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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전쟁” 열린말씀 컨퍼런스, 류인현 목사 “말의 거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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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4-1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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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을 맞이한 열린말씀 컨퍼런스가 차세대(The Next) 40대 초반 3명을 주강사로 초청하여 '열린말씀 더 넥스트(The Next) 컨퍼런스'라는 이름으로 11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 지역에서 열렸다. 컨퍼런스는 필라 지역에서 동역하는 세 교회(임마누엘교회, 첼튼햄교회, 기쁨의 교회)가 돌아가면서 하루씩 호스트했다.

이번 집회 주제는 "말의 전쟁"인데 폴 츄립(Paul Tripp) 교수가 쓴 같은 제목의 책에서 나온 것이다. 박성일 목사는 컨퍼런스를 시작하며 “한 마디로 상담학적인 개념에서 말을 조심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구속사적 의미에서 말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창세의 경륜을 체험하고, 장차 우리가 천국에서 나누어야 할 말을 체험하려고 한다. 성경에 말에 대해 너무 많이 나와 있다. 말은 말일 뿐이라는 분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의 말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기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이 담기지 않으면 우리는 망할 것이다. 말에 따라 우리가 변화되고, 가정이 변화되고, 교회가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될 것이다”고 주제의 의도를 소개했다.

3인의 차세대 강사는 맨하탄에 있는 뉴프론티어 교회의 류인현 목사, 캘리포니어의 대학도시 데이비스에서 한인교회를 담임하는 이은재 목사, 그리고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신약학 교수로 학생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김은일 교수이다. 류인현 목사는 "말의 거듭남: 정결해진 마음의 샘"와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라"라는 말씀을 전했다. 이은재 목사는 "악한 말, 거짓된 말: 타락한 세상의 타락한 언어"와 "많아진 말 속에 상실된 의미: 정보시대의 역설"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김은일 교수는 "말의 성화: 말의 무게감(거룩)의 회복", "평화의 말: 거룩한 소통의 회복", "진리와 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류인현 목사의 말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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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하는 류인현 목사

말의 거듭남: 정결해진 마음의 샘 / 류인현 목사
야고보서 3:1-12

설문조사 결과, 초·중·고생 응답자의 65.6%가 '매일 욕을 한다'고 응답했다. '하루에 자주 또는 습관적으로 욕을 한다'고 응답한 비율도 29.1%였다. 학생 중 3분의 2 정도가 욕설 문화에 젖어 있는 셈이지만, 본인이 의식하지 않고 쓰는 욕설까지 고려하면 이 수치는 훨씬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욕설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52%가 '습관적으로', 23.2%가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이 하니까'라고 했다. 욕설이 학생들의 습관이 돼버린 것은 오랫동안 입시 위주 교육이 이뤄지는 동안 학생들이 인터넷·영화 등에 나오는 욕설 문화에 방치된 결과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진짜 걱정이 되는 것은 이런 문화적 현상이 단지 교회 안 다니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 아이들에게서도 비슷한 현상을 본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우리교회 친구들의 페이스북이나 트윗을 볼 때가 간혹 바르지 못한 욕설에 가까운 말들을 여과없이 내뱉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타락한 언어의 환경을 잘 보여주는 모습들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이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말의 타락 또한 저는 가속화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어느 때보다도 말의 영향력이 커진 세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축복과 선물로 가득 채우셨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인간에게만 주신 선물들이 참 많이 있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말”입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는 동물처럼 말을 못하고 소리만 내지만 점점 인간이 자라가면서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말을 곧잘 하게 됩니다. 그 말은 자신이 태어난 곳이 어디냐에 따라 한국말을 하는 한국인이 되고, 미국말 영어를 하는 미국인이 됩니다.

사실, 인간이 최초로 말을 배우는 것은 어머니를 통해서입니다. 어머니의 젖을 먹고 어머니와 눈빛을 교환하고 어머니의 단순한 말을 들으며 의사소통을 하고 점점 그 어머니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말을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말을 차츰 배워 갑니다. 결국 인간이 말을 처음 배우는 계기는 어머니의 품, 어머니의 사랑 안에서입니다. 말을 먼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먼저 느끼며 말을 배워간다는 말이지요.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라면서 말을 배우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모국어라고 말합니다. 영어로도 mother tongue이라고 하지요.

