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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 목사 "홍수때 마실 물이 없는 오늘날 교회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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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3-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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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늘기쁜교회(김홍석 목사)는 1월 23일(수)부터 3일간 제직세미나를 열었다. 첫 날은 담임목사인 김홍석 목사가 말씀을 인도했으며, 둘째날과 셋째날은 각각 1.5세인 이승한 목사(뉴잉글랜드 은혜장로교회)와 노진산 목사(믿음으로사는교회)가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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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 목사(뉴잉글랜드 은혜장로교회)

둘째날 이승한 목사는 베드로전서 2장 1-9절을 본문으로 "거룩한 직분"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제직자들을 대상으로 세미나같이 진행된 말씀은 교회에서 제직으로 잠 섬기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내가 교회이다. 내가 거룩한 직분자이다. 내가 거룩한 제사장이다. 내가 성직자이다. 그리고 내가 믿음으로 하는 모든 것이 사역임을 깨닫아라. 오늘저녁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떠나라. 여러분들의 사역지로 떠나라. 여러분들의 성직으로 떠나라. 엄마는 엄마의 성직으로 아버지는 아버지의 성직으로, 사업하는 분은 사업의 성직으로 따나라. 성직자로 일을 하라."

다음은 세미나 내용이다.

허리케인 샌디때문에 고생이 많았을것이다. 홍수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홍수는 물이 범람하는 것인데도 홍수때 마실 물이 없다. 신기하지 않는가. 어쩌면 그것이 현재 우리교회의 상황이다. 교회라는 곳은 많다. 그런데 과연 생수가 있는 곳이 얼마나 되는가를 조심스럽게 자문해 본다. 여기는 있다 저기는 없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전체적인 차원속에서 과연 이 시대에 생수를 마시고 있는지 생수를 주고 있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대상에 서면 잘못 오해되는 점은 자아비판적인 설교를 하게 된다. 제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크리스찬이 이렇게 하면 되겠는가 아니면 교회가 이러면 되겠는가 하는 자아비판적인 내용을 말하면 하면 마치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이 남을 비방한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제가 눈을 치우다가 손가락 끝이 짤라져 나간적이 있는데 그때 경험한것은 손가락 끝이 짤라져 나갈때 손가락만 아픈것이 아니라 온몸이 아프다. 거룩한 직분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들과 대화를 하면서 말씀을 전할때 교회에 대해 우리 자신에 대해 자아비판적인 톤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절대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손가락질이 있다고 느낀다면 내 자신에 대한 책망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들었으면 한다.

우리가 거룩한 직분자로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지 고민할때, 저는 무엇보다 우리들의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교회라는 것은 이런저런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것은 우리가 건강하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으니 주님이 복음이 필요하다. 예전에 필요한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매순간마다 필요한것이다.

여러분이 사는 동안 주님이 강림하실때까지 복음이 필요로 하는 자가 되라. 항상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보혈로 피뭍은 십자가를 사모하는 여러분이 되라. 건강한 교회는 우리가 이렇게 하니 건강하게되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건강하지 않는 모습이 항상 있기에 우리 자신에게 복음을 증거해야 하고 매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오늘 설교제목이 특별히 거룩한 직분이라고 하지만 3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고 한다. 거룩한 교회, 거룩한 성직(직분), 거룩한 사역으로 나누어 생각을 해보자.

여러분은 누구인가

여러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것인가. 저는 1.5세라고 소개했는데 어쩌면 전형적인 1.5세이다. 75년 중학교 2년을 마치고 부모에 의해 강제로 미국이민을 당한 전형적인 1.5세가 맞는데, 20-30년동안 나는 그런 정체성에 대해 방황하거나 부인하고 살았다. 하지만 50세가 넘으며 자신에 대해 편해지는 시기가 왔다. 사실 미국에 와서 50세가 되기전에는 자신에 대해 불편했다. 누가 1.5세라고 소개하면 짜증이 났다. 왜냐하면 제 마음속에는 1세라는 생각이 깊었다. 1세인데 영어잘하는 1세라고 스스로 소개하기도 했다. 성도들과 대화를 하면 크리스찬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이 영적인 1.5세인데, 1세도 2세도 아닌 영적인 1.5세로서 순례자인데, 그 사실에 대해 많은 분들이 모르는 것을 본다. 여러분은 누구인가. 여러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여러가지 각도에서 대답할것이다.

