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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목사 ② 건강한 영성 - 비움과 채움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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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4-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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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미국장로교 전국한인목회자 컨퍼런스가 "목회자의 자기관리"라는 주제로 9월 15일부터 18일까지 리노한인장로교회에서 열렸다. 주강사는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목사)는 4개의 주강의를 했는데 △건강한 목회 △건강한 영성 △목회와 설교 △성령과 설교 등이다.

이 기사는 두번째 강의인 '건강한 영성'에 대한 후반부 강의 내용이다. 강의를 통해 이동원 목사는 기독교 영성의 독특성으로 '비움과 채움의 영성'을 길게 설명하고 있다. 이번 강의내용은 여러 화제가 될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이 목사는 "한국교회에서 한번 실험하다가 몰매를 맞았다"고 표현한 관상기도에 대한 해명과 설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코스타를 시작한 계기, 이용규 선교사와의 여러 일화들, 65세 조기은퇴와 은퇴금없는 은퇴 등을 하게 된 계기 등 흥미로운 간증내용들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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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를 인도하는 이동원 목사

강의가 끝나고, 한 목회자는 최근 한국교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오정현 목사와 전병욱 목사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동원 목사는 요즘 그 문제들로 돌아다니며 사과만 하고 다닌다고 어려움을 표시했다.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교통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몇개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동원 목사는 이어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4인방 모임이 교파도 다르고 나이차이도 있었지만, 안아주시고 먼저 고백하고 그런 모본을 보여주는 옥한흠 목사라는 거목이 있어서 모임을 성공적으로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옥 목사처럼 후배들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하는 아픔과 책임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다음세대 한국교회를 이끌어 갈 좋은 리더들을 하나님이 세워주시지 않을까 하는 바램으로 날마다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결국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다른 종교와 유사성도 있으면서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기독교 영성의 독특성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비움과 채움의 영성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비워야 하는가. 들어가지 말 것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있어야 할 것을 우리 안에 채워야 한다. 결국 영양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건강한 사역자가 되고 건강한 목회를 위해 씨름해야 할 영성적 과제가 비움과 채움의 과제이다.

I. 비움(kenosis)

1. 비움의 성경적 근거

잘아시는대로 비움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 불교인들에게 훨낀 더 친숙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불교의 선승이나 심지어 이슬람의 수피같은데서도 비움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비움에 대한 강조가 없는 것 처럼 착각한다. 실제로 비움에 대한 성경을 공부하면서 놀랍게도 성경이야 말로 다른 어떤 책이나 어떤 종교못지 않게 비움을 더 진솔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움의 성경적인 근거로 제일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말씀이 있다면 빌립보서 2:5~8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편지하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이시지만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다. 영어로는 "emptied Himself"라고 표현된다. 희랍어로 "kenosis" 라는 단어이다. 자기를 비우셨다.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이 비우고 오신 생애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서 그리고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 분이 마침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죽으심은 비움의 절정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케노시스(kenosis)"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 8:9에서 고린도교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자발적인 청빈이다. 주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의 부유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가난으로만 끝나면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계서 우리를 부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비워주셨다면, 우리는 그 분을 통해서 다시 채워주심을 경험할 수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비움과 채움이라는 기독교 영성의 독특한 두 개의 측면을 함께 발견할 수가 있다.

2. 비움의 목회적 실천

실제로 기독교 영성의 역사를 보면 이런 비움을 우리의 목회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음을 볼 수가 있다.

1) 예수 기도(Jesus Prayer)=예수 기도는 개신교하고는 좀 거리가 먼 관계인 동방교회 전통으로 최근에 와서는 이 부분에 대한 것이 많이 알려졌다. 특히 헨리 나우엔이 자기 평생을 통해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이 '예수 기도'이라고 하며, 그것이 얼마나 자기 생애에 크게 도움이 되었는지를 강조한다. 예수 기도하니 무슨 예수님이 하신 기도처럼 오해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했던 기도가 예수 기도이다.

사실 예수 기도의 원천은 사막교구 시대부터 있었다. 그때부터 많은 기도가 뿔뿔히 흩어져서 적용해 오다가 11세기에 와서 하나의 기도문으로 정형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신교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기도문이 주기도문이라면 동방정교 교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기도문은 바로 예수 기도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된 저를 불상히 여기소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에 나오는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그대로 나온다.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간다고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 그 기도가 응답됐다. 한센병 환자들이 지나가는 예수님에게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으며 다 깨끗함을 얻었다. 또 바래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함께 기도한다. 바리새인이 기도후 세리가 기도하기를 하늘을 올려다 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한다. 그 기도가 응답됐다.

