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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환 총장 "WCC와 에큐매니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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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ㆍ 201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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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 동문회(회장 김지회 목사)는 6월 2일(월) 뉴욕새사람교회에서 김인환 목사(현 대신대학교 총장, 전 총신대학교 총장)를 초청하여 "칼빈주의의 현대 목회 적용"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세번째 소개하는 세미나 내용은 교회건물과 성전, WCC와 에큐매니시즘, 칼빈주의적 예배에 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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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하는 김인환 총장

김 총장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해서 안된다며, 교회 건물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고 언약의 백성들의 회집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설명했다. 또 WCC와 같은 종교다원주의라는 비성경적인 원칙과 비전을 가진 하나됨은 철저히 배격해야 하지만, 비록 신학적인 차이가 있어도 교회의 표지를 유지하는 교단/교회와는 교통과 교제를 지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칼빈주의적 예배에 대해 언급하며, 공동체적 공적 예배에 비해 소흘히 대하여지는 개인적 일상적 삶으로서의 사적 예배를 강조했다.

교회건물과 성전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교회당을 지어도 그것은 교회당일뿐이지 하나님의 성전은 아니다. 말을 조심하여 사용해야 한다. 교인들에게 성전이라는 말로 신비로운 감을 일으켜 헌금을 잘하게 만들지 몰라도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다. 그러니 이런 점을 미리 잘 가르켜야 한다. 예배를 잘드리고 교육을 잘시키고 성도들의 교제를 잘하기위해 건물이 필요하지 않은가. 이왕 건물을 지을바에는 음향시설을 잘 갖추고 우리 모두가 모이기 좋은 집을 짓자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성전이라는 개념으로 건축을 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많다. 절대로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당을 성전이란 말로 사용하지 말라. 절대로 교회 건물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집이다. 언약의 백성들의 회집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 계신다. 더이상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으신다.

구약에는 이미 천지창조때 하나님이 우주를 하나님의 집으로 성전으로 삼겠다는 사실을 공포하셨다. 그리고 창세기 3장 이후에 이루어지는 구속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집의 실체를 지금 만들어 가신다. 이스라엘 민족을 언약의 백성으로 정하시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성막을 만들었다. 성막은 텐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텐트 생활을 많이 해야 하니 그것에 걸맞게 하나님의 집도 상징적으로 텐트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성막이 세워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3개지파씩 텐트를 짓게함으로서 하나님이 그들의 중심에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은 실제로 하나님의 집이 아니다. 상징적이고 그림자적이고 모형적이다. 이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니 그 성막을 배로 확장해서 성전을 건축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윗과의 언약의 맺음을 통해 왕국도 세워지고 백성도 성립이 되고 하나님의 통치의 장소인 성전도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착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은 성전을 부수기 시작하신다. 어떻게 부수는가. 이스라엘 민족의 범죄를 탓하시고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하기 시작하신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파괴는 한편은 이스라엘 민족의 징벌의 표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래서 성전을 부수시고 참 성전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신인양성이시다.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 자체가 성전의 최종적인 모습이다. 하나님도 계시고 인간도 있다. 예수가 무엇인가. 제2의 아담으로서 모든 인류를 대표한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계시면서도 사람이 함께있는 바로 성전의 가장 완벽한 모습이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들을 새언약의 맺음을 통해 계속 불러가신다.

에베소서 2장에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민족을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을 시키고 하나님과도 화목을 시키고 그들을 통해 '한 새 사람'을 지었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한 새 사람을 에베소서 2:15에서는 교회를 사람으로 지칭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도 지칭한다. 그래서 결국 예수를 믿고 새롭게 중생된 새 사람이 성전을 짓는 재료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을 재료로 삼아 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집이 지어졌다.

하나밖에 안지었다. 하나만 딱 짓고 계속적으로 지어져 가게끔 만드신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못 박는다. 그러면서 그 교회는 가시적으로 하나님을 지켜야 하며 역동적으로 하나님을 표시해야 한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모든 것에 흔들임이 없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해 가면서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모든 기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에베소서 4장이다. 이렇게 보면 교회는 둘일수 없고 하나밖에 없다. 그런데 교단들이 많다. 합동과 통합측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것은 비신사적이고 비성경적이다.