좋은 영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니콜라스 스파크스가 쓴 '노트북'이라는 책이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를 강추한다. 노트북이라는 영화는 붉은 놀이 물든 강가를 따라서 노를 저어가는 누군가의 모습이 지나가면서 노인병원에서 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자 할아버지와 책의 내용을 유심히 듣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어서 본인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이런 기억을 잃은 환자에게 자원봉사자가 노트북에 기록된 흥미진진한 사랑이야기를 해준다. 슬픈 이룰수 없는 사랑이야기이다. 남자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여자의 부모가 만남을 반대하고, 2차대전으로 사랑을 이루어지 못했다. 둘이 처음 만나던 날, 남자가 여자에게 내가 너를 위해 저 집을 고쳐줄께라는 약속을 한다. 터무니 없는 약속같은 그곳에서 영화가 진전이 되면서 만나게 되고 그 쓰러져 가던 집이 남자의 수고로 번듯하게 세워진다. 그 남자는 헤어진 첫사랑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매일 기다리는 삶을 살았다.

사실은 노트북의 여자 주인공이 치매로 기억을 상실한 할머니였다. 책을 읽어주는 자원봉사자는 남자 주인공으로 할머니와 결혼한 남편이었다. 남편이 본인들의 사랑이야기를 노트북에 적어서 아내에게 이야기 해주는데, 그 사랑의 대상자인 아내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재미있게도 노트북을 끝까지 읽은 다음에 책을 덮으면 할머니는 그때 잠깐 제정신이 들어온다. 그리고 앞에 있는 남자가 남편임을 기억하고 오래만이라고 인사한다. 잠깐이지만 여자가 잃어버린 기억을 회복하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포옹하고 키스하면서 사랑을 하지만, 갑자기 할머니가 소리를 지른다. 기억을 다시 잃어버리고 외간남자가 나를 잡고있다고 간호원을 부르고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무너진다.

그 영화를 보면서 저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이 노트북처럼 우리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읽혀지는데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이 느껴지지 않는다. 힘들면 힘들다고 불평하고, 어려우면 어렵다고 불평하고, 시험에 들면 시험에 든다고 불평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실때 우리는 십자가가 싫다고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명을 주시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실때 바쁘다며 변명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는 어쩌면 영적 치매에 걸린자가 우리들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우리는 어떤가. 어쩌면 이런 내용은 너무 부정적인 내용이 되는지 모르겠다. 본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본인을 사랑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거나 그 사실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비극은 없는데, 우리가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누구인지, 얼마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축복된 사람인가를 제대로 아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한다.

여러분은 교회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함이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 특별히 '거룩한 직분'이라는 타이틀 아래에 전하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거룩한 공동체임을 먼저 기억하라. 여러분은 교회이다. 제가 사역하면서 항상 성도들에게 격려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는 말에 뜻을 담아서 말해야 하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 교인들에게 고치자고 하는 것은 성도님들에게 제발 교회에 오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교회에 온다는 것은 왔다가 떠나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여러분은 주일에 교회를 오는가.

저는 성도들에게 제발 교회 좀 오지말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교회에 오는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교회인데 교회가 예배드리러 모이는 것이고, 성경을 배우기 위해 모이는 것이다. 모이기 위해 재정적인 이유 또는 모이는데 효과적인 이유때문에 건물을 구입하지만 건물이 없다고 교회가 아닌것이 아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우리가 교회이다. 그렇기에 주일에는 교회가 이곳에 모여서 교회가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교회가자고 말하면 안된다. 교회가 가자라고 말해야 한다. 교회이니 예배드리러 교제하러 봉사하러 공부하러 가는 것이다. 교회이니 여러분들이 오는 것이지 여러분이 교회로 온 것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정체성에 있어, 많은 분들이 우리가 교회라는 사실을 잃어버리고 산다. 그렇게 살다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을 잃어버린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우리의 정체는 교회인데, 성경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한다. 23절을 자세히 보면 교회가 그의 몸이라는 사실은 아는 내용이다.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고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니 하나님이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쉽게 받아들일수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 있다고 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함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충만함이신 것은 알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더욱 감사할수 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은 교회, 여러분을 하나님의 충만함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충만함이시다. 감사하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만족이시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충만함이시다. 할렐루야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무슨 이유인지 우리를 보고 "너는 나의 충만함이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때 하나님의 충만함이라고 하시지만, 안타깝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교회라고 하면 사람들은 너무나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밖에 나가서 교인이라고 말하면서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우리가 정체성을 잃어서 그렇다. 세상이 자꾸만 교회가 이렇다고 정의를 내리는 것에 귀를 기울이니, 내가 교회라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귀를 기울이기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충만함이라고 말씀하신다.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을 해보면 알겠지만 사랑의 대상이 나와 함께 있을때는 밥을 안먹어도 배가 부르지만, 이별하면 아무리 먹어도 공허하다. 충만하지 않다. 스트레스를 받을때 저같은 경우는 몸에 좋은 것 보다는 지방이 많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스트레스를 받을때면 무엇인가 모르게 저는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이런일이 일어났다는 두려움이나 의심이 든다. 제 삶에 어떠한 사랑이 결핍될때 무엇을 먹는 나를 발견한다. 아이스크림 한통은 앉은자리에서 다 먹는다.