그 기도들의 공통점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서 발견한 기도를 가지고 기도를 실험하던 사람들이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한다. 동방교회 신학자들은 이런 정의를 한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이렇게 좋아하시고, 우리에게 수많은 응답과 은혜를 부어주시는 이유는 단지 하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가장 위대한 속성중의 하나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속성이기때문에 우리가 긍휼을 빌때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치유해 주신다.

사실 이 기도는 우리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힘들때 아플때 어려울때 이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긍휼을 빌었고, 하나님 앞에 부요해지고 채워지는 체험을 할 수가 있었다.

2) 세족식=대부분의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 두가지 밖에 인정하지 않지만, 어떤 교파에서는 세족식을 마치 세번째 성례인 것 처럼 강조하는 교단도 있다. 과연 세족식이 성례의 한 차원이 될 수 있다 안된다는 것은 신학적인 토론이 되겠지만, 주님이 세족의 모본을 보여주시면서 이것을 알고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다. 요즘은 한국교회에서 세족식을 많이 한다. 저는 70년대에 초에 미국에 유학와서 지금도 잊어버릴 수 없는 경험을 했다. 부활절 방학때 친구와 함께 인디아나 주를 여행하다 어떤 미국교회에서 굿 프라이데이 예배를 드렸다. 예배에서 성찬식을 했다. 성찬식을 하고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아래 층에서 세족식이 하니 참여하라고 했다. 당시 저는 성경에서만 보았지 그때까지 한번도 세족식을 본 적이 없다. 지금은 많이 하지만 70년대 초에 한국교회에 세족식이 없었다.

호기심이 생겨 내려가 보았다. 그러니 사회하는 분이 남녀를 따로 나누어 둘씩 짝을 지으라고 한다. 자리에는 의자와 세숫대야가 있었다. 제 앞에 구렛나루 수염있는 친구가 오더니 악수하고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어떻게 크리스찬이 되었는가를 묻기에 간단히 간증을 하니, 만나서 반갑다고 앉혀놓고 저의 양발을 벗겼다. 참 어색했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제 발을 붙들고 진지하게 기도했다. 그리고 저의 눈을 쳐다보고 "당신을 처음 알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임을 알고 너무 기쁘다"고 신앙고백 같은 것을 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 처럼 그 모본을 따라 형제를 발을 씻고 싶다며 저의 발을 씻기 시작했다. 씻김을 당하다가 갑자기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이 임했다. 갑자기 발을 씻기고 있는 그 친구의 모습이 예수님 처럼 보였다. 예수님이 내 발을 이렇게 씻겨 주셨구나, 내 죄도 내 아픔도 이렇게 씻겨 주셨구나 하는 생각으로 막 눈물이 나왔다. 감동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 와서 첫 번째 목회하던 교회에서 세족식을 해 보았다. 직접 보았던 인디아나 주의 교회처럼 성찬식을 하고 아래층에 내려가도록 했다. 둘씩 짝을 지게 하고 서로 발을 잡고 기도하라고 인도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짝이 없어서 왔다 갔다 했다. 그래서 저와 짝이 되었다. 짝이 된 집사님은 목회를 힘들게 하던 사람이었다. 제가 그 집사님의 발을 붙들고 기도하는데 나도 모르게 준비되지 않은 이런 고백이 나왔다. "집사님, 집사님이 제 목회를 별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에 섭섭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집사님을 먼저 사랑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집사님, 내가 집사님을 앞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할테니 오늘 제 섬김을 받아주세요." 그러자 그 집사님에게서 울음이 터졌다.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데에서도 여저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감동이 있었다.

목회하면서 특별히 교회에서 항존직을 세울때는 세족식을 했다. 세족식을 통해 항존직으로 세움을 받는 것은 섬기기 위한 것이지 어떤 계급이 아니라는 결단을 할때 그것이 얼마나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모른다. 저는 세족식 자체가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는 중요한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3) 성찬식=성찬식도 물론이다. 성찬식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글을 쓴 사람이 헨리 나우엔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성찬행위속 중요한 동사 4가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찾는다. 선택받은 자 - 축복받은 자 - 깨어진 자 - 나누는 자(took-blessed-broke-gave)이다.

