면, 후서에서는 그렇다고해서 성도가 현재 이 땅에서 해야할 일들을 포기하고나 외면하거나 경솔하게 여겨서는 않되고 되레 주님 재림하시기까지 맡은 바 사명(=거룩과 경건과 성실함과 정직함과 긍휼과 사랑 그리고 공의롭고 정의로운 일들)을 잘 감당할 것을 강조합니다.

잠시 데살로니가로 인한 에피소드를 소개하죠.
사도바울은 마게도니야 수도였던 데살로니가에서 2차 전도여행 때 엄청난 핍박을 받았고, 형제들의 도움으로 베뢰아로 가서 매우 좋은 분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으나 또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찾아와 핍박하여 밤에 혼자서(실라와 디모데를 놓고)아덴으로 무려 240km 거리를 갑니다. 계속 복음을 전하지요.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지할 때 메시야를 주셔서 그 무지의 결과로 십자가에 죽도록 하셨으며. 그 무지의 죄를 통해 전 인류가 죄인임을 드러내시고, 이어 곧바로 그 사망 안에서 새생명을 그리스도께 부여하사 그 분을 통해 사랑을 베풀어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입장에서는  어느 것 하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참여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냥 두면 또 죄요 악행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붙드심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것을 자각할 뿐입니다. 우리 안에 새생명을 준 성령님과 꾸준하게 교제하는 "코이노니아"와 이 땅의 이웃들과 그 코이노니아를 드러내는 이웃들과의" 디아코니아"를 균형있게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 이끌림에 날마나 순종하도록 겸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순종과 겸손마저도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혜임을 고백할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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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C 웨비나, 김형익 목사 ② 청교도의 설교를 중심으로 2020-11-14
KAPC 청교도 400주년 웨비나 ① 청교도의 설교를 중심으로 2020-11-12
뉴저지 교계 연합, 청교도 ABC 세미나 - 강사 오덕교 교수 2020-11-09
허연행 목사 “청교도 그들은 누구인가?” 2020-11-07
이종식 목사 “흩어져야 한다고? 교회로 모여야 하는 이유” 2020-11-05
안선홍 목사 ③ 목사의 2가지 푯대-그리스도를 알고 닮으라 2020-11-05
주영광 목사 “정치, 그리스도인은 어느 편에 서야 할까?” 2020-11-04
종교개혁 503주년 맞아 류응렬 목사와 김현배 목사 대담 2020-11-03
송민호 목사 “선교적인 삶을 사십시요!” 20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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