여러분은 어떤가. 여러분은 지금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 마음속에 만약에 어떤 공허감이 존재한다면 지금 속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세상에 너무 귀를 기울여 성경에서 말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충만이라는 사실을 잠깐 잃어버린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충만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교회이다. 세상이 말하는 아니면 사탄이 말하는 비판의 대상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 교회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사랑을 잊지마라. 세상에서 우리가 순례자로 살아가는 동안 노트북 사랑스토리는 십자가의 사랑스토리로서 매일 매순간 마다 하나님의 사랑스토리로 다가온다. 여러분이 교회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충만함이고 사랑임을 꼭 기억하라.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정체성의 혼돈이 1.5세인 저에게 한동안 오래갔다. 그러니 사랑받는데 익숙하지 못했다. 제가 깨닫은 것은 미국시민으로서 한국을 모국으로 둔 사람이지만 천국시민, 즉 교회라는 정체성이 마음속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이민자의 삶을 살면서 힘든 여러가지 일들이 정돈이 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다보니 놀랍게도 미국도 더 사랑하게 되고 한국도 더 사랑하게 됨을 체험하기 시작됐다. 천국시민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면서 1.5세라는 사실도 받아들여졌고, 1.5세이면서 한국을 더 사랑하기 시작했다.

물론 조선을 사랑해서 조선을 위해 평생 복음을 전한 선교사만큼 한국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서울 마포구에 양화진 언덕이 있는데 외국인 선교사들의 무덤이다. 그곳에 있는 묘비를 살펴보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들은 본인들의 정체가 교회라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했고, 하나님의 충만함임을 깨닫아 아낌없이 그들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의해 바칠수 있었다.

몇분의 묘비를 소개하면 아펜젤라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했다. 본인들의 정체성이 복음안에서 확실한 사람만이 거룩한 직분자로서 섬길수 있다. 내가 교회라는 사실이, 내가 하나님의 충만함이라는 사실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깨닫아지는 사람이야 말로 제대로 섬길수 있다. 언더우드 묘비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했다. 테일러 선교사는 한국땅에 묻히면서 "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나는 이제 안식을 얻었습니다"고 했다. 더 놀라운것은 헐버트 선교사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 보다는, 한국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했다. 캔드릭 선교사는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친다"고 했다.

본인들의 정체성이 뚜렷한 사람은 무엇을 해야할지 뚜렷한 목적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전에 내가 하나님의 충만함이다, 내가 교회이구나, 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임을 깨닫아야 한다. 그것이 결핍되면 섬김을 해도 까칠하고 100% 섬김을 하지 못한다. 이해구조속에서 이렇게 하면 무엇을 받을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충만함이라는 사실을 깨닫으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직분자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얼마만큼 내려가야 할지 내려가도 내려가도 낮아진다는 생각이 없다.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입은 사람으로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알기때문이다.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이라는 책의 주인공 서서평 선교사의 삶을 보자. 서서평(1880-1934)은 본명이 엘리제 셰핑이고 독일계 1.5세이다. 1912년 셰핑이 32살때 미국남장로교 간호선교사로 조선에 파송을 받았다. 1912년이면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지 얼마되지 않아 조선으로서는 힘든 시기였다. 셰핑이 조선에 들어와 광주 제중병원에 자리를 잡는다. 나병환자 수용소를 찾고, 목양목 저고리와 검정 치마에 남자용 검정 고무신을 신고 항상 고아를 등에 업고 다녀 지역에 유명한 미국 선교사로 알려졌다. 인신매매 반대, 금주금연 운동, 윤락여성 선도사업등 많은 일을 했다.