예수님은 떡을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깨뜨리시고, 나누어주셨다. 그것에서 그리스도 인의 정체성을 찾는다. 우리는 선택받은 자이다. 주님이 떡을 선택하시는 것 처럼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선택하신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하신다. 그러나 마지막에 사랑을 나누고 축복을 나누어지기 위해서는 주님이 반드시 우리를 성찬의 떡처럼 깨뜨리신다. 예수님이 깨어졌기에 그 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 처럼, 우리도 자신을 깨뜨리기않고는 이웃들에게 다가 설 수 없다. 성찬을 통해 그런 깨어짐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의 예전이 아니라 얼마나 진솔한 비움의 메세지가 될 수 있겠는가.

3. 비움의 영성적 실천

1) 모든 것을 비우고 다만 주님만을 바라보기=비움의 영성적 실천은 여러가지로 실천할 수 있다. 특별히 우리는 자기 성찰의 시간이 너무 없다. 그래서 제가 한국교회에서 관상기도를 한번 실험하다가 몰매를 맞았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한번도 와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몰매를 맞았다. 제가 관상기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중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교회가 너무 통성기도 일변도이기에 통성기도와 함께 침묵기도가 균형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통성으로 소리만 지르고 끝나기에 자신을 차분히 돌아보는 시간이 없다. 침묵기도를 해보면 침묵하면서 그것에서 이루어지는 자기만족, 들려오는 조용한 주의 음성, 그리고 통성기도 못지 않은 파워풀한 성령님의 임재등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이웃 사랑을 위한 자발적 가난=우리가 비움을 실천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이웃을 향하여 내가 가진 것을 깨뜨리고 돕는 자선의 행위, 내 지갑을 깨뜨리고 내가 가진 소유의 일부를 깨뜨리는 자발적인 가난의 행위이다.


II. 채움(pleros)

그러나 저는 기독교 영성의 독특성은 단순히 비움에 있지 않다. 비우는 것은 채우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깨뜨린 것은 우리를 부요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비움만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기독교 영성이 아니다. 불교 영성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기독교 영성의 독특성은 채움의 영성이다. 케노시스(kenosis)와 함께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플레로스(pleros)라고 생각한다.

1. 채움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나온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깨뜨리고 내어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분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가운데 거하신다고 했다. 예수님은 육신이 되셨다, 가난하게 오셨다, 그러나 그 분안에는 여전히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 그 충만이 바로 플레로스(pleros)이다. 가난했지만 여전히 충만하셨기에 줄 것이 있었다. 우리는 이 동일한 충만이라는 단어를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자주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에베소서 3:18~19, 에베소서 4:13, 에베소서 5:18, 골로새서 2:9~10.

2. 채움의 필요성

채움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골로새서 2:9~10은 채움의 중요성을 가장 잘 강조한 말씀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충만함으로 채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왜 채워질 필요가 있는가. 비워놓기만 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을 아주 실감있게 누가복음 11:24~2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더러운 귀신이 나갔다가 청소를 깨끗히 해 놓은 자기 집을 보고 악한 귀신들을 데리고 와서 그 집을 점령해 버리는 사건이다. 비워놓기만 하면 위험하다. 채워져야 한다. 전 여기서 저는 기독교 영성이 다른 어떤 종교의 영성보다 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부요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충만함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채움에 대한 대안이 있기 때문이다.

3.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렇다면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가장 탁월하게 다가오는 유명한 시편이 시편 62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우리에게 위대한 축복과 부요함이 될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62편은 몇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지는데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내용을 보면 시편 기자가 흔들리는 상황에 있었던 것 같다. 불안하고 두렵고 흔들리는 이런 상황속에서 나온 놀라운 시편기자의 고백을 보면 "하나님만이..."가 반복된다. 모든 것이 흔들리는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만으로 채워졌을때 그 모든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놀라운 평안을 경험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 ‘God alone’의 부유한 축복이다.

인도의 테레사 말고 아빌라의 테레사는 십자가의 성요한을 제자로 길렀던 유명한 여인이다. 수도원 원장이었던 테레사가 어느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부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손에 예수님의 고통을 경험하고 은혜가 부어지는데, 그 중간에 테레사는 자기도 의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고백을 한다. "하나님 그만주세요. 하나님이면 되었어요. 하나님만으로 저는 만족해요." 하나님 한 분만으로 채워졌을때 다른 모든 것이 상대화되었던 기쁨, 영성의 최고의 절정이었던 것 같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임재로 채워지는 기쁨,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로 채워지고, 성령으로 채워지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워지고, 성령의 열매로 채워지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그러니 미움을 버릴려고 애쓰기 보다는 사랑으로 채워지면 되는 것이다. 슬픔을 버릴려고 애쓰기 보다는 기쁨으로 채워지면 된다. 성령의 열매로 채워지면 되는 것이다.