저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말이라는 선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하나님은 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가 말씀, the Word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인간의 말은 단순히 자기표현의 한 방법이나 의사소통의 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말은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생명이요 에너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Let there be light”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선포되었을 때 생명력이 발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온 우주 만물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한 개인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아담아, 아담아, 모세야 모세야,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말을 먼저 거셨습니다. 마치 엄마가 아이에게 먼저 말을 걸면서 말을 배우게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을 거셨고 우리는 그의 음성을 들으며 말을 배워 갑니다. 결국 모든 인류의 모국어는 원래 동일한 언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반사하는 하나의 언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우리의 언어는 아담의 죄로 인해 오염되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심각한 도전인 바벨탑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언어의 혼잡이라고 하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결국 인간들 사이에서도 소통의 단절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결국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모국어를 잃어버리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에덴을 떠나 나와 모국을 등지고 타국에서 산지가 오래되어 모국어를 잃어버리게 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말이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언어는 점점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닮은 진실의 말보다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말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말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살려내기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벌어진 50대 경비원 아저씨의 죽음 사건 아시나요? 언어가 빚은 비극적인 현대사회의 한 단면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는 온갖 욕설과 시비와 폭언으로 사람의 생명이 죽어가는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일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고 잃어버린 하늘의 모국어를 되찾은 사람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 교회 안에서도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단지 현대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문제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가 잃어버린 모국어를 되찾은 성도들의 언어생활에 대한 실제적인 가르침을 주는 모습을 봅니다. 우선 야고보 사도는 말의 위력, 말의 영향력에 대해 비유로 말씀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과 혀에 대해 4가지로 비유합니다. 먼저는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로, 배의 키로, 그리고 불로 그리고 독으로 비유합니다. 앞의 두 비유, 재갈과 키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뒤의 두 비유, 불과 독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다뤄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비유는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입니다.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인데요. 길들여지지 않은 힘센 야생마를 주인이 마음껏 조정하고 그 위에 올라타서 이동 수단을 삼으려고 그 입에 300kg이나 되는 재갈을 물려 말의 혀에 엄청난 고통을 주어 힘을 컨트롤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 혀에 가해지는 고통을 이기려고 계속해서 그 재갈을 밀어 올리는데 그래서 혀를 보며 시퍼렇게 변해 있고 어금니도 많이 닳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언어를 통제한다는 것이 마치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과도 같은 고통이 따르기는 하지만,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또, 두번째 비유는 배의 키입니다. 배의 키는 방향을 정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지요. 배에 이 키가 없으면 사실 배가 정면으로 직진하지도 못하지요. 아무리 큰 배라 할지라도 파도와 광풍에 밀려 방향이 시시각각 변할 수 있고 심지어는 파선할 수도 있는데, 키는 단지 배의 방향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배가 뒤집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혜로운 말로 배의 파선을 막은 좋은 예가 사무엘상 25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다윗이 나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후 보복하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을 만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먼저 나발의 죄악에 대해 용서를 구한 뒤 지혜로운 충언을 하지요. 다윗이 원수에게 보복하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처벌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명을 생명싸개 속에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후회하게 될 실수를 범하지 말라는 충언이었습니다. 결국 지혜로운 아비가일의 말 때문에 다윗은 물론 자기 집안까지 구원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야고보 사도는 말의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을 잘 통제하고 지혜롭게 사용할 경우에는 그로 인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의 생명력과는 반대로 말의 파괴력에 대해 야고보 사도는 불과 독으로 비유로 엄중하게 말씀합니다. 먼저, 작은 불씨가 숲을 다 태우듯이 작은 말 한마디가 한 사람 인생의 수레바퀴를 불사르고, 지옥 맛을 보게 할 수가 있다고 말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해 심각하게 경고하는 것을 봅니다. 실제로, 예전에 한국에 산불이유가 담배꽁초 때문이었기에,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불조심 캠페인이 있었던 것 기억하시나요? 미국에서도 1871년, 시카고에서 있었던 유명한 대화재 사건도 그 시작은 한 외양간에서 생긴 작은 스파크가 결국은 17,500개의 빌딩을 태우고 300명을 불태우고 125,000명이 집을 잃게 되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오고 말았지요.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말을 독으로 비유합니다. 말이 사람의 생명을 죽일 수도 있는 독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독이 사람의 육신의 생명을 죽인다면 말이 사람의 영혼을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야고보 사도는 말의 긍정적인 속성과 말의 파괴적 속성을 둘 다 비유로 설명하면서 특히 말의 파괴적 속성, 말의 부정적 속성에 대해 더 엄중히 경고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말의 부정적인 측면을 아우르는 본문의 결정적인 표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6절 말씀에서 혀를 가리켜 야고보가 불의의 세계라고 표현한 부분입니다.