잠시 안식년을 가지고 미국에 왔다 다시 조선에 돌아가는 이분의 일기속에 놀라운 부분이 있다. 조선을 그렇게 섬기고 많은 일을 했는데 일기장에 회개하는 내용을 적었다. "나는 지금까지 조선을 도와준것을 회개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조선을 도와준것을 후회가 아니라 회개한다고 한 이유는 그분이 생각할때 조선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있는 동안은 자기는 조선인보다 항상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제 돌아가면 조선인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이 되겠다고 일기장에 기록했다. 여러분은 어떤가.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인것이다. 서서평 선교사 같이 남을 도와주는 것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올라가는 것을 회개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은 자기의 정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지 않고는 생길수 없는 것이다. 제가 생각하기는 현대 교회의 문제는 우리는 스스로 너무 자신에 대해 우쭐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예배하지 않는가. 예배를 드리면서 멋있게 예배를 드리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지 않는가. 우리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하는데 그 회개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는가.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예배를 하는 자신을 예배하고, 회개를 하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한다. 내 경험도 그렇다.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모습을 예배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회개를 하면서 대견해 하는 치졸한 인간이 되지 않기를 축원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보면서 너는 나의 충만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표현은 미래의 표현이 아니다. 오늘 여러분이 작은 성화함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보시면서 만족하신다. 지금 이 상태 현재의 모습이 하나님께는 충만하심을 기억하라. 솔직히 지난 하루의 삶이 100% 거룩하지 않고 의롭지 않고 순결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나를 보실때 어떻게 '너는 나의 충만함'이라고 말씀하실수 있는가. 불가능하지만 십자가로는 가능하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정말 우리의 죄를 100% 감당하셨다면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과거 현재 미래의 우리의 죄를 다 감당하셨다면 우리의 부족한 면이 있는 것을 인정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된 사람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지 않을지라도, 열심히 살지 않을지라도, 더 내놓지 않을지라고 복음안에서 십자가안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실때 너는 나의 충만이라고 하는 것이 억지가 아니라 사실이다. 그 사실이 쉬운 것 같은데 어렵다. 그 사실이 아는 것 같은데, 많은 분들이 마치 내가 큐티를 좀 더 하면 하나님이 좀 더 나를 사랑해주실 것 같고, 아침에 길이 막히면 큐티를 안해서 그런것 같다고 생각하는 행위적인 조건적인 종교적인 사랑으로 타락시키는 것을 발견한다.

여러분들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창조 작품중의 걸작품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기에 가장 아름답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거룩하다. 본문을 보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증거하는 생명의 언약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된다. 이 죽어가는 세상의 부활을 증거하는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 교회이다.

에베소서 1장 23절(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을 다시 읽는다. 아무것도 부족한것이 없으신 하나님이 여러분이 없으면 마치 무엇인가 부족한것처럼 여기시겠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충만이다. 여러분들이 더 성화되고 더 거룩해지고 더 희생하고 더 순결해지는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이 시간에 누구든지 주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충만함이 여러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해도 부유하여 다른것이 부럽지 않다. 죽어도 한이 없다. 피곤해도 힘들지 않고, 희생해도 기쁘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뚜렷해지면서 비교할수 없는 만족감에 빠진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때 충만함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생명을 다 바쳐 죽어도 아깝지 않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보혈을 흘리셨는데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지 못하겠는가. 여러분은 교회이다. 그러니 이번주에 교회오지 말고 교회가 이곳에 와야 한다. 교회가 이곳에 와서 교회가 하는 것이 예배이다. 여러분이 교회가면 매주 떠나는 불상사가 생긴다. 여러분이 바로 교회이다.

