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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모 목사 ③ 개혁의 영향력에 대한 질문: 날카로운 소리인가, 낮아진 마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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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7-04-05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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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뉴욕장로회신학교와 뉴욕과 뉴저지 교협과 목사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공동 학술 세미나가 3월 26일(주일) 오후 5시에 뉴저지 필그림교회(양춘길 목사)에서 열렸다. 유철운 목사가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과 목회 리더십"에 대하여, 조진모 목사가 "마틴 루터의 성경적 종교개혁과 이민교회"에 대하여 강의했다.  

 

조진모 목사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졸업하고 합동신학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필라연합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조진모 목사는 “마틴 루터의 성경적 종교개혁과 이민교회”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는데 △개혁의 출발점: 말씀 앞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개혁의 원동력: 나는 무엇을 믿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나? △개혁의 영향력: 날카로운 소리인가, 낮아진 마음인가? 등 3가지 질문에 답을 하는 형태로 강의를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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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마지막 질문인 “개혁의 영향력: 날카로운 소리인가, 낮아진 마음인가?”에 대한 내용이다.

     

1. 이민교회의 현실: 안개와 같은 앞날에 대한 고민  

 

① 반세기를 맞은 이민교회의 현실  

 

미국 이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다. 교회의 역사도 그만큼 오랜 세월 흘러왔다. 언제부터가 역이민이 유행하더니, 지금은 이민으로 유입되는 교민의 수가 매우 적다. 작은 도시일수록 더욱 그렇다. 상대적으로 이민이 왕성하던 시기에 미국 땅을 밟고 정착한 교민들의 연령대가 매우 높아졌다. 1세 이민자들 가운데 별세하시는 분들과  정든 제2의 고향을 버리고 자녀들이 있는 곳으로 이주하는 수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고령화는 자연스런 사회학적 현상이지만, 교회는 이런 상황 속에서 파생된 다양한 실제적인 문제와 씨름하기 시작하였다. 미래의 교회 모습이 마치 안개에 가려진 것 같다는 사실로 인한 불안감이 무척 크다. 특히 영어권에서 자란 2세들을 언어와 문화적으로 자신들과 친숙한 공동체에 소속하도록 독립시켰지만, 차세대에 신앙의 계승이 가능할지 우려하는 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② 지속적인 이민교회의 갈등과 분쟁  

   

이민사회는 아직 교회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민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거의 모두 바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간다고 보아도 된다. 언제부턴가 이민 사회가 이민교회를 걱정하게 되었다. 갈등과 분쟁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부정적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소모하고 있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곳이라는 말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부패한 심성을 지닌 부족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흠이 없는 완벽한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민사회가 이민교회를 향해 아예 기대감조차 포기하였거나 그리할 수 있다는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③ 난제 해결에 위한 자의적 노력

    

망가진 것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고쳐야한다. 이것이 개혁이다. 이민교회는 현대 당면하고 있는 문제와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대책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고 있지 않다. 교회 개혁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와 강연회에서 발표된 전문가들의 통찰력을 통하여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다. 또한 각 교회마다 개혁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받아드리고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아가서 각 성도들마다 나름대로 상황을 판단하고 가능한 개혁의 방향성을 제시할 것이라 생각된다.   

 

진정한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열정의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이민교회가 지닌 난제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떤 해결 방법을 선택하려고 하느냐? 에 대한 분명한 답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민교회의 갈등과 분쟁이 지속되는 원인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자신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그릇된 주장을 수용하거나 양보하지 않기에 다른 생각들이 부딪혀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다. 결국 자의적 방법에 대한 열정이 더할수록 문제가 확장되고 심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 루터의 고민과 해결책: 십자가 신학

 

①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 

 

루터를 분리주의자라로 매도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구교 측에서는 루터를 아주 반항적이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한 인물로 평가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출발일은 1517년 10월 31일이다. 이 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과연 그가 '95개 조항'을 발표하면서 개신교의 출발을 세상에 알렸을까?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다.

 

루터는 도미니크 소속 신부인 요하네스 테첼(Johannes Tetzel)이 면죄부 구매를 부추기는 설교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동전이 딸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던 자들이 빠져나온다는 설교를 들으며 미혹을 당한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에게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마인쯔(Mains)의 대주교였던 알프레히트(Albrecht)가 저술한 소책자 '면죄부 지침서'를 읽은 뒤였다. 그가 모든 일을 뒤에서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95개 조항'을 기록하면서 자신이 구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독립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는 개혁의 의지를 이곳에 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심려를 기울여 작성한 '95개 조항'에 대한 토론을 요청한 것이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그런 행위 자체가 커다란 문제가 될 것은 아니었다. 그가 요구하였던 것은 면죄부가 과연 성경적인지를 두고 함께 고민하자는 것이었다.  