왜 야고보는 혀를 불의의 세계라고 표현했을까요? 이것은 말의 문제가 단순히 자기감정이나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암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혀가 결국 이 세상의 불의함을 드러내는 세상의 축소판이라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말이 단순히 감정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이기에 앞서서 영적인 문제라는 말을 야고보는 하고 있다는 말이죠. 말의 문제를 좋은 말, 나쁜 말이라고 하는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라 의와 불의의 문제로 해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의는 무엇이고 불의는 무엇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의의 개념은 상당히 다양하기 때문에, 다 설명드리기는 어렵지만, 쉽게 말해 의는 죄가 없는 거룩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은데요.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전가받아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지요. 그래서 유일하게 완전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이 십자가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켜 줌으로써 그 사람을 의롭다 칭해주시는 의인으로 인정해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처음에 비유한 말의 긍정적인 측면의 비유, 말의 재갈과 배의 키의 비유에서 재갈과 키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말의 통제력이 인간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에 달려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리스도의 의로 인간의 마음이 새롭게 변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말은 불이나 독처럼 인간의 생명을 죽이는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결국 인간의 타락한 말의 근원은 인간의 불의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단순히 말버릇을 고친다거나 말조심을 한다거나 말에 재갈을 물리는 인간 스스로의 통제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결국 타락한 말의 거듭남은 마음의 거듭남으로만 가능하며, 우리가 날마다 의의 샘과 불의의 샘이라고 하는 두 마음의 샘이 아닌 의의 샘 한 마음의 샘을 통해서 말을 꺼낼 때 우리의 말은 통제되고 정결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로고스,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신 그 말씀으로 인간 속으로 들어와 인간의 마음에 다시금 인간들이 잃어버린 모국어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언어를 죄와 불의로부터 구속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은 이제 야고보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지적한대로,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그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모순된 말을 할 수 없게 된다고 야고보 사도는 주장합니다. 한 샘에서 단 물도 나오고 쓴 물도 나올 수 없고, 무화과 나무에서 감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에서 무화과를 맺을 수 없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는 이런 기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안에 하늘의 모국어가 아닌 인간의 불의한 말들이 넘쳐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담아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향기로운 말, 격려와 축복의 말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더러운 샘에서 흘러나오는 악취나는 말, 비판과 저주의 말을 쏟아내기 때문입니다. 격려와 축복의 말은 사람을 살려 내는 산소와 같고, 비판과 저주의 말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 무기와 같은 것인데, 성도들끼리 격려와 축복의 말보다는 비판과 저주의 말들을 쏟아낼 때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게 되고 마는 것이지요.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마음의 샘이 정결케 된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이제 모국어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잃어버렸던 언어를 다시 픽업해나가는 과정중에 있는 성도들은 모국어를 배우기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곧바로 언어생활이 바뀐다기보다는 그 언어의 옛습관들이 남아 있기때문에, 주님 안에서 새로운 습관을 길러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언어생활이 달라지기 위한 실제적인 두 가지 훈련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1. 침묵을 훈련하십시오

말로 인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말실수가 잦은 분들은 침묵 훈련을 하셔야 합니다. 말을 일정기간 대폭 줄이는 말의 금식을 해 보시길 권유합니다. 영성가들은 모두가 침묵훈련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사실 모든 자연은 소리없이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침묵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비로소 들려옵니다. 침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요히 낮아지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침묵은 많은 말들로 피곤해진 우리의 영혼을 쉬게 하는 시간입니다. 잘 말하려면 말하지 않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사실, 말을 잘 하는 것과 잘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말을 잘 하기 위해서는 말을 많이 해야 하지만, 잘 말하기 위해서는 말을 적게 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자기 의에 사로 잡혀 쓸데없는 가십이나 뒷담화, 원망의 말들을 퍼트리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순모임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한갓 죄인들의 잡담으로 넘쳐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교회는 핏대 세우며 자기주장을 펼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의 순모임은 하나님의 모국어, 하나님의 의로운 언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을 가득 채우는 모임이, 신성한 천국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교모임도 아니고 자선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거룩한 주님의 몸입니다. 그 몸에서 나오는 말은 깨끗하고 정결한 언어여야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라고 다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혼에 큰 상처를 주고 사람에게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 그런 독한 말을 내뱉고서 미안하다고 하면 다가 아닙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르더라도 서로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의인입니다. 이런 의인은 야고보 1장 말씀처럼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를 더디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약1:19-2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이 지상의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어느 교회나 어느 모임이나 불완전합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 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다르지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팔이 되고 누군가는 손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침묵을 훈련하고 연습할 때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며,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말하는 사람으로 성숙해져 갈 줄로 믿습니다.