거룩한 성직

우리가 교회이고 거룩한 직분이라는데, 거룩함에 대해서도 우리가 온전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교회라는 사실이 깨닫아지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것이 무엇인지 깨닫아진다. 다시 말하면 본질적인 것이 깨닫아져야 한다. 교회에는 없으면 불편하지만 본질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 있다. 즉 교회에 좋은 찬양사역자가 없으면 약간 아쉬울수는 있지만 교회는 교회이다. 건물이 없으면 모이기 불편한 교회가 될지 몰라도 건물이 없어도 좋은 교회가 될수 있다. 교회의 부대시설이나 교역자가 부족하면 불편하겠지만 본질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교회의 본질은 거룩함이다. 우리가 거룩하지 않으면 더이상 교회가 아니다. 거룩함의 중요성은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본인에게 적용하신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라고 불리어 진다. 하나님을 우리가 호칭할때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다른 어떠한 형용사보다 더 많이 사용된다. 하나님의 그 전지전능하심을 생각해보라. 그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것에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다고 가정해보라. 두려운 것이다.

핵무기가 어느 나라가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세계가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한다. 핵무기는 파워풀하여 모든것을 파괴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핵무기가 거룩하게 사용안되고 악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끔찍하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거룩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거룩한 긍휼하심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거룩한 지혜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다른 어떤 하나님의 성품보다 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어느 노 목회자의 설교문중에 읽은것을 나누고 싶다.

기독교는 값싼 은혜가 파는 종교가 아니다.
만사형통을 빌어주는 종교도 아니다.
그럴듯한 선으로 포장해주는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자기의 부끄러운 수치와 절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종교이다.
자신의 저주스러운 모습을 하나님께 진솔하게 고백하는 종교이다.
그 고백을 나누자면
다윗은 내 속에 정한곳이 한곳도 없다고 고백했고,
사도 바울은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했고,
어거스틴은 나는 망할 자라고 고백했고,
성프렌시스는 작은 벌레만도 못하다고 고백했고,
루터는 버림받아 마땅한 죄인이라고 고백했고,
길선주 목사는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라고 고백했고,
김치선 목사는 매일 새벽제단에 당신의 죄를 고백하며 우셨고,
한경직 목사는 나는 신사참배한 죄인이라고 고백했고,
박윤선 목사는 나는 86년간 묵은 죄인이라고 고백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이 되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 거룩해서 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긍휼함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교회는 처절한 죄의 고백과 탄식과는 거리가 먼곳에서 있는지 모른다. 자기자신을 미워하며 한탄하는 욥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곳에서 우리들이 직분자가 되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예배하는 우리모습을 예배하는 자, 회개하는 우리의 모습에 경탄하는 자, 어쩌면 우리는 자신들의 희생에 따라 이만큼 희생하고 봉사하고 섬기면 되지 않는가 라고 너무 스스로 의인이 되어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잘못만 크게보는 너무나 밝은 눈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죄를 파헤치고 미워하고 분노하는 이상한 가슴을 지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거룩한 직분자로서 부르심이 있는데, 메마른 우리의 마음에 사도 바울이 가슴이 지녔던 처절한 죄의 고백과 탄식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축원한다. 이러한 죄인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충만함이라고 칭하신다. 용서받을수 없는 죄인인데 하나님은 나를 당신이 내가 없으면 못살겠으며 공허하다고 말씀하신다. 갈라디아사 2장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고백했다. 오늘 우리가 죄인인것을 고백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거룩한 행위가 임하기를 축원한다.

거룩한 직분자로 부르심을 받았는데도, 어떤 교회를 보면 목사들을 성직자라고 표현하는 교회가 있다. 개인적으로 그것도 고쳐져야 하는 언어의 부족함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를 성직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안타까운 현대교회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목사가 성직자가 되면 목사가 아닌 사람은 거룩하지 않는 직분을 가져야 하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충만함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스스로 거룩하시기에 여러분을 거룩함으로 부르신다. 거룩함의 초대속에서 무엇이 성직인줄 아는가. 베드로전서 2장 1-9절을 보면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거룩하신 부르심을 입은자들은 그 부르심 자체가 거룩한것이다. 영어로는 직장이라는 것을 'job' 이라는 표현보다는 'vocation' 이라는 표현을 쓴다. 노래하는 분들은 보컬(vocal) 섹션이라고 한다. 보컬(vocal)은 'vocation'과 동일한 단어에서 나왔는데 부르심이라는 단어이다. 'vocation'은 어떠한 직분으로서의 초대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이 교회이기에 여러분이 어떤 건물에 들어오면서 직분을 가지는 것이 성직이 아니라, 여러분이 교회이기에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여러분이 거룩하지 않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거룩하지 않은 백성을 위하여 거룩하신 분이 대신 죽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거룩하신 부르심에 응답하기 시작하면, 내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깨닫아진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이 하는 것이 성직이다.