 

이후로도 루터는 구교에 속한 성직자나 교인들을 공격하는 것이 곧 개혁이라고 판단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먼저 중요한 주제가 주어질 때마다 성경이 무엇이라 지시하는지 겸손하게 귀를 기울였다. 상대도 자신과 같이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 앞에 함께 엎드리기를 간절히 원하였던 것이다. 

 

구교의 입장에서 루터는 '오직 성경'을 주장한 분리주의자이다. 구교의 입장에서는 루터가 교만한 자세로 날카로운 소리를 낸, 결코 용서할 수 없는 호전적인 자이다. 그러나 루터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겸손한 자세로 성경의 진리 앞에 엄숙하게 엎드렸다. 성령을 통해 주신 확신을 사려 깊게 드러냈고, 진리 앞에서 타협하지 않았을 뿐이다. 

 

루터가 판단한 구교가 지닌 치명적인 문제는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권위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들도 루터와 같이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다. 단지 교회의 전통을 추가한 것이다. 나아가서, 성령이 아닌 교황이 성경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성경의 권위를 빙자하여 교황의 권위를 성경의 위치로 높인 것이다.  

 

성경만을 최종 권위에 두지 않는 상황 속에서, 루터와 구교는 한 길을 걸어갈 수 없었다. 루터의 성경적 개혁에 동조하고 따랐던 사람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절대적인 권위 앞에 겸손한 마음을 취하는 자세를 잊지 않았다. 루터가 이끄는 개혁의 영향력은, 상대를 향해 자의적인 의견을 크고 날카로운 소리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낮아진 마음을 갖는 것이었다.

 

②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  

 

루터는 스위스 출신 인문학자 에라스무스(Desiderius?Erasmus)와 교류 하게 되었다. 그도 개혁적인 마인드를 지닌 자였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인간의 의지'에 관한 다른 관점으로 인해 논쟁이 벌어졌다. 1524년, 에라스무스가 출간한 '자유의지론'을 출간하였다. 그는 성경은 자유의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으려면 반드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에 맞서 루터는 1525년에 '노예의지론'을 출판하였다. 인간의 의지는 죄로 인하여 부패하였기에, 어떤 노력으로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성경이 구원을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달렸다고 가르친다고 역설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오가는 가운데 루터가 발견한 에라스무스의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 그것은, 성경의 내용은 우리에게 분명하지 않고 애매하며 하나님의 예정 또는 이신칭의 같은 교리적 내용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읽는 성도에게 교리는 필요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요구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와 반대로 성경의 명료성을 주장하였다. 성경은 모든 일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시며, 특히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우리에게 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나아가서 루터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답을 주지 않으시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할 것을 권장하였다. 성경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지고 부분을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성경 자체가 지닌 주관적인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유일한 주제이시다. 성경 앞에 자신의 편견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루터가 성경이 그리스도를 선포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  

 

설교에 대한 루터의 생각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듯, 선포되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믿음을 들음에서 난다는 성경 구절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였다. 즉, 설교란 회중을 그리스도에게 오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회중에게 다가가게 하는 것이다. 선포되는 말씀이 있어야 성령의 내적 사역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선택하여 두신 도구로서, 반드시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참된 교회의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애매하지 않다. 구약과 신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서 교리와 삶의 문제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해결 받을 수 있다. 성경의 내용을 분명하다. 문제는 영적으로 우둔한 우리에게 있다. 진정한 성경적 개혁은, 주어진 특정한 주제를 앞에 두고 함께 성령께 의지하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에 담겨져 있는 답을 찾는 것이다. 

 

③ 연약과 불안이 소망으로   

 

1518년, 루터가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28개 조항'을 발표하였다. 종교 개혁의 긴 여정이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이 자리에서 루터는 평생 그를 대표할 수 있는 핵심적 신학 사상인 '십자가 신학'을 발표하였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루터가 외친 말이다.   