III. 비움과 채움의 순환적 역동성

모든 비움의 교리적인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 모든 것을 가지고 죽으셨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된 것들을 비워내야 할 중요한 근거이다. 그러나 그분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하셨기에, 부활하신 그분의 임재로 채워져야 한다. 우리의 비움의 근거가 죽음이라면, 채움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경험될 수가 있는가. 비움과 채움은 대체적으로 시간적이다. 먼저 비워놓고 채워진다. 때로는 동시에 일어날 수가 있다. 비우는 순간 채워진다. 내려놓는 순간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또한 그 어느 날 과거의 영적인 경험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움과 채움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이어야 한다. 끓임없이 우리는 비워내고 채워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우리 내면의 영성의 거룩함과 부요함을 위해서 끓임없이 나는 얼마나 버렸는가 얼마나 채워졌는가를 확인하고, 필요하면 버리고 채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버림과 채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강의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목회말고 꾸준히 오랫동안 열심히 했던 것 중 하나는 유학생을 전도하는 코스타 운동이다. 사실 우연히 코스타를 시작하게 되었다. 89년초에 워싱톤 디시에서 목회하면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유학생들이 성경공부를 해 달라고 해서 갔다고 도전을 받았다. 지금은 좋은 한인교회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지만, 당시에는 대학가에 한인교회들이 많이 없을 때이다. 유학생 몇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미국교회를 빌려 성경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기도를 하면 계속하여 이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까가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든 생각이 한국교회의 젊은이들이 일년에 한번 수양회 잘하고 나면 그것에서 힘을 얻어 영발로 일년동안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처럼, 일년에 한번 유학생을 위한 좋은 축제를 열면 좋겠다는 생각이 기도하면서 찾아왔다. 당시 목회하던 교회안에 유학생 그룹이 있었는데 생각을 나누니 좋아했으며, 제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유학생 운동을 하려면 교파를 초월해야 하기에 우리 교회가 혼자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당시 인근에서 목회하던 이원상 목사님 등 몇명과 의논하니 다 좋아하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래서 코스타를 시작하게 되었다.

코스타를 통해 많은 분들을 만났다. 1회 코스타에서 신앙 따로 사회생활 따로라고 생각했는데, 코스타 집회를 통해 신앙으로 정치도 하고 신앙으로 교육도 한다는 도전을 받았던 분이 있었는데 나중에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 잊을수 없는 코스타 대회중 하나가 2004년 휘튼대학에서 열린 대회이다. 마지막 날 저녁에 선교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인생에 3년이상 선교사로 응답할 사람들 헌신하라고 콜링을 했는데 여러 사람이 나왔다. 집회가 끝났는데 두 친구가 안가고 계속 기도하고 있었다. 둘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얻고 기도했다. 그중 한 사람이 기도를 받다 말고 저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 교직에 들어가기 직전인데, 오늘밤 선교사로 헌신해 버렸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고 물었다. 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이 정말 부르셨다면 하나님이 형제의 걸음을 인도하실 것이며, 형제가 공부했던 모든 것이 무효화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선교사로서 콜링을 잘 열매맺게 해 주실 것이라고 했다. 몇달후에 "목사님, 제가 몽골로 갑니다"라는 편지가 왔는데, 이용규 형제였다.

이용규 형제가 몽골로 선교사로 갔다는 것 보다 중요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몽골에서 선교사로 머무는 동안에 그가 썼던 책 "내려놓음"과 "더 내려놓음"이 한국교회에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평신도 선교사의 통해서 나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온갖 문제들은 내려놓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작년에 이용규 형제가 한국에 나와 전화해서 만났다. 지난 7년동안 몽골에서 재미있게 사역했는데 이제는 해야 할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으며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하나님께서 새로운 콜링을 주시고 있다고 했다. 큐티하면서 쓴 일지를 보여주면서 책을 한권 쓸 것이라고 원고를 가져왔는데 제목을 보니 "떠남"이다. 이미 책이 나온 것으로 안다.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이 내려놓으라시면 내려놓고, 떠나라시면 떠나고 평신도 선교사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저와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를 향한 도전이다.