WCC와 에큐매니시즘

개혁신학은 교회는 하나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각 교단과 그 교단에 속해 있는 교회는 한교회의 지교회이다. 그러므로 모든 지교회는 지역과 인종과 언어의 한계를 뛰어 넘어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며 시각적으로 하나됨을 유지하고 역동적으로 하나됨을 표현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WCC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되게 하는데 있지 않고 정치적으로 하나됨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소위 종교 다원주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 주신 유일한 구원의 방식, 그리스도 이 외에는 구원이 없다. 그런데 WCC는 그것을 스스로 창조를 해서 모든 종교도 하나님이 계시한 양식이고 그리스도 외에도 구원의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토인비가 이 문제를 제일 먼저 거론했다. 모든 종교는 일정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모든 종교는 하나로 계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인비에도 하나님이 있다. 토인비의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가 신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발전되고 탁월한 사랑을 이루는 종교가 기독교이기에 기독교로 모든 종교가 통합을 해야 역사에 미래가 있다고 강조를 했다.

이런 강조에 따라서 WCC가 하나님을 너무 좋게만 만들어 갔다. 그리고 교회를 성화시키기 위한 진짜 하나님의 모습을 없애고 말았다. 물론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다. 얼마나 좋으신가 하면 우리가 잘못했으면 매도 때리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런 부분을 다 없애버리고 너무 부드러운 하나님을 만들어 놓으니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 많다. 교회가 그런 WCC 체제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외에는 절대로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고백해야 한다.

교회표지가 있다. "하나님이 그의 영감으로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오류가 없는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고 선포하는 것과, 세례와 성만찬으로 구성된 성례를 행하는 것과, 교회의 순결과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권징을 행하는 것을 보일때 교회로 인정받게 된다. 이러한 교회는 하나 밖에 없다." 성경말씀에 대한 믿음, 성례, 권징 세가지가 있다.

WCC와 같은 종교다원주의라는 비성경적인 원칙과 비전을 가진 하나됨은 철저히 배격해야 하지만, 비록 신학적인 차이가 있고 목회적인 차이점이 있다 할지라도 교회의 표지를 유지하는 교단과 교회와는 교통과 교제를 지속하면서 함께 하나님의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에베소서 4:13)"도록 해야 한다.

개혁신학이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고 그 결과를 가장 잘 체계화하여 성도의 삶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 완전성은 예수님 재림 때 비로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들은 성경적인 에큐매니시즘의 원리와 방법에 따라 지교회들과 지속적인 교통과 교제를 통하여 상호보완하고 보충하고 서로 가르치며 섬기는 가운데 함께 교회의 인격과 능력을 발휘하여 교회의 권위를 유지하고 교회를 영광스럽게 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의 에이전트로서의 교회 본연의 사명 즉 하나님 나라 확장과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신학 교회는 개교회주의, 교파주의, 독단주의를 극복하고 모든 교회는 함께 연합하고 교제하는 자세를 갖도록 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교회치고 완전한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교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 문제가 있다. 그럴수록 강점도 있다. 그래서 저의 주장은 에베소서 4장의 말씀에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교회를 성숙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은사들을 주셨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일에 하나되는 것에 열심히 해야 하고 그래서 성숙해 가야 한다. 그래서 성경과 일치하는 신학을 세워야 한다.

교제하는 가운데, 성경과 일치하는 신학을 세우고 그 신학을 세울수록 협동을 해야 한다. 항상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학이 무엇이 문제가 되고 부족한지를 파악하고 내가 파악을 못하면 다른 사람의 도움과 지적도 받으면서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성경과 일치하는 신학을 세우고, 하나님을 아는 일과 믿는 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손에 손을 맞잡는 가운데 우리가 성도로서 성숙함을 이루어 내야 한다.