 

'십자가 신학'이란 어떤 것일까? 이 신학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절대적인 진리라며 주장하던 자들을 논박하는 의미에서 형성된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먼저 인간의 이성을 절대화 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신학의 한계점을 드러냈다. 하나님은 자신을 직접 보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을 대면했던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 루터는 우리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숨어 계시며 자신을 나타내신다. 

 

인간의 이성은 도저히 십자가라는 매우 천한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이로서 인간의 이성과 지혜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한계를 깨닫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정하신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나아가서 '십자가 신학'은 자신의 경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진리로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광경은 실로 참담하였다. 그는 연약한 모습으로 매를 맞고 고통 속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우리가 경험을 토대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을 경험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주장한다. 단지 십자가 뒤에 숨어계셨을 뿐이다. 하나님은 부활을 통하여 그가 항상 십자가에 계셨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경험과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분명하게 존재하신다는 바를 증명하려한 것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학문적 이론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경험한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경험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성도와 교회가 역경을 경험하면서 이성과 경험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려 한다면 오직 절망뿐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할 때에 모진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붙잡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십자가의 고통을 참고 견뎠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고난이 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기를 즐겨해야 한다. 약함 속에서 강함을 드러내시는 역설적인 십자가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루터는 매일 고난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해야 했다. 그를 주적으로 삼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계속 압박을 받았다. 예상 밖의 길로 나간 급진적 개혁자들로 인해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았다. 무엇보다 새롭게 시작된 개신교 교회의 미래를 책임진 지도자로서 맡은 업무가 매우 중하였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통하여 그의 '십자가 신학'이 더욱 정제되고 확인되어갔다.  

 

3. 정리

 

이민생활은 이래저래 끓임 없이 고난의 연속이다. 중요한 것은 날카로운 소리인가 낮아지는 모습인가? 이민교회에 문제가 있다. 안개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이사람 저사람 다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서서 해결하자고 한다. 고난 가운데 계신 하나님, 낮아지신 가운데 계신 하나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더 낮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낮아지신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우리가 낮아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십자가 신학을 통해 이민교회에 말씀해 주신다고 생각한다. 

 

이민교회는 매우 연약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루터의 모습을 통해 가르쳐 주신 것이 있다. 그것이 성경적인 역설이다. 연약을 통해서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아마도 이민교회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라며 손들고 납작 엎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길을 제시할 수 있지 않겠냐고 감히 말씀 드린다.  

 

십자가 신학은 연약을 통해 능력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아진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이민교회가 지금 작아지고 연약해지고 있을 때 이것을 두려워하고 이슈화할 것이 아니라 낮아진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3가지를 말씀드렸다. 첫째, 개혁의 출발점으로 말씀 앞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둘째, 개혁의 원동력으로 나는 무엇을 믿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셋째, 개혁의 영향력으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것인지 낮아진 마음을 가지는 것인지 물었고 답을 찾았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성경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왜 개혁된 교회가 계속 개혁되는 줄 아는가? 루터의 의견을 빌리면 우리는 분명히 의인이지만 계속 죄인이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개혁되었으니 개혁된 대로 살자가 아니라 우리가 의인이 되었지만 계속 죄인인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의가 계속 필요한 것처럼 어제 개혁되었으면 오늘도 말씀으로 개혁되고 내일도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말씀으로 돌아가자”라고 하는 근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성경을 인용하고 성경을 말하면서 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성경 앞에 서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성경으로 개혁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서 계속 개혁되어 나가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본다.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오늘날 한인이민교회는 거센 바람 앞의 촛불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오셨다. 내가 팔을 걷어 부치고 무엇을 하겠다고 하는 것도 너무 귀한 일이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역사가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 앞에 내 소명과 사명을 신중하게 돌아보고, 내 몫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고, 너무 크고 장황한 것이 아니라 나의 몫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작아도 분명하고, 내용이 있으며 근본을 붙잡는, 무엇보다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개혁은 바로 루터가 우리에게 보여준 개혁의 모습이다.

 

이번 강의를 준비하면서 돌아본 저의 모습은 학점으로 보면 낙제점이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정말 서 계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권위로 받아들이는가? 우리는 환경가운데에서 십자가 가운데에서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계시는가? 

 

“마틴 루터의 성경적 종교개혁과 이민교회” 관련기사 보기

- ①개혁의 출발점: 말씀 앞에 비쳐진 나의 모습은?
- ②개혁의 원동력: 나는 무엇을 믿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나?
- ③개혁의 영향력: 날카로운 소리인가, 낮아진 마음인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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