2. 기도를 훈련하십시오

기도는 악취나는 내 불의의 옷을 내어 던지고 향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갈아입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청소하는 시간입니다. 구석 구석 끼어 있는 먼지들을 털어내고 우리의 마음을 거룩하게 비워내는 시간이며 그 깨끗한 영혼의 방에 주님을 모셔 들이는 일이 기도의 시간입니다. 기도는 내 욕심과 내 의를 이루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내가 죽고 예수가 내 안에 살아 숨쉬게 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이 땅의 저주받은 언어가 아니라 하늘의 모국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영혼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주님의 품에 안기어 그 사랑으로 채워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끔 내 눈을 바꾸어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가을에 여러분의 영혼은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옹달샘에서는 어떠한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모국어로 채워져서 영혼의 그윽이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아니면 악취나는 나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배우자들에게,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순원들에게, 성도들에게 여러분은 어떤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까?

저는 이 깊어져가는 가을, 여러분의 영혼이 세상의 불의한 언어로 더러워지지 않고 하나님의 모국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길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해인 님의 “말을 위한 기도”라는 시를 낭송해 드림으로 말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말을 위한 기도 / 이해인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 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道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더 겸허하고
좀더 인내롭고
좀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른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 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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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 / 류인현 목사
엡4:11-16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내가 진실을 말함으로 인해 무언가 손해나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저건 분명 잘못된 것인 데하며 문제를 발견했지만 그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그 문제가 더 커지고 결국 그 문제로 인해 관계나 어떤 조직이 더 힘들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문제를 덮어버리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 문제를 내가 제기한다손 치더라도 세상사람들이 내 편이 되어 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 진실의 말을 할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결국은 진실의 힘이 약하다기보다는 진실의 힘에 대한 나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을 택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결국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죄라는 것이 에덴동산에 들어오고 나서 가장 먼저 생긴 증상은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진리를 말씀하셨고, 그 진리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 찾아오게 된 것이지요.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게 있어서 무언가 잘못한 게 있을 때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오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살인범들의 특징도 범죄현장에 반드시 찾아온다는 특징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자기를 잡으려는 형사들의 동태를 살핀다는 것이지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사탄의 거짓의 말을 듣고 따랐던 아담과 하와는 두려움에 빠졌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결국 그들의 두려움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된 사건이지요. 두려움의 치료제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사도요한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일 4:16-19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는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5장 탕자비유에서 나오듯이 잃어버린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탕자의 모습이 기억나십니까? 아버지 집 바깥세상도 살만하고 오히려 더 즐겁고 행복한 삶일 줄 알았는데, 세상이 주는 쾌락의 끝은 오히려 비참함과 불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그는 그 맘속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과연 아버지가 나를 다시 자식으로 받아주실까? 다시 자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종이라도 그 큰 집에서 살면 좋겠다는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의 반응은 전혀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버선발로 뛰어 나오시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의 뜨거운 포옹과 뽀뽀세례를 받으며 잃었던 생명, 삶의 행복을 되찾는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탕자의 두려움을 다 내어 쫒은 것이지요. 우리가 흔히 기도할 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하는데요. 이 표현은 사실 지극히 인간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하는 사랑의 넓이나 깊이가 너무 좁고 얕아서 사랑이 많다는 표현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사실상 하나님의 사랑은 말 그대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이즈를 잴 수 없듯이 하나님의 사랑의 사이즈를 잴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오직 이 사랑만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쫒을 수 있는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한 치의 의심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성경의 구속의 스토리는 하나님의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껴안고 눈밭에서 뒹구시는 러브스토리입니다. 아담에게 가죽 옷을 입히셨고, 가인에게도 표를 주셨고, 야곱과 얍복강가에서 씨름하셨고, 요셉과 감옥생활을 함께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거친 광야를 함께 통과하셨고, 가나안 전쟁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한 개인과 한 가정과 한 민족과 모든 열방의 구원을 위해 지치지 않는 사랑의 열정을 이 땅가운데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그것도 자기를 끊임없이 배신하는 그런 죄인들을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할 수 있는지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단순한 한 문장은 그렇게 쉽고 짧게 우리에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평생에 가슴 속에 깊이 새겨져야할 진리라고 믿습니다.