총신대학교 학생들에게 늘 강조했던 것은 합동측의 헛된 교만함을 없애라고 했다. 총신 출신들은 어디에 가든지 총신 총신한다. 하나님이 보시고 웃으실 이야기이다. 신학교를 나왔으면 그것 자체로 만족하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도 품에 안고 같이 손에 손을 맞잡고 성경 말씀에 따라 함께 자라가라.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총회도 합동 총회도 총신대학교도 문제가 굉장히 많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일에 하나되는 운동을 펼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스스로 교단의 울타리를 폐지해 나가야 한다. 교단의 높은 문턱을 낮추어 가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한 교회라는 인식을 심어가야 한다. 그러면서 그 교회들이 힘을 모아서 사탄의 힘을 분쇄해야 한다. 사탄의 추종자들을 해산시키고, 문화를 새롭게 창달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며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칼빈주의적 두가지 예배

우간다에 가서 보니, 예배시간에 어떤 사람은 땅을 치고 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찬송을 부르고, 어떤 사람은 설교를 듣고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그런데도 가만히 보니 진실함이 있었다. 저렇게 질서도 없고 난장판 같은 모습이지만, 저렇게 참 자신의 모든 인생을 토해내는 심정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와 한인교회에서 넥타이를 매고 질서정연하게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질서정연속에 질서만 있지 진지함이 없다. 다 다른 생각하고 앉아있다.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를 점검한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실까 반성을 많이 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많이 갈라져 있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대로 우리가 순종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일이 제대로 될까 생각이 깊어진다.

교회는 언약의 백성들의 회집으로 인식하면서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에이전트로서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성전으로서의 모습을 만들어 가야 한다.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정말 믿는가? 앞에 있는 내가 하나님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내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권위와 능력으로 있는 자리에서 난장판을 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눈에 안보이시니 난장판을 친다. 영적인 눈으로 볼때 하나님이 계신다. 내 안에 계시고 우리들의 모임에도 계신다. 그러니 항상 진지한 마음으로 격려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정말 춤추고 뛰면서 참 진짜 예배드리는 분위기로 만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서 온갖 고통당하고 힘들다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과 교제를 통해 마음이 녹아지고 눈물이 씻어지고 마음의 평안이 생기고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다음에 사탄을 때려부수겠다는 의지도 가지고 이렇게 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참예배이다. 교회는 그렇게 이끌어 가야 한다.

칼빈주의는 성도와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임을 주장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행위로 이해한다. 이러한 에배의 본질과 그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 칼빈주의는 성경의 특정한 시대와 그 방법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반영한다. 칼빈주의 예배는 살아계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임재앞에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의 주도하에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통하여 (개인적 일상적 삶으로서의 사적 예배), 공동체적으로는 성경이 지정한 일정한 예배의 요소를 반영하여 각자의 일상적인 삶의 열매를 언약의 주 하나님께 봉헌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함께 하나님이 각 자와 공동체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공동체적 공적 예배) 이러한 예배는 형식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구약의 그림자적이면서도 의식적인 예배를 완성하시고 성취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형식이나 예배의 매개체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칼빈주의 교회임을 자처하는 장로교단의 예배에 있어서 삶으로서의 예배는 거의 강조되지 못한 채 성도들의 일상생활과 직업적 생활은 세상속에서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불신자들의 생활과 차별이 없는 삶을 살게하고 있다. 그리고 공적인 예배만 강조하면서, 그 공적인 예배마저도 지나치게 형식화되어 생명력과 감동이 결여된 의식적 예배가 되게하고, 일종의 관습적 제도로 정착시키거나 아니면 이를 극복한답시고 새로운 예배 스타일을 도입하면서 기존의 모든 권위의 체계를 부정하고 극단적인 자기중심적이면서도 해체주의와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에 영향을 입은 나머지 현대적 문화와 그 표현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종의 이벤트화된 예배를 창출한다. 이러한 예배는 진정한 칼빈주의 예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들은 칼빈주의적 예배를 목회현장에 적용하여 이러한 잘못된 예배를 바로잡아야 한다. 목회를 통해 성도들의 믿음과 일상생활 및 직업생활을 일치시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생활과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일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로서의 예배이며 영적인 예배임을 주지시키고(로마서 12:1-2), 그것을 실행하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이를 통해 성도들의 모든 삶의 영역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아름답게 실현되어 갈것이다. 이들은 아름다운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이룩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결국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어 갈것이다. 이러한 삶의 열매들이 매주일 드리는 공적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봉헌되어 지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수단이 되어질 때 그 예배는 영성과 경건과 즐거움이 넘치는 예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성도들의 일상생활과 직업생활을 위한 큰 활력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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