부끄러운 간증을 하겠다. 93년 한국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7년동안 목회를 했다.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는데 매년 1천명씩 등록했다. 7년이 지나니 출석이 1만명이 넘어서 주차문제등 온갖 문제들이 생겼다. 2천년을 맞이하면서 교회안에서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신선하게 해 보자고해서 각 나이대별로 2명씩 위원을 뽑았다. 자기들끼리 모여서 21세기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한국교회안에서 건강한 교회로 기여할 수 있는가를 연구했다. 매주 위원회는 모이지만, 저는 한달에 한번 참석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위원회를 구성하고 3개월쯤 지난즈음, 위원회 멤버들과 같이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매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이제 우리 교회에서 목사님이 못할 것이 없다. 이제는 모든 조건이 되었으니 마음대로 하시면 된다. 이제는 목사님 왕국이다." 나중에는 조크라고 변명했지만, 그 소리를 들으니 등골이 서늘해 졌다. 내가 목회를 잘못했구나, 교회가 숫자적으로 성장한 것을 나의 왕국이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구나 하는 충격때문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처럼 정신이 없었다.

그날부터 한달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고민을 했다. 숫자만 좀 많이 모였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무슨 목회인가,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고 나라는 사람만 내세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정말 우리 교회가 주님의 교회로서 드려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1달간 주님이 기도를 시키셔서 정말 아픈 기도를 했다. 그리고 두가지 중요한 결심을 했다.

당시로 부터 2-3년전에 있었던 일이다. 옥한흠 목사와 몇사람이 모였는데 제가 "한국에 나와 보니 한국에서는 왜 은퇴를 빨리하는지 모르겠다. 사회에서는 다들 일찍 은퇴하는데 목사만 70세에 은퇴한다면 한국사회에서 목사들이 가장 욕심이 많다고 오해를 받지 않겠는가"고 말했다. 옥한흠 목사님이 듣고 있으시다 "네가 내 앞에서 그 따위 소리를 하는가. 내 나이되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탓하셨다. 그러고 헤어졌는데 옥한흠 목사님이 한달쯤 지나 어느 날 새벽에 전화를 하셨다. 그리고 "네가 말한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네 말이 옳다. 나는 65세에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러자 놀란 저는 "형님, 지나가는 소리로 이야기한 것이다"라고 말하자 옥 목사님은 "아냐, 당신 말이 옳아. 나 65세에 그만둘거야. 잘 그만둘 수 있도록 당신이 기도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저도 "형님이 그러시면 저도 65세에 그만 두어야죠"라고 말하자, 옥 목사님은 "너는 아직 멀었는데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생각이 자꾸 났다. 우리 교회가 정말 주님의 교회로 돌아가려면 나라는 사람이 너무 영향력을 오래동안 가지는 것은 좋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65세에 목회를 그만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목사의 왕국이라고 말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무슨 권한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내가 얻을수 있는 어떤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 동안 기도하다가 두가지 결심을 했다. 먼저 65세에 목회를 내려놓아야 겠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이 나와야 겠다는 것이었다. 한국교회가 은퇴비 때문에 싸우고 하는데 그냥 나오자, 하나님이 나머지는 책임지시겠지 라는 확신이 왔다. 한 달후 주일예배에서 두가지 결심한 것들을 위원회와 의논도 하지 않고 발표해 버렸다. 그때만 해도 65세가 그렇게 빨리올지 몰랐다. (웃음) 64세가 되었을때 몇사람이 와서 정말 65세 그만 둘 것인가를 물었다. 그래서 결심을 재확인하자, 그때 65세에 은퇴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설득하기도 했다. 또한 "목사님이 그만두시고 설교없으면 우리 교회 큰일나요"라고 말하자, 저는 웃으면서 "설교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교회 문을 닫아야죠. 5년 더 설교할 수 있겠지만 말한 것을 약속지키는 것이 5년 설교 더 하는 것 보다 더 좋은 설교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대답하자 더 이상 아무소리를 안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은퇴비등 아무것도 도와줄 필요가 없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과 은퇴후에도 필그림하우스를 중심으로 한국교회를 돕는 사역을 하도록 도와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저는 그것때문에 너무 손해보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한평생 동안 붙들고 씨름해야 할 두가지 과제는 내가 내려놓을 것은 무엇인지 또 다시 주님앞에 구하고 채움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하는 것이다. 이것만 채워질 수 있다면 우리의 목회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반드시 채우실 것이고 지금도 그 채우심을 날마다 경험한다. 저와 동일한 채우심이 동역자 여러분들의 생애가운데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드린다.

(다음은 세미나의 핵심이기도 한 설교에 대한 2개의 강의가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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