주일에 와서 교회라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기독교 종교에서 하는 일들이 거룩한 일들인데, 어떤 분들은 대표기도할때 더러운 세상에서 죄많이 짓고 살다가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됨을 감사하다고 한다. 내용이 좋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예배드리고 다시 죄를 지으러 나갈테니 간섭하지 말라는 통보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또 다음주에 오면 지난 6일간 죄많은 세상에서 살다가 1시간 잠깐 예배당에서 거룩한 하나님과 대화하고 회개하지만 또 세상에 갈것이라고 기도하는데 익숙해지지 않았는가.

성직에 대해 우리가 정말 건강한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를 거룩한 나라요 족속이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이다. 그중에 저같은 사람은 기능적인 면에서 목사라는 부르심으로 제가 말씀을 보고 선교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공동체가 계속하여 건강한 모습으로 말씀과 성례의 하나님의 양식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성장할수 있도록 그러한 부르심이 현재로서 저에게는 목사로서 교역자로서 부르심이 있다. 그것이 현재 저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목사로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 보스톤에서 사역할때 학생중 은혜를 받았다고 신학교에 가기위한 추천서를 써달라고 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런 학생들에게 신학교 가지말라고 많이 말렸다. 왠만한 경우에는 추천서를 안써주었다. 어떤 경우는 3년동안 세상에 나가 직장을 가져보라고 한다. 세상밖에 나가서 돈을 버는것이 얼마나 힘든지 경험해보라고 한다. 세상직분에 대해 경험을 해보아야 하며, 대학교 갓나오고 바로 신학교가면 개인적으로 안좋게 생각한다. 신학교에 가기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3년후에 다시 와서 추천서를 써달라고 하면 써준다고 약속한 학생들이 있다. 다시 안오는 학생도 있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부르심이 있어서 3-5년만에 다시와서 신학교 간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러분이 교회인데 그렇다면 교회가 하는 그 교회의 부르심이 거룩함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하는 일이 거룩한 일이어야 한다. 거룩한 일은 종교의 일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젖을 먹이는 엄마는 젖을 먹이는 일이 예수를 믿는 거룩함의 부르심을 입는 사람으로 젖을 먹이는 것이 성직이다. 거룩하심의 부르심에 하나님이 그 여인을 엄마로 부르신것이다. 엄마로 부르심을 입는 그 여인이 하는 일 자체가 거룩한 백성으로서 거룩한 제사장으로 하는 일이기에 교회가 하는 일이기에 그 일이 거룩해지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바로 알아보았던 것이 악령들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을 아는것이 중요하다. 마귀가 하나님을 아는것은 거룩한 지혜가 될수 없는것이다. 마치 핵무기가 어떤 나라에 이용되면 아주 힘들어지는 것 처럼, 거룩함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아니 그것이 거룩한 것이 된다. 여러분은 선데이만 거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해지고자 하는 것이 어떠한 기독교 종교적인 틀에 박힌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고 내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를 따라가는 제자도의 삶을 사는데, 제자도의 삶을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주부로서, 어떤 사람에게는 노동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사람에게는 직장인으로서,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직장도 없는 사람으로 하나님은 부르신다는 것이다.

3명의 사람이 돌을 다듬는다. 무엇을 하느냐 물으니 첫번째 사람은 돈을 벌기위해서 한다고 한다. 두번째 사람은 아이들을 먹여살릴려고 한다고 한다. 세번째 사람은 저 건물이 하나님의 교회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장소인데 저는 이 돌을 다듬어서 하나님에게 영광돌리자고 한다면 똑같이 돌을 다듬는 일을 해도 누가하느냐 무슨 목적을 가지고 하느냐에 따라 성직이 될수도 있고 아니면 세상직을 될수도 있다. 목사도 돈을 받으려고 목회한다면 삵꾼이고, 다루기 힘든 까칠하고 힘든 성도들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목회한다면 성직자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 그 부르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로서 응답하면 여러분들이 무엇을 하든지 여러분은 성직자이다. 거룩한 제사장들이 이 건물에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후 교회를 떠나는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 건물을 떠남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교회가 떠남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부르심을 입고 어떤 사람은 학생으로 성직을 산다. 부르심이 학생이면 학생이 성직이다. 부르심이 그로서리이면 그 일 자체가 성직이다. 믿는가. 종교적인 행위에만 달란트가 사용되어야 거룩하다고 보는 것이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을 해야 한다.