자 그런데, 이제 정말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 속에서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멀어져 버린 그래서 두려움 속에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쌍한 운명을 보시고 그들을 다시금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게끔 열어 놓으신 유일한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지요.

엡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예정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의 회복이 예수 그리스도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엡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하면 이 땅의 이지러지고 깨어진 모든 것들, 하늘의 것들이나 땅의 것들이나 그야말로 창조된 모든 것들을 하나가 되게 하시는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되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엄청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의 일을 아들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고 이 아버지의 뜻은 아들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순종과 부활로 온전히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된 소리. 그리고 이 복음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에베소서 1장13절에서 바울은 표현합니다. 죄악된 세상 풍속을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말을 따라 불순종의 아들 노릇을 하던 탕자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에 풍성하신 사랑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음으로 인해서 순종하는 아들의 모습을 다시금 회복하게 되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지요.

결국 첫째 아담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린 인간의 구원이 인간 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진행되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셨고 인류에게 그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는데, 우리가 기억해야 중요한 사실은 이 엄청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져 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오늘 본문에 보면 여러 교회 직분자들이 등장합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이들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회복시켜 나가는 것을 돕는 사람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인데요. 이들이 성도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방법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13절에 보시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모판인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고 거룩하게 구별된 공동체로서 진리이신 예수의 복음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됨으로써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세상에 빛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이런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파괴하는 사탄의 공격들이 나와 있습니다. 사람의 속임수, 간사한 유혹, 세상의 사상의 풍조때문에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견고하게 진리 안에서 하나되어 있던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고 몸에 이상이 생기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요즘에도 한국이나 미국에도 보면 이단이나 사이비들이 많이 교회를 요동하게 하고 갈라지게 하는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신천지 얘기는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사탄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도 그랬듯이 거짓말은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라 대개 half-truth를 담고 있는 그럴듯한 말입니다. 이단도 처음은 같지만 끝이 다르다는 의미이고, 사이비도 비슷하지만 다르다는 이야기지요. 진리의 기둥과 터인 교회가 진리를 파수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힘써 자라가지 못할 때 교회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고, 사탄은 그 틈을 이용해 맹렬하게 공격해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컨퍼런스를 마무리하면서 여러분에게 사도바울의 권면의 말씀이 참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듯이 저와 여러분에게 거짓과 속임수로 다가와 우리가 가진 복음에 대한 확신을 흔들어 놓고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게 할 것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의심과 불만을 마음속에 심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의 교회를 아들의 보혈로 세우셨고, 진리의 기둥과 터로 세우셨기 때문에 사랑으로 하나 되시면 교회가 그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결국 교회가 힘을 잃어가거나 빛을 잃어가는 것은 사탄의 공격이 강해서거나 세상이 흉흉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진리의 복음을 파수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알아가는 일에 하나가 되어 서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장에도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씀합니다. 진리와 사랑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사랑없는 진리는 오만한 자기 의이고, 진리없는 사랑은 비겁한 자기방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결국 둘다 이기적인 것이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없이 진리만을 고집했던 바리새인들이나 진리없이 사랑만을 실천하는 이단은 결국 이기적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진리를 믿지 않고는 거짓에 속아 살 수밖에 없고, 형제사랑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요한일서에서는 그건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거짓의 아비인 뱀의 머리를 치심으로써 결국은 진리가 거짓을 이긴다는 사실을 증명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진리의 복음을 믿는 자들의 마음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이제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게 하십니다.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으며 복음 안에서 하나되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목적은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이고, 그리스도인들을 믿음가운데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가기 위함이며 결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켜 가기 위함입니다.

여러분들이 섬기시는 교회는 진리가 아닌 편리가 더 중요해져 버린 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복음만이 진리요 희망임을 확신하며 기뻐할 수 있는 진리의 공동체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점점 사랑이 식어져 가는 이 시대에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해지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시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이 일이 오직 진리요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함을 믿으며 끝까지 주님만 의지하며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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