보스톤에 사역할때 한 청년이 있었다. 산상수련회에 가는데 이 청년이 안절부절했다. 평소에 담배를 피웠는데 신앙생활 잘해보려고 수련회에 오면서 담배를 안가지고 왔다. 하루 안피는데 미치겠다고 했다. 제가 수양회와서 담배피워도 된다고 하자, 정말이냐고 반문한다. 몸에 안좋아서 그렇지 나는 개인적으로 담배를 피울수 있다고 생각한다. 담배피는 것 자체가 죄라고 이야기하면, 우리는 우리의 성전이기에 어떻게 매연을 넣는가 라는 논리가 성립이 된다. 저는 담배피는 것이 죄라고 정죄를 하면, 운동을 안하는 것도 죄이다. 운동을 안하면 몸에 불순물이 낀다. 뚱뚱해 지는 것도 죄가 된다. 그렇게 정죄하면 끝이 없다. 그 청년에게 안정시키기 위해 담배를 피고 안피고 하는 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의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몸부림 치는것이 인간인 목사에게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하나님은 얼마나 너를 기뻐받으시겠는가 라고 격려했다.

이 청년은 나중에 나를 찾아와 고민을 나누었다. 청년은 불란스 최고급 식당 요리사인데 식당에 나가면 다 안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교회에 오는 것이 너무 좋다는것이다. 주일에 예배드리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행복해 하지만, 다시 6일간 더러운 세상에서 살다 오려고 하니 너무 힘들다고 한다. 이 친구는 아직도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더러운 세상에 나가서 그나마 덜 죄를 짓고 담배 좀 덜피고 돈을 벌어 십일조를 교회에 내, 더러운 돈이 교회에 옴으로 깨끗하게 되어 어떠한 기독교 종교의 목적으로 사용되면 성화된다는 그 정도의 신앙수준이었다.

내가 말했다. 너 같이 요리잘하는 청년을 만나지 못했다. 가끔 청년이 만든 음식을 먹어보면 나는 이세상에 있지만 더 놀라운 음식맛에 천국에 대한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맛보기에 너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청년은 무슨 말이냐고 질문했다. 나는 네가 요리하는 것은 세상적인 직업이고 나는 목사이기에 거룩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너는 부르심이 있는 사람이고 거룩한 제사장이다. 나는 라면을 끓이려다 물을 태워먹은 사람이다. 요리다운 요리를 못한다. 하지만 네가 요리한 음식을 먹으면서 보통때 못느끼는 감미를 느끼면서 잠시나마 이세상에서 천국을 생각하는 모습을 본다. 그래서 너는 요리사로서 자부심을 가지라고 말해주었다.

너는 나같은 부르심이 없고 요리사로 부르심이 있는데, 그 맡은 분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가장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여 가장 맛있고 건강하게 음식을 만들어, 먹는 사람이 가장 기쁘게 먹으면서 건강해지고 그들이 잠시나마 힘든 세상을 잊고 약간 승화되면서 천국에 가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수 있겠구나 라는 잠깐 천국에 대해 꿈꾸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전도라고 생각한다.

이 청년이 종교와 평상시의 삶을 이분화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청년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중심,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기를 바란다. 이분화된 교회라는 공동체에 들어오면 거룩한 종교적인 행위에 다른 사람이 하는것에 나도 익숙해져서 연기하는 삶을 사다가 세상나가 사기치고 그래서 세상사람이 교회의 누구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당신을 보니 당신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니 나는 성경과 예수를 모르지만 당신의 신실한 삶을 보면서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고 싶다는 고백이 우리주변에서 나와야 한다. 문제는 그런것이 너무 결핍되어 있다.

혼자서 감당못하는 큰 숙제에 대해 너무 괴롭다. 교인들에게 여러분들은 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제발. 예배가 끝나고 지난주에 안나온 성도에게 인사차 지난주 못뵈었다고 인사하면 죄송하다고 하는데 화가난다. 왜 나에게 죄송하다고 하는가. 내 교회인가. 집사님이 교회인데. 그냥 인사한것인데 왜 미안한다는 말을 하는가. 당회에서도 장로님들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물으면, 예전에는 목사님을 잘 도와서 보필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도우려고 장로로 있는것이 아니다. 저는 장로교 목사이다. 당회에서 나도 장로이다. 당회는 장로들의 모임이다. 나도 목사라는 성직의 직분이 아니라 장로로서 동일하게 공동체를 위해 섬기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여러분을 도우려고 이 공동체로 온것이지 어떻게 여러분이 저를 도우려고 왔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들이 교회인데 여러분들이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목사는 여러분들을 섬기고 돕는 사람이다. 여러분들이 목사를 돕는것이 아니라 목사가 여러분을 돕는 사람이다. 주객이 바뀌면 책임이 전가된다. 우리는 다 거룩한 제사장이고 다 직분자로서 우리가 각각 받은 달란트가 다른 모습으로 있다. 그 다른 모습의 달란트를 가정이나 직장이나 언약의 공동체에서 알맞게 사용하도록 우리는 부르심이 있는것이다.

거룩한 사역

2년전에 한국에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7명의 가수들이 한주에 3-5분 노래를 부르기위해 일주일내내 혼신을 다해 준비하고 열창을한다. 나가수는 가수가 되기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가수들이 나온다. 그렇게 진액을 쏫는것은 벌써 가수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이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 없는 이유는 교회라는 정체성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본인이 거룩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거룩해지려고 한다. 아이들이 밖에서 노는데 진흙탕에서 범벅이 되어 노는 아이들은 흙이 더 뭍어도 별로 상관을 안한다. 이왕 더러운 몸이다. 하지만 하얀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자아이는 조금만 먼지가 뭍어도 톡톡 튼다.

좀 더 확대해서 이야기하면 장례식을 인도할때 안믿는 사람들이 나에게 종종 질문하는 것이 있다. 기독교는 부활과 영생을 가르치는데 사람이 죽으면 나중에 만날텐데 왜 그렇게 우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크리스찬은 장례식에서 울면 안된다고 말씀하는 분도 있는데, 저는 천만에 말씀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장례식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펑펑울어야 한다. 죽음에 져서가 아니라 영생을 맛본 사람들이야 말로 죽음의 그림자가 조금만 스쳐가도 아픈것이다. 음악을 모르는 아이들은 피아노를 아무렇게 쳐도 즐겁지만, 음악을 아는 사람은 조금만 음율이 틀려도 귀에 거슬린다. 물론 그분과 나는 영생을 가졌기에 우리는 영원한 사별이 아니라 천국에서 만날것이다. 하지만 영생을 맛 본 사람이야 말로 죽음의 그림자가 조금만이라도 우리를 지나가도 아픈것이다. 그러니 장례식에서 기독교인들이 눈물이 나오는것이 당연하다.

나가수 가수들이 진액이 쏫으면서 열창을 하는 이유는 본인이 가수이기에 그런 것 처럼,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거룩함이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노력이 아니라 기독교 종교적인 어떤 순종이나 희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완성하고 그리고 주님이 믿음으로 나에게 부여하신 은혜의 방편이라는 사실을 깨닫아서 나는 믿음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사람이라고 깨닫는 사람만이 이순간 거룩하게 살고자 온힘을 다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교회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다. 세상은 교회를 비판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충만하시다는데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보아야 하는가. 교회의 어떤 특정인물만이 거룩한 직분에 부르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믿음으로 받은자라면, 우리가 그 거룩함을 받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직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직자들이 교회라는 언약의 공동체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감당하기 위해, 더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하기 위해 우리가 가진 달란트를 서로 나누고 격려하기 위해 제직이라는 교회의 집사 장로 사역자라는 호칭적인 것을 기능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위도 아래도 없는 것이다. 오직 교회에는 십자가만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내가 교회이다. 내가 거룩한 직분자이다. 내가 거룩한 제사장이다. 내가 성직자이다. 그리고 내가 믿음으로 하는 모든 것이 사역임을 깨닫으면 이제는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떠나는 것이다. 여러분의 사역지로 떠나라. 여러분의 성직으로 떠나라.

엄마는 엄마의 성직으로, 아빠는 아빠의 성직으로 그리고 사업하는 분은 사업의 성직으로 떠나야 한다. 그러니 사업장에서 성직자로 사업을 하는 것이다. 성직자로 일을 하라. 성직자로서 빨래도 하고 음식도 준비하고 일을 하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신 분의 거룩함의 부르심을 깨닫아 거룩하